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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첨례표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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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1 ㅣ No.853

‘첨례표’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국문 초록

 

천주교회는 고유한 1년의 시간 주기를 갖고 있다. 교회력(전례력)이라고 불리는 이 1년의 시간은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등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1년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증거로 을축년(1865년)과 병인년(1866년)의 첨례표(瞻禮表)가 남아 있다. 첨례표란 오늘날의 축일표를 말하며, 여기에는 축일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 지침도 수록되어 있어, 신자들이 1년 동안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준거로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신앙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신자들은 《성경직해》와 같은 책을 통해 전례주년을 이해하였고, 《수진일과》에 수록된 <영첨례표>를 통해 첨례표의 작성 원리를 알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첨례표를 만들었고, 이 첨례표에 의거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첨례표에는 주일과 대소재, 주님과 성모 성인들의 축일, 신심회와 관련된 날, 파공에 대한 규정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첨례표에 정해진 날짜와 규정대로 이러한 내용들을 실천했다. 물론 첨례표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모두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첨례표에 있는 내용들은 공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실천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생활의 기본 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병인박해 이후 정의배 성인의 부인인 피 카타리나가 첨례표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에 기축년(1889년) 첨례표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1866년 이후 선교사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첨례표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의 자유 이후에는 다시 인쇄된 첨례표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머리말

 

천주교회는 고유한 1년의 시간 주기를 갖고 있다. 교회력(전례력) 또는 전례주년이라고 불리는 이 1년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즉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 사건을 중심으로 하면서, 여기에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성인의 축일이 더해져 전례력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1년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증거로 을축년(1865년)과 병인년(1866년)의 첨례표(瞻禮表)가 남아 있다. 첨례란 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기념하는 축일을 말하며, 첨례표(축일표)란 이러한 축일을 1월부터 12월까지 날짜순으로 표시한 것이다.

 

첨례표에는 축일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 지침도 수록되어 있어, 신자들이 1년 동안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준거로서 역할 한다. 따라서 을축 · 병인년의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신앙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가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된 적은 없다. 물론 조선 후기 신자들의 시간 개념과 관련하여 첨례표를 언급한 논문과 글1)들은 있지만,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첨례표가 분석된 적은 없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조선에 도입된 교리서 · 기도서 · 묵상서 · 첨례서 · 복음해설서 · 성인전 등의 서적이나, 신자들이 남긴 서한 · 저서, 또는 그들의 문초 기록, 선교사들의 서한에 나타나는 내용들을 토대로 연구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교리 지식, 기도 생활, 첨례 모습, 단체 활동 등,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성모 신심 · 순교 신심 같은 신심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순교 신심은 박해 시대 한국 교회의 특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은 일정한 한계성도 지닌다. 먼저 서적의 경우는 보급 범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신자들이 보았는지 불명하다. 그리고 처음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도입된 서학서들은 조선 교회의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 신자들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들이 모두 조선 교회에 적용되었는지는 의문이며, 앞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서학서 중에 어떤 내용이 실제 조선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2)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862~1865년 조선에서 간행된 《성교일과》 · 《성찰기략》 · 《성교요리문답》 · 《천주성교공과》 · 《신명초행》 · 《회죄직지》 · 《영세대의》 · 《주교요지》 · 《천당직로》 · 《천주성교예규》 · 《성교절요》 · 《쥬년쳠례광익》 등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처음부터 조선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내용 분석은 박해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적뿐만 아니라 서한과 저서도 남긴 신자가 한정되어 있고, 문초 기록도 신앙의 습득 배교 순교가 중심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즉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개별적인 또는 개별 분야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신앙생활의 전체적인 틀을 알기에는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례표가 주목된다. 첨례표는 1년 동안 신자들이 신자로서 준수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즉 첨례표에 담긴 내용들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신앙의 지침이자 실제로 당시에 실천되고 있던 내용들이다. 따라서 첨례표는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그 특성을 가장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첨례표 분석 작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2. 첨례표의 사용

 

기록상 첨례표와 관련해서 가장 빠른 것은 1791년 권일신의 집에서 나온 ‘신해첨례’(辛亥瞻禮)라는 책이다.3) 이것은 신해박해 당시 형리(刑吏)들이 양근의 권일신 집에서 압수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의 신자들은 1791년 이전부터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첨례표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첨례표에 따라 주일과 축일에 미사나 첨례를 거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서학서의 내용을 전수(傳授)하면서 처음으로 영세(領洗)와 첨례(瞻禮)의 법을 알았다거나, 1784~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할 때 신자들이 ‘날짜를 약속하고 모였다’(約日聚會)는 것5), 그리고 1786년부터 시작된 평신도 성직제(가성직제)6)하에서 미사가 집전되었다는 것7) 등에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790년 이승훈이 윤유일 편에 북경으로 편지를 보낼 때, 그 날짜를 “성령 강림 후 7주일”이라고 쓴 것8)은, 당시 이승훈이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주일의 정확한 날짜(7월 11일)까지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신자들은 어떻게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들여왔거나 신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9)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조선 신자들이 북경을 왕래한 것은 1784년의 이승훈과 1789~1790년의 윤유일, 1793년의 지황 등 세 차례뿐이다. 따라서 매년 중국으로부터 첨례표를 제공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 신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과연 이 시기 신자들이 첨례표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10) 이와 관련해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으로부터 가지고 온 서적들이 주목된다. 당시 이승훈은 종교의 진리에 대한 것 · 미신에 대한 반박서 · 칠성사(七聖事)의 해설서 · 교리문답 · 복음서의 주해(註解) · 그날그날의 성인 행적 · 기도서 등을 가지고 왔다.11) 이 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성경직해》라고 추정되는 ‘복음서의 주해’와 《수진일과》라고 생각되는 ‘기도서’이다.

