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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 사각지대의 감정 노동자: 노동은 봉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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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8 ㅣ No.1456

[경향 돋보기 - 인권 사각지대의 감정 노동자] 노동은 봉사가 아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의 규정은 자명하다. 최고위 규범의 규정이니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로 자명하다. 자명하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나 증명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자명하다는 것은 때론 공허하기도 하다. 사실, 존엄하지도 않고 가치도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까지 존엄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건 쉽지 않다. 그 범죄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자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어쩌면 자명해야만 하는 사실, 곧 당위에 가깝다. 속성 자체가 자명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의지로 그것은 자명하다고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창세 1,27 참조) 존엄하고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신앙은 진리이며 자명하나, 신앙 또한 적극적인 의지로 선택하는 거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자명한 사실에도

 

노동은 상품이 아니고 신성하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노동은 세계를 재창조하며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이다. 이 자명한 사실도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와 짝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노동을 천시하는 한국적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나중에 커서 노동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노동은 소외를 뜻하고, 때로는 힘들고 더러운 것, 능력이 부족하거나 경쟁에서 도태된 게으른 사람들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노동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동일시한 ‘레드 콤플렉스’(극단적인 반공주의) 때문에 노동에 대한 편견은 극단적이며,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한 활동은 불온하게 취급된다.

 

그런 탓에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9% 남짓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은 1-2%에 불과하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자명한 사실은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확인하며 현실적 명제로 바꾸지 않는 한,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감정 노동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모든 노동은 정도의 차이지, 모두 감정 노동이다. 말로는 상생을 말하나,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과 모순은 좀체 접점을 찾지 못한다. 가족이라면서도 노동의 기본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사업장이 너무 많다. 갑과 을로 규정된 명백한 권력관계 속에서 을의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은 곧잘 감정을 다치기 마련이다. 일상적으로 감정을 추스르며 살아야 하고, 때론 죽지 못해 산다.

 

무시, 핀잔, 멸시, 모욕과 명예 훼손 등 말이나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에 상처를 낼 수 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유체이탈적’ 존재가 아니다. 모욕을 당하면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듯, 마음을 다치면 몸도 아프다. 그러니 감정을 다치게 하는 건 사람을 해치는 일이다. 모욕, 협박, 명예 훼손처럼 명백한 범죄조차 가해자를 실제로 처벌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피고용자 처지에서 감정이 상할 때마다 문제를 제기하거나 자존감을 지키려고 저항하는 건 어쩌면 비현실적이다. 부정부패를 고발했던 내부 비리 고발인마저 배신자로 낙인 찍는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겠다는 문제 제기를 곱게 볼 자본가나 관리자는 별로 없다.

 

을의 처지에 있는 노동자에게 자신을 지켜 줄 든든한 ‘뒷배’가 없다면, 감정이 상했어도 그냥 참는 게 상책이다. 뒷배, 이를테면 자주적이며 영향력이 큰 노동조합이나 공평하며 약자 보호에 솔선수범하는 정부가 분명하게 자기 역할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그냥 체념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게 현실적이다. 그렇게 사는 게 더 큰 모욕이나 멸시를 당하지 않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

 

노동자의 고단한 삶은 세계 최고의 자살률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서도 자살률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어렵다는 가장 확실한 반증이다. 성균관대학교 천정환 교수는 「자살론」에서 “대부분의 자살이 깊고도 오랜, 반복되고 누적된 절망, 갑갑하고 초라한 일상 때문에 천천히 예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충동적으로 단박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거다.

 

천 교수의 견해가 맞는다면, 자살률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거나 숨통이 트여야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천 교수의 따끔한 지적은 우리의 참담한 현실을 꼬집고 있다. “자살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살아 있는’ 비판에 대해 애써 외면했다. 감정 노동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일상적으로 인격적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그 일이 아니면 먹고사는 게 막막해서 그저 버티는 것만이 상책이라면, 그의 뒷전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게 뻔하다.

 

어쩌면 좋을까? 나만이라도 감정 노동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그들을 배려하겠다고 다짐하는 게 그 시작일 게다. 작은 불편이나 편견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택배 노동자가 방문하면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내가 나오는 아주 짧은 장면, 겨우 한 장면만 인간답게 꾸며질 뿐이다. 더욱 본질적인 관건은 노동 조건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혁신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너무 멀어 보인다.