 

먼저 《성경직해》는 1년 동안의 주일과 첨례를 소개하고, 각 주일과 첨례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설을 수록한 책이다. 즉 “장림(대림) 시기 → 예수 성탄 → 삼왕내조 → 봉재(사순) 시기 → 예수 부활 → 예수 승천 → 성신 강림 시기”와 관련된 주일과 첨례, 그리고 성모와 성인들의 첨례에 대한 성경 말씀과 해설이다.

 

따라서 이 책을 본 신자들은 1년 동안의 교회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떠한 날들을 기념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1790년경에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12)

 

이처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에 신자들이 교회력의 흐름과 기념해야 할 주일 · 축일들을 알고 있었다면, 다음으로는 주일과 축일의 구체적인 날짜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주일과 축일의 정확한 월일(月日)을 알아야 주일과 축일을 준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수진일과》이다. 필자가 첨례표와 관련해서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책 안에 매년 첨례표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영첨례표>(永瞻禮表)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수진일과》 판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간행 연도를 알 수 없는 것(①)이고 나머지는 1823년에 중간된 책(②)이다. 그런데 1790년에 최필공이 《수진일과》를 소유하고 있었고, 또 그 내용의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다는 사실13)은, 기도서인 이 책이 《성경직해》처럼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①과 ②에 수록된 <영첨례표>는 내용이 약간 다른데, ①에 수록된 것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쿠플레(Couplet, 栢應理, 1623~1693)의 저술이고, ②에 수록된 <영첨례표>의 저자는 알 수 없다. 다만 ②가 1823년의 중간본이라는 점에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보았던 《수진일과》는 판본 ①일 가능성이 크며, 이 판본에 수록된 <영첨례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첨례표>에는 9가지의 이동 축일을 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 모름지기 먼저 춘분(春分)을 살펴 부활첨례를 계산해야 한다. 만약 춘분이 보름 전이면, 보름 후에 주일이 있고, 보름 후에 춘분이 들면, 부활첨례는 다음 달 보름 후 주일로 이동한다. 부활 2일 전(모두 대재)이 예수수난이며, 예수수난 1일 전이 건정성체대례이다. 성체대례 전 주일이 성지예의(聖枝禮儀)이며, 성지예의 전 40일이 성회(봉재수일)이다. 부활 후 40일이 예수승천이며, 예수승천 후 10일이 성신강림이다. 성신강림 후 주일이 천주성삼이며, 천주성삼 후 4일이 예수성체이다.

 

자료 ⓐ를 보면, 먼저 춘분을 기준으로 부활첨례날을 정한 다음, 이날을 토대로 예수 수난, 건립성체대례, 성지예의, 성회례의, 예수 승천, 성령 강림, 천주성삼, 예수 성체 등 9개의 이동 축일을 차례로 계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춘계는 성회례의 7일 후에 있고, 하계는 성신 강림 후에 있다. 추계는 성가광영(聖架光榮) 후에 있고, 동계는 루치아[路濟亞] 성녀 축일 후에 있다(모두 첨례 4, 6, 7일과 관계된다)”고 하여, 사계(四季)와 사계 소재(小齋)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주일은 곧 시헌력의 28수(宿) 내 방(房) · 허(虛) · 묘(昴) · 성(星) 4일이며, 전 2일은 모두 소재를 지킨다”고 하여, 주일과 소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승훈이 가져온 《성경직해》에도 ‘주일’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 설명에도 “聖敎每七日 立一主日 卽逢虛昴 星房太陽之日是也”14)라고 하여, <영첨례표>처럼 주일이 방 · 허 · 묘 · 성 4일임을 말하고 있다.

 

넷째, 이동 축일 · 사계 소재 · 주일에 이어 <영첨례표>에는 고정 축일을 설명하고 있다. 이때 고정 축일의 기준은 예수 성탄인데, 성탄은 동지(冬至) 후 4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탄절을 기준으로, 성탄 하루 뒤가 성 스테파노 축일, 스테파노 축일 하루 뒤가 사도 요한 축일 등과 같은 방식으로 날짜를 계산하여, 삼왕내조, 성모헌당예수, 성 마티아 종도, 성모 영보, 심획성가, 성 세자 요한 탄생, 성 야고보 종도, 성 라우렌시오, 성모 승천, 성 발도로메오 종도, 성모성탄, 성 마태오 종도, 성 미카엘 대천사, 성 시몬 · 타대오 종도, 제성첨례, 추사이망, 성 안드레아 종도, 성모 시잉모태, 성 도마 종도 등의 축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1년 동안의 대재, 대재와 주일이 겹칠 경우, 대재와 소재가 같은 날일 경우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영첨례표>에는 신자들이 1년 동안 지켜야 할 주일 · 이동 축일 · 고정 축일 · 대재와 소재 등을 어떻게 계산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해의 첨례표는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조선의 신자들 역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첨례표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성 원리만으로 첨례표를 만들 수는 없다. 주일과 기준이 되는 절기의 정확한 날짜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구체적인 날짜들을 알았을까? 물론 직접 계산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 역서(曆書)의 보급 실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 역서는 진상(進上)과 각 관청 및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공건(公件)과 관상감에서 사적으로 가지는 사건(私件)을 계산하여 필요한 수만큼 인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4천 건(件) 정도가 인쇄되었는데, 이후 점차 수량이 늘어 1791년에는 14,670축(軸), 1797년에는 16,000축, 1798년에는 18,000축의 역서가 인쇄되었다.15) 그리고 이렇게 인쇄된 역서 중 사건(私件)은 상인들을 통해 시장에서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었다.16) 따라서 조선 후기 역서는 4~5집에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로 보급률이 높았다고 할 수 있으며,17) 이에 천주교 신자들도 어렵지 않게 역서를 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역서는 1653년(효종 4)에 채택된 시헌력(時憲曆)이다. 시헌력에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각 날짜는 숫자 · 간지(干支) · 납음오행(納音五行) · 28수(宿) · 12직(直) 등 5종류의 시간 주기로 표기되어 있다.18) 예를 들어 1796년 1월 13일(양력 2. 21)의 경우, 해당 시헌력에는 ‘十三日 庚申 木 虛 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19) 이 중 네 번째인 허(虛)가 28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헌력만 있으면 24절기와 28수의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고, 이것을 토대로 <영첨례표>의 원리를 적용하면 쉽게 첨례표를 작성할 수 있다. 즉 춘분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으므로 부활첨례날을 알 수 있고, 부활첨례날을 기준으로 이동 축일을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동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예수 성탄 축일을 알 수 있고, 이를 기준으로 여러 고정 축일의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 아울러 주일은 28수의 방 · 허 · 묘 · 성 4일이라고 했는데, 28수는 시헌력에 표기되어 있으므로 따로 계산할 필요도 없다.

 

결국 《성경직해》를 통한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 《수진일과》 <영첨례표>에 수록된 첨례표의 작성 원리, 그리고 당시 시헌력의 광범위한 보급 상황이 맞물리면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조선의 신자들은 첨례표를 작성하고, 첨례표에 의거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20) 그리고 이승훈이 1790년 편지의 발신일을 ‘성령 강림 후 7주일’이라고 쓴 것과 권일신의 집에서 ‘신해첨례’가 발견되고, 1791년 이전에 원시보(야고보)가 주일과 축일을 지킨 것21) 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3. 첨례표의 내용과 신앙생활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 창설 직후부터 첨례표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했고, 이러한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1800년 12월 최필제가 체포될 때 압수된 ‘첨례단’(瞻禮單), 1801년 윤현의 집에서 압수된 ‘첨례단’, 1817년 조숙을 체포시킨 ‘축일표’, 1865년과 1866년에 제작된 ‘첨례표’ 등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첨례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을까? 1866년의 첨례표를 중심으로 그 내용과 그 속에 담겨있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주일

 

첨례표에는 1년 동안의 주일이 표시되어 있다. 주일은 7일에 한 번씩 오는 것으로, 주일이 어떤 날인지는 1865년에 간행된 《쥬년쳠례광익》에 잘 설명되어 있다.

 

[ⓑ] 1년 안에 52주일이 있으니 천주를 공경하는 날이라. 천주가 비로소 만물을 만드실 때 엿새에 다 갖추시고 제 7일에 공부를 파(罷)하시고 세상 사람을 명하사 이 날을 삼가 지키게 하신지라. 고로 성교회에서 매양 7일마다 한 주일을 세우니, 무릇 교(敎)에 있는 자는 마땅히 백공(百工)을 파하고 친히 성전에 나아가 미사를 참예하고 도리를 들을 것이오. 또한 마땅히 국왕과 부모와 만민과 친우와 자기를 위하여 고루 고루 복되이 그느르시22)기를 정성으로 기구하며, 또 세상 사람들이 진주(眞主)를 알아 공경하기를 구할지니, 이 같이 하여야 주일의 예를 다하여 신익(神益)을 얻으리라.23)

 

즉 주일은 천주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날로, 천주를 공경하는 날이다. 따라서 교우들은 이날에 모든 일을 중지하고 성전에 나가 미사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의 내용은 《聖年廣益》(저자 미상)에 수록된 <主日>의 내용과 같다. 그리고 《聖經直解》의 <주일> 설명과도 거의 같다. 다만 《聖經直解》에는 ⓑ의 내용 중 밑줄 친 부분 대신에, ‘방 · 허 · 묘 · 성이 태양과 만나는 날이 주일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다른 책과는 달리 주일이 언제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통해, 조선의 신자들은 주일이 언제이며, 어떤 의미의 날이며, 그날에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聖年廣益》과 《聖經直解》는 1784년 이승훈이 가지고 온 책으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읽히던 서학서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의 설립 초기부터 주일의 시기 · 의미 · 할 일 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주일을 준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원시보(야고보)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그는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하여 먹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나면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주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 날을 지내야 하고, 또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24)

 

위의 자료는 홍주 사람으로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원시보가 1791년 이전에 활동하던 내용이다. 원시보는 주님의 날인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함을 알고 있었고, 이를 자선과 함께 실천하고 있었다.25)

 

2) 소재와 대재

 

주일에 이어 첨례표에는 소재(小齋)와 대재(大齋)를 지키는 날이 표시되어 있다. 《한불자전》(韓佛字典)에 따르면 소재는 음식을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며, 대재는 단식을 의미한다.

 

소재는 사계(四季) 소재와 일반 소재로 나뉜다. 사계 소재란 춘 · 하 · 추 · 동 사계절의 일정한 날(첨례4-수, 첨례6-금, 첨례7-토)에 지켜야 하는 재26)이다. 이 재를 지키는 이유는, 첫째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오곡이 풍성하기를 구함이고, 둘째는 천주께 성교회에 항상 좋은 감목과 탁덕을 주시어 열심히 성교 일을 다스리게 해 주시기를 구함이다.27)

 

사계 소재 외에 <영첨례표>에는 주일 2일 전(첨례6)에 소재를 지키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첨례표를 보면 이러한 규정에 맞게 표시된 소재 일은 1866년 1월 2일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 소재일은 특정한 축일, 즉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예수 승천 ·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축일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성 라우렌시오 치명 축일 · 성모몽소승천 · 성 발도로메오 사도 축일 · 성 마태오 사도 축일 · 제성첨례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의 전날에 표시되어 있다.