 

 

교회가 새로운 모범을 만들어야

 

여기에 바로 교회의 역할이 있다. 교회가 너무 멀어 보이는 노동 조건의 향상을 교회 사업장에서부터라도 실현하는 거다. 교회가 배웠고, 가르치며,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노동 분야에서 새로운 모범을 만드는 게 바로 교회의 역할이다. 지상에서 천국처럼 사는 모범을 만들면, 천국은 사람들 앞에 성큼 다가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교회의 역할은 교회가 솔선수범하는 데 있다. 가치는 설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으로만 입증될 수 있다.

 

시작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부터다. 교구나 본당,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나 병원, 사회 복지 기관 등의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떤지 살펴보자. 교회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모욕을 감수하면서 벼랑 끝에 서있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지 않은지, 그들의 노동 조건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답게 그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수준인지 살펴보자.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얼마나 되는지, 일상적인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없는지, 노동 시간은 긴 반면에 임금은 너무 박하지 않은지도 살펴보자.

 

객관적으로 또 치밀하게 실태를 점검한 다음에는 교회 사업장의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하자. 일단 구체적인 목표부터 세워 보자. 누가 뭐래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노동조합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나 병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 사업장에는 노동조합이 없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부끄러운 일이다. 노동조합만이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한 유일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는 설립될 수 있도록 돕고, 노동조합이 설립된 사업장에는 더 많은 노동자가 가입할 수 있도록 돕자. 교회 장상들이 나서서 노동조합의 설립과 가입을 독려하자. 마치 노동조합 조직률을 복음화율처럼 여기고 챙겨 보자.

 

교회 사업장에서의 노동을 무슨 봉사처럼 여기는 이상한 분위기도 바꿔 보자. 교회가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활력을 얻고, 이들의 노력과 헌신에 기대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노동과 봉사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노동은 봉사가 아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준 사람도 경영인

 

교회 사업장의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향상되고, 교회 밖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달리 노동 때문에 소외되는 일도 없으며,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노동 문제, 나아가 인간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웅변이 될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노동 조건의 개선에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니, 경영 압박이 심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사업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노동자도 사업장 문을 닫으면서까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문을 닫으면 일할 곳이 없어진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다. 그래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꼭 문을 닫는 건 아니라도 경영상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적 가치를 실현하는 경영은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에서 흔히 보는 경영과는 달라야 한다. 오후 늦게 온 일꾼들에게도 하루치 품삯을 주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보인 사람도 경영인이었다(마태 20,1-16 참조). 그런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면 겸손하게 인정하고 문을 닫으면 된다. 더 많은 일을 하겠다는 욕심, 더 큰 영향력을 갖겠다거나 더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욕심만 버리면 하지 못할 것도 없다.

 

교회가 여러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많은 일을 할 필요가 그렇게 절실한 것도 아니다. 한국 전쟁 직후라면 또 모르지만, 한국의 경제 상황은 굳이 교회가 학교나 병원을 운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절박하지 않다. 병원만 해도 그렇다. 많은 병원이 주님의 모친을 기리거나 여러 거룩한 성인을 기리지만, 막상 그 병원에서 성모님이나 성인들의 사랑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챙기는 일도 드물고, 의료 공공성의 확보에 적극적인 병원도 찾아보기 힘들다. 병원은 그저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기계적으로 돌아갈 뿐이다.

 

가톨릭 학교들도 마찬가지다. 교육 기관이 얼마나 복음적으로 운영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다른 사립 학교들과 얼마나 다른지도, 교구마다 대학을 운영하는 까닭도 모르겠다.

 

 

위선자라는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지 말아야

 

프란치스코 교종은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선포했고, 한국 천주교회도 교종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의례적인 행사를 열거나, 말로만 사회 교리를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모범을 만드는지에 있다. 노동 문제에 관한 교회의 사명은 교회 밖에 있는 국가나 자본가 또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의 의미를 제대로 실현하며 사는 데 있다.

 

더 이상 교회가 자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허망한 환상에 빠져  있거나,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싶지도 않은데, 그저 가르침이 그러니 말로만 가르침을 읊조리지 않으면 좋겠다. 세상을 구원하기에 앞서, 나 자신부터 구원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잘 살라는 건 위선일 따름이다. 위선자라는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서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이룩한 교회다.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아니 목숨마저 남김없이 바치고서 세운 교회다. 부동산이나 대학, 병원 등이 교회의 핵심일 수는 없다. 교회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교회의 명운이 달려 있다. 감정 노동의 문제조차 이렇게 교회 쇄신의 과제에 맞닿아 있다. 어떻게 하는지는 전적으로 자유지만, 심판은 명색이 교회라고 결코 피해 가진 않는다.

 

* 오창익 루카 - 인권연대 사무국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했다. 인권 운동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오창익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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