 

첨례표의 소재 표시와 관련해서, 먼저 주일 2일 전에 지켜야 하는 소재가 한 번밖에 표시되지 않은 것은, 소재를 지킬 날을 신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첨례표에는 하루만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특정한 축일 전날에 소재를 지킨 것은, 이 축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인데, 특히 사도들의 축일이 거의 대부분 포함된 것으로 보아, 당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사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재의 경우는, 《수진일과》에 수록된 <영첨례표>에 “1년 동안의 대재는 9일, 즉 성회(聖灰) 후 7번의 첨례6과 부활 1일 전 및 성탄 1일 전”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첨례표에도 9번의 대재가 <영첨례표>에 규정한 날에 표시되어 있다. 대체로 사순 시기에 대재가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재와 대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온전히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금식하여 절약한 음식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의미도 있다. 아울러 금식재(禁食齋)는 속죄와 정화, 수행과 극기를 위한 적절한 방편이라고도 한다.28)

 

이러한 의미의 금식재는 《성경직해》에도 언급되고 있다. 즉 재(齋)를 지킴으로써 얻은 이익을 설명하는 한편, 음식을 절제하는 육신의 재보다는 죄악을 제거하는 영성(靈性)의 재를 긴요한 재라고 하였고, 절약한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선재(善齋)라는 어느 성인의 말도 소개하고 있다.29)

 

이러한 내용들이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세박(암브로시오)이 1791년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게 하며 천주교를 욕하는 아내 때문에 집을 떠난 사실, 1801년 황사영이 <백서>에서 신자들의 대소재 관면을 요청한 것, 1811년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소재의 관면을 요청한 것과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만 대재나 지키고 경문을 외울 줄밖에 모른다’는 표현, 1866년 감옥 안에서도 대소재를 지킨 손자선 성인30) 등의 사례로 보아, 박해 시대 신자들은 대소재를 엄격히 지키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3) 축일

 

첨례표에는 교회에서 기념해야 할 여러 축일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에는 주님과 관련된 축일과 성모 마리아, 천사들, 성인들과 관련된 축일들이 있다.

 

(1) 주님의 축일

 

오늘날 교회의 전례력은 1년을 주기로 부활 시기, 성탄 시기, 연중 시기로 구분되며, 부활과 성탄이 그 중심을 이룬다. 박해 시대 역시 “성탄 → 삼왕내조 → 봉재(사순) → 부활 → 승천 → 성신 강림”이라는 흐름 속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신비가 전례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첨례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첨례표를 통해 일찍부터 전례주년에 익숙해 있었다. 신자들은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수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부활 · 승천했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권에 있는 “예수의 강생 - 수난 - 부활 - 승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서술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최해두가 《자책》에서 그리스도의 강생구속(降生救贖)에 대해 언급한 것과 1827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경언이 형벌의 고통 속에 예수의 수난을 상기한 것31)도 마찬가지의 예가 될 것이다.

 

기해박해 당시 ‘수난대재날(예수고난) 오주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밤새워 통곡하였다’는 김성임(마르타) 성녀32)와 ‘예수의 수난을 자주 기억하며, 몸이 편하면 제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여겨 가시나무를 머리에 얹고, 방아도 찧으며, 잠도 적게 잤다’던 이국후(엘리사벳)33) 순교자의 사례도 있다. 아울러 당시 신자들이 부활첨례를 성대히 지낸 사실34)에서도, 첨례표를 토대로 주님과 관련된 축일을 기념하며 신앙생활을 전개하던 신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편 1865년 첨례표에는 1866년 3월까지, 1866년 첨례표에는 1867년 4월까지의 주일과 축일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 해의 첨례표 일부를 신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부활 신앙과 좀 더 관련이 깊지 않은가 생각된다. 즉 1865년 첨례표에 실린 1866년 첨례표는 3월 26일 예수 승천, 3월 29일 주일에서 끝나고, 1866년 첨례표에 수록된 1867년 첨례표는 4월 27일 예수 승천에서 끝난다. 그리고 이어서 성신 강림 주일이 시작된다.35)

 

결국 1865년과 1866년 첨례표에 수록된 1866년과 1867년 첨례표는 부활 시기까지 표시된 것이며, 이것은 당해 연도의 첨례표가 만들어질 때, 다음 해의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기억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부활 신앙을 고취시켰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고취된 부활 신앙은 다시 순교 신심으로 이어져 한국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2) 성모 축일

 

첨례표에는 성모 마리아의 축일들도 표시되어 있다.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성모 축일은 예수 관련 축일 다음으로 많은데, 이것으로 보아 박해기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쥬년쳠례광익》(1865년)의 ‘성모성탄’ 항목에 소개된 성모 마리아의 역할, 즉 성모 마리아를 통해 ‘병든 자가 나음을 얻고 죄 있는 자가 사함을 얻으며, 근심하는 자가 위로를 얻는다는 것’,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37)라는 것은, 박해기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경직해》에도 《쥬년쳠례광익》처럼 ‘성모성탄첨례’ 항목이 있으며, 성모에 대한 《성경직해》의 설명도 《쥬년쳠례광익》의 내용과 비슷하다.38) 즉 “성모는 항상 자비한 마음을 열고 있어, 사로잡힌 자(虜人)가 놓임을 구하면 놓이게 하고, 착한 사람이 나아가기를 구하면 나아가게 하고, 죄인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고, 병든 자가 낫기를 구하면 낫게 하고, 근심하는 자가 위로를 구하면 위로해 준다.”39) 또 “성모는 하늘에 있는 별(남 북극성)과 같아, 그 자비심은 항상 일정하고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보고 바랄 수 있고, 생각하고 본받을 수 있으므로, 길[路]이 좋지 않더라도 (성모를 기준으로 해서) 천당에 이를 수 있다”40)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신자들은 초기부터 《성경직해》 등을 통해 성모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성모 신심도 점차 깊어졌다고 생각한다.41) 그 결과 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순교 전에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여러 번 불렀으며, 1798년에 순교한 이도기(바오로)도 순교 전에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홍낙민(루카)은 성모의 전구에 대한 믿음으로 매일 묵주신공을 바쳤으며, 1801년 공주에서 순교한 이종국은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천당 복을 누리러 간다”고 하였다.42)

 

1811년에는 신자들이 북경에 보내는 서한에서, 성모님께 하느님의 의노(義怒)를 푸시어 신자들이 7성사에 참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으며,43) 1845년 김대건 신부는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동정 성모의 상본을 선원들에게 보이며 성모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1838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 교회의 주보로 신청하여 1841년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고, 1861년에 조선 선교지를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성모 축일로 명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44)

 

그런 가운데 조선에는 성모와 관련된 신심 단체도 설립되었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남명혁(다미아노)은 성의회(聖衣會)의 회원이었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문홍(바오로) 회장도 ‘성모의 정덕(貞德)을 추모하여 성의회에 가입했다’는 기록이 있다.45) 그리고 성의회와 비슷한 시기에 매괴회가 설립되었고, 1846년에는 성모성심회도 설립되어 있었다.46)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신심회와 관련된 내용도 첨례표에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전구자로 굳게 믿었으며, 이에 수많은 순교자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하였다. 그리고 성의회 · 매괴회 · 성모성심회 등 성모와 관련된 신심 단체가 3개나 설립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모 축일, 성모신심회와 함께 첨례표에는 성모 신심의 증거가 또 하나 표기되어 있다. 즉 1866년 첨례표에 양력 5월의 시작과 끝인 3월 17일(양력 5월 1일)과 4월 17일(양력 5월 30일)에 “성모 성월 시작, 성모 성월 종”이라는 표기가 있다. 이 표기는 1865년의 첨례표에는 없는데, 이것으로 보아 성모 성월은 1866년부터 조선 교회에서 시행하려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모 성월의 존재는 박해 시대 신자들의 성모 신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하겠다.

 

(3) 성인 · 천사 축일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온 책 중에, ‘그날그날의 성인 행적’이 있다. 이 책은 《聖年廣益》이라고 추정되는데, 1년을 주기로 날마다 그 날이 축일인 성인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聖年廣益》은 도입 직후 여러 신자에게 읽혀졌으며, 1801년에 압수된 서적 중에는 한글본 《셩년광익》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가톨릭의 성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자들은 성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명을 짓는데, 그 성인은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주보성인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삶의 모델이며, 특정한 주보성인의 선택은 주보성인처럼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결과 주보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까지 일어나게 된다고 하겠다.47)

 

<표 3>은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과 천사 관련 축일인데, 여기에는 모든 사도와 복음사가들이 있고, 3명의 대천사와 호수천신이 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가족(안나 · 요아킴 · 요셉)과 동국대주보(성 요셉 ·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있으며, 2명의 치명자(성 라우렌시오 · 성 스테파노)가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 막달레나 및 바오로 성인의 회두 사건을 기념하는 ‘성 바오로 귀화’ 축일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박해 시대 신자들은 <표 3>에 있는 성인과 천사들을 공적으로 기념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 축일은 조선 교회에서만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 축일을 공적으로 기념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공경심도 깊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는 신자들의 세례명에서도 나타난다. 즉 1801년 이전에 세례명을 알 수 있는 남자 신자의 54.3%가 사도였는데,48) 이것은 사도들의 축일이 첨례표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첨례표에는 성 요셉 축일(2. 3)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축일(10. 27), 그리고 <표 2>의 성모시잉모태 축일(11. 2)에 동국대주보라는 표기가 있다. 이것은 당시 조선 교회의 주보이신 성 요셉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신자들에게 기억시키고, 두 주보의 도움으로 조선 교회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성 요셉 축일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축일에 성모와 성 요셉을 부기(附記)하고 있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을 조선 교회의 주보로서 함께 기념하던 당시의 교회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49)

 

다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은 1748년에 ‘희망봉에서부터 인도 · 중국 ·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사베리오 성인이 주보인 동국은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여러 나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50) 즉 인도 · 일본에 복음을 전하고 중국까지 진출하려다 선종한 성인을 동양 선교의 주보로 기억하면서, 성직자가 없던 시기 성직자의 파견과 신앙의 자유를 꿈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의 신자들이 첨례표상의 성인들만 공경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01년 이전에 이미 《성년광익》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고, 《쥬년쳠례광익》(1865)에도 첨례표에 수록되지 않은 31명의 성인들이 더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신자들은 첨례표상의 성인 축일을 공적으로 지내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성인전을 읽고 다른 성인들의 삶도 본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정녀 심 바르바라가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51)이나, 문영인(비비안나)이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을 따라 순교하려는 원을 드러냈다’52)는 것 등은 당시 신자들의 성인 공경 의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4) 단체 활동

 

첨례표에는 신자들의 단체 활동과 관련된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즉 매괴회, 성의회, 예수성심회, 성모성심회, 전교회 등 5개 단체와 관련된 날을 표시하고, ‘매양 자기든 회 보람을 지키는 회우가 고해 영성체하고 마땅히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느니라’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성심회 규구’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1865년의 첨례표에도 있는 것이다.

 

단체와 관련해서 첨례표에는 예수성심회의 표시가 있는 날이 25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매괴회 19일, 성의회 13일, 성모성심회 10일, 전교회 4일 순이었다. 그리고 단체의 기념일이 겹치는 경우는, 연관성은 알 수 없지만 매괴회와 예수성심회가 14일로 가장 많았고, 단독으로 기념하는 날은 성의회가 10일로 가장 많았다.

 

5개의 단체 중 성모성심회는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에 설립되었고, 매괴회와 성의회는 1846년 이전에 이미 조선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단체들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 조선 교회의 성모 신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다.

 

한편 1857년경에 설립된 전교회는 신심 단체는 아니다.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는 단체이다. 프랑스 리옹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전교회는 각지의 회원들로부터 수합된 회비를 전교 지역에 보냄으로써 천주교의 선교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는 1857년경에 전교회가 설립되어 정의배(마르코) 회장이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관리한 듯하다. 특히 1857년 1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킨 것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박해 지역의 신자들이 나눔의 정신을 가지고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례라고 하겠다.53)

 

다음으로 예수성심회는 1865년의 첨례표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865년 이전에 조선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865년 첨례표에 ‘예수성심회 규구’가 소개되고, 또 첨례표에 5개의 단체 중 ‘예수성심회’와 관련된 날이 가장 많은 것은, 이즈음 교회가 예수성심회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예수성심회가 강조되면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도 점차 커져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9세기 중반 조선의 신자들은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신앙생활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체 활동은,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또 성직자들을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신자들의 신앙심을 강화시키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신자들의 신심회 가입을 적극 권장했다.54) 아울러 신자들도 신심회에 가입하면 전대사(全大赦)55)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또 장차 천당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거둘 수도 있다고 함으로,56) 신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심회를 포함한 단체 활동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첨례표에 신심회와 관련된 날들을 표시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심회와 관련된 날이 48일로 상당히 많았는데, 이 숫자는 첨례표에 내용이 표시된 121일의 40%에 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해 시대 신자들은 1년 중 3일에 한 번은 주일 · 대소재 · 축일 중 한 날을 지켰고, 1주일에 한 번은 신심회와 관련해서 신공을 바쳤다고 하겠다.

 

한편 교회에서는 신심회에 들지 못한 신자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길도 열어두었다. 즉 신심회에 들기 위해서는 신부에게 입회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 신부를 만날 수 없는 경우에는 신심회에 들지 못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없게 된다. 그런데 첨례표에 부기된 내용을 보면, “공번” 표시가 되어 있는 날에는 ‘신심회에 든 이나, 아니든 이나, 모든 교우가 고해 영성체하고 마땅히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는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날로는 성 요셉 동국대주보, 예수 성체, 성 베드로 · 바오로 이위 종도, 성모몽소승천, 호수천신,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동국대주보 축일 등이 있었다.

 

5) 파공

 

첨례표에는 파공(罷工)에 대한 내용도 있다. 즉 파공과 대파공, 그리고 파공하지 않아도 되는 축일 등이 표시되어 있다.

 

파공하는 날은 모든 주일과 성모취결례, 성모 영보, 예수 승천, 예수 성체, 성 요한 세자 탄, 성 베드로 · 바오로 이위 종도, 성모성탄, 성모시잉모태, 예수수할손례, 삼왕내조 등 10일이며,57) 특히 전일을 파공해야 하는 대파공은 예수 부활 주일, 성신 강림 주일, 성모몽소승천, 예수 성탄이다. 따라서 이 14일은 주일과 함께 축일 중에서도 중요한 축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자들도 이러한 축일의 성격을 알고 신앙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조선 교회의 경우, 중국이나 통킹, 그 밖의 몇몇 극동 지방의 포교지에서와 같이 교황청의 허락하에 신자들은 주일 정오부터는 일을 할 수 있었다.58) 그러나 1846년에 순교한 한이형(라우렌시오)은 아무리 농사일이 바빠도 파공날 오후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관면을 통해 일을 할 수 있었지만 파공 의무를 지키고자 한 것이며, 이러한 한이형의 모습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려 했던 신자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외 나머지 축일들은 파공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러한 날에도 ‘모든 교우가 첨례와 파공의 본분이 있지만, 힘써 지키면 공이 있고, 지키지 못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라는 설명을 붙여 파공을 권장하고 있다.59)

 

한편 첨례표에는 파공 관면과 관련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즉 ‘예수 성체(1866. 4. 17 - 양 5. 30) · 성 요한 세자 탄일(1866. 5. 12 - 양 6. 24) · 성 베드로 · 바오로 이위 종도(1866. 5. 17-양 6. 29) 축일인 세 날은, 농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긴급한 때이므로, 주교가 교황의 은혜를 받아 파공을 특별히 관면하되 첨례는 마땅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세 날 중에 주일이 있으면 그날은 관면하지 않으며, 또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은 이 관면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농번기에 대한 교회의 배려를 보여주는 것인데, 위의 세 축일이 속해있는 양력 5월 말에서 6월은 농부들에게는 매우 바쁜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주일과 함께 예수 성체, 성 요한 세자 탄일, 성 베드로 · 바오로 이위 종도, 예수 성심, 성 바르바라 종도 등의 축일이 들어있다. 이 중 예수 성심과 성 바르바라 종도 축일은 파공 축일이 아니므로 상관없지만, 나머지 세 축일은 파공 축일이기 때문에 농부들에게는 시기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에 교회에서는 농번기에 대한 배려로 농부들에 한해 이 세 날의 파공을 관면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날이 주일인 경우는 관면을 허락하지 않아, 주일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엄격하게 준수토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 ‘장림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는, 혼인 음식과 의복을 화려하게 하는 것을 엄금한다’라고 함으로써, 대림 시기에서 성탄 시기, 사순 시기에서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검소하고 경건하게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첨례표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첨례표는 모든 신자가 신자로서 준수해야 할 내용과 그것을 언제 실천할지를 알려주는 신앙 지침표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신자들이 실제로 지키고 실천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첨례표는 박해 시기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첨례표에는 주일과 대소재, 주님과 성모 · 성인들의 축일, 신심회와 관련된 날, 파공에 대한 규정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첨례표에 정해진 날짜와 규정대로 이러한 내용들을 실천했다. 즉 주일과 축일에는 미사와 첨례에 참석하여 주님의 거룩한 날을 지켰고, 관련 성인들을 기렸다. 그러면서 우리를 위해 강생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굳게 믿었고, 성모 축일과 3개의 성모신심회, 성모 성월을 통해 전구자로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성인들의 첨례 때에는 조선 교회의 주보와 12사도, 복음사가, 치명성인 등을 기억하며,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 기회로 삼았다.

 

다음으로 대소재가 표시된 날은 금육과 금식을 철저히 지켰으며, 신심회에 가입한 후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날에는 전대사를 얻기 위해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파공으로 규정된 날에는 생업을 쉬었다. 특히 첨례표에는 신심회와 관련된 날들이 많았는데, 이것은 성직자들의 사목적인 고려와 신자들의 신앙적인 필요성이 결합되어 신자들의 신심회 가입이 활발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상의 것들이 박해 시대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이후 일상적인 기도 생활, 교리 공부, 전교와 같은 교회 활동을 하였고, 성직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성사도 받았다. 그리고 십계명을 준수하는 등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으며,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 체포되면 배교하거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다.

 

이처럼 첨례표에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모두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첨례표에 있는 내용들은 공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실천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생활의 기본 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60)

 

한편 병인박해 이후 정의배 성인의 부인인 피 카타리나가 첨례표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에 1889년 첨례표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1866년 이후 선교사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첨례표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의 자유 이후에는 다시 인쇄된 첨례표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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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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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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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9 ; 조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 조광,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도의 일상생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 대구대교구, 2012년 12월호. 일제 시대(1916~1933년)의 첨례표 연구로는, 김정환의 글(<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첨례표 연구>, 제177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발표회 발표문, 2013. 10. 26)이 있다.

 

2) 이러한 방향의 연구로는, 조한건의 <쥬교요지와 한역서학서와의 관계>(《교회사연구》 2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와 <‘셩경직해광익’ 연구>(서강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11)가 있다.

 

3) 《승정원일기》 정조 15년(1791) 11월 12일 ; 조현범, 앞의 논문, 187쪽.

4) 이 시기 지도급 신자들이 첨례표를 소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들은 첨례표를 토대로 신앙 모임을 주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5) 이만채 편,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95~96쪽.

 

6) 지금까지 1786년 이승훈 등이 세운 교계제도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칭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가짜’, ‘거짓’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 타당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필자는 이승훈 등이 세운 교계제도가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 ·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평신도 성직제(도)’라고 칭하고자 한다. 이 용어에는 ‘가’(假)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특징인 평신도들의 활동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 최석우,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73, 175쪽.

8) 최석우, 앞의 논문, 177쪽.

9) 조현범, 앞의 논문, 187~188쪽.

 

10) 조현범은 천주교인들이, 주일은 7일마다 온다, 성탄은 동짓날 사흘 뒤다, 부활절은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춘분이 지난 뒤 만월 후의 주일이다 등, 초보적인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대략적으로 주일과 축일을 계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조현범, 앞의 논문, 188쪽).

 

11)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7쪽.

 

12) 최석우 몬시뇰은 《성경직해》가 일찍이 번역된 것은 필연코 주일과 축일에 사용하기 위한 긴급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24쪽).

 

13) 이기경 편, 《벽위편》, 서광사, 1978, 127~128쪽 ; 《승정원일기》 정조 15년(1791) 11월 11일.

14) 《聖經直解》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58쪽.

15) 정성희,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 《조선시대사학보》 23, 조선시대사학회, 2002, 132~133쪽.

 

16) 1885년의 경우, 진상과 관용 역서가 465축 6건, 각 관청에서 사용할 역서가 1,804축 15건인 반면, 관상감 관원들이 관리하던 것이 15,189축이었는데, 이 15,189축이 일반인들에게 판매되는 것이다(정성희, 앞의 논문, 136~138쪽).

 

17) 1801년 조선의 인구가 7,513,792명이므로, 이 시기 18,000축의 역서가 인쇄되었다면, 21명당 1개의 역서가 생산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한 가구의 가족 수가 5명이라면 4~5가구당 1개의 역서가 배부될 수 있다.

 

18) 이창익, <시헌력 역주에 나타난 시간 선택의 의미>, 《종교문화비평》 창간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2, 266~271쪽 ; 이창익, <조선후기 역서의 구조와 의미>, 《민속학연구》 17, 국립민속박물관, 2005, 238~239쪽.

 

19) <大淸嘉慶元年歲次丙辰時憲曆>(규장각 소장, 奎7639).

20) 물론 첨례표에 대한 지식과 첨례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첨례표를 통해서라고 생각된다.

21) 3장의 자료 ⓒ 참조.

22) 그느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보살펴 주다.

23) 《쥬년쳠례광익》 1, <주일>.

24) 《한국천주교회사》 상, 417쪽.

 

25) 이처럼 원시보가 홍주에서 주일과 축일을 제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주일과 축일이 표시된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거나 그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6) 1866년의 첨례표상 춘계 소재는 1월 7일 · 9일 · 10일, 하계 소재는 4월 9일 · 11일 · 12일, 추계 소재는 8월 11일 · 13일 · 14일, 동계 소재는 11월 13일 · 15일 · 16일이다.

 

27) 《쥬년쳠례광익》 1, <사계 소재> ; 《聖年廣益》, <四季減>.

28) 정진석, <금식재>,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073쪽.

29) 《聖經直解》 I, 417~428쪽.

30) <백서> 119~120행 ; 《한국천주교회사》 중, 26~27, 35, 117쪽 ; 《한국천주교회사》 하, 442~443쪽.

3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101쪽.

32)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510쪽.

33) 김영수 번역, 《박순집증언록》,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99쪽.

34) 《한국천주교회사》 상, 458쪽 ; 《한국천주교회사》 중, 52쪽.

35) 1866년과 1867년의 예수 승천 날짜가 1달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1865년에 윤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36) 김정환 신부가 제공해 준 일제 시대의 첨례표(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에는 양력 1~12월까지만 수록되어 있어 1865~1866년의 첨례표와 다르다. 이것으로 보아 16개월씩 수록된 박해 시대의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하겠다.

 

37) “성모 나시매 사로잡힌 자 놓임을 얻고 병든 자 나음을 얻고 죄 있는 자 사함을 얻고 근심하는 자 위로를 얻고, 선인에게는 총복을 더으시고… 성모는 동정의 표준이요…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오, 선인의 스승이시오, 죄인의 의탁이시오, 병인의 나음이시오…”(《쥬년쳠례광익》 2, <성모성탄> ; 이재순, <周年瞻禮廣益의 分析>, 《한국교회사논문집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407쪽).

 

38) 《성경직해》 10권은 ‘성모첨례’만을 모아놓은 것인데, 첫 쪽부터 7쪽에 걸쳐 ‘성모’에 대한 설명을 한 후, <표 2>의 13, 8, 4, 7 첨례에 대한 성경 말씀과 해설을 싣고 있다.

 

39) 《聖經直解》 II, 359쪽.

40) 《聖經直解》 II, 361쪽.

 

41) 《성경직해》와 같은 복음해설서가 당시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살이 - 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참조.

 

42) 《한국천주교회사》 상, 354, 408, 451~452, 455쪽.

43) 《한국천주교회사》 중, 22~23쪽,

44) 《한국천주교회사》 하, 69, 137, 324쪽,

 

45) 《한국천주교회사》 중, 393쪽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현대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275쪽.

46) 이 시기 단체에 대해서는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5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참조.

 

47) 박해 시대 세례명을 짓는 과정과 세례명의 특징, 의미에 대해서는, 방상근, <18세기말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과 세례명>, 《교회사연구》 3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참조.

 

48) 방상근, 앞의 논문, 79쪽.

 

49) 《천주성교공과》 권3의 ‘성모시잉모태 찬미경’에도 ‘동국대주보 성 요셉에 대한 기도’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이정운, <한국천주교회의 주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재인식과 3000년기 한국교회>,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307~308쪽).

 

50) 조광 교수의 교시(敎示). 《천주성교공과》 권3의 ‘성방지거 사베리오 도문’에도 “인도국과 동방의 으뜸 탁덕이신 성방지거… 동방 성교의 근기여… 전능하신 천주여 이미 성방지거의 전교함과 영적으로 동방 여러 나라 사람을 성교회에 모이게 하신지라…”라는 대목들이 있다.

 

51) 《한국천주교회사》 상, 471~472쪽. 

52) 《한국천주교회사》 상, 504쪽.

53) 전교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앞의 책, 179~180쪽 참조.

 

54)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다블뤼 신부의 활동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교우 집단에 도착하면, 신자 수가 적기 때문에 흔히 24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일찍부터 미사성제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여 주고 견진과 혼배성사를 주고, 그 다음에는 ‘매괴회’와 ‘성의회’에 입회를 시켜야 합니다…”(《한국천주교회사》 하, 94쪽).

 

55)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56) 《미과수원》(필사본), 1886.

57) 1865년 첨례표에는 예수고난과 성 요셉 동국대주보 축일도 파공으로 되어 있다.

 

58) 《한국천주교회사》 하, 129쪽 ; 한편 《쥬년쳠례광익》 1권 <주일> 항목에는, 주일과 파공 첨례 때 가장 빈궁한 사람만 반일 파공을 허락한다고 되어 있다. 즉 가난한 사람은 오후에 일을 할 수 있는데, 속여서는 안 되며, 만일 반일 파공도 하지 않으면 승천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59) 《천주성교공과》 권2의 ‘첨례하는 규식’에도 “파공할 본분이 없는 첨례에는, 비록 첨례를 할 본분은 없으나 하는 것이 좋으니, 할 때에는 초행공부와 해당 첨례의 기도문과 찬미경과 성모를 찬송하는 경과 이완공부(마침 기도)를 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60) 첨례표상의 주일과 첨례는 《천주성교공과》의 주년주일 · 주년첨례 목록과 같다. 따라서 박해시대 신자들은 첨례표상의 주일과 첨례날에 《천주성교공과》에 있는 해당 주일과 축일의 내용으로 예식을 거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보아 첨례표는 당시의 첨례서, 기도서 등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활용되었다고 하겠다. 아울러 1862년 최형의 책임하에 《성교일과》를 3,000여 질, 《성찰기략》을 1,000여 권 간행한 사실은, 당시 교회 서적의 분포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주는데, 을축년 · 병인년 첨례표도 인쇄본이라는 점에서 상당수가 인쇄되어 신자들에게 배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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