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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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8 ㅣ No.907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1)

 

 

가톨릭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도 설레는 마음이다. 무엇보다도 이 만남을 이끌어주시는 분은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우리 각자는 세상 안에서 녹록치 않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자 신앙인이다.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안에 좀 더 머무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를 이 소중한 만남 안에서 나누고 싶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기도가 아닌가 싶다.

 

‘기도’ 하니까, ‘주님의 기도’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첫영성체를 준비하면서부터 주님의 기도를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이며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유년기에 교리반 선생님께 그렇게 배우며 주님의 기도를 처음 대하게 됐다. 기도를 시작한 것은 비록 문자를 통해서였지만, 아득했던 하느님과의 지성적인 첫 만남은 나의 인생에서 그때였다.

 

그 후로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인 하느님을 친밀히 만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유년기를 넘기면서 느끼는 고민들과 어려움, 곤란함을 겪을 때, 혹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사함과 행복감을 느낄 때는 엄위하시고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신 듯했던 하느님이 조금은 가깝게 여기지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게 된 큰 계기는 사제의 꿈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가 생활하면서부터다. 십자가와 수난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듯,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인격에서 끊임없이 비춰지고 있음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요한 5,19-20)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어디인가? 구름 위 저 높은 곳을 말한다면 고층빌딩이나 옥탑방에 사는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깝다. 그러나 그 하늘은 당연히 아니다. 주님의 기도를 꼽씹어 보면, 그 지고한 하늘은 이미 낮고 낮은 우리 삶의 현실로 내려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에서 하느님께 대한 찬양어린 고백과 우리 현실의 간절한 청원을 대변하신다. 여기에는 확고부동한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와 우리가 바치는 올바른 기도의 개념이 단순명료하게 담겨져 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초대받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앙의 여정은 이러한 영적 기초에서 시작됨을 말이다.

 

앞으로 이 지면에서 주님의 기도를 세밀히 들여다보자.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 자체가 부활하시어 우리의 인생 여정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우리는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느끼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삶이기에 우리가 드리는 일상의 기도는 은총의 통로가 된다. 예수님께서 늘 기도하시며 일생 품으셨던 살아계신 영(루카 10,21 참조)을 음미하고, 그 영을 따르는 것이 영성생활의 근간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1월 22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2)

 

 

영적 목마름을 토로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기도가 어떻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이나 다른 민족 사람들을 닮지 말라고 먼저 운을 떼신다. 유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율사들의 기도하는 모습에서도 당시의 종교 문화적 풍경이 그려진다. 예수님은 이 그림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으라고 하시듯 단순하면서도 주의를 끄는 하나의 빛을 던지신다. 구하기도 전에 필요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숨은 일도 보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확신을 전제하신다.(마태 6,5-8 참조)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냉정하고 비판적인 눈이 아니라 다정스런 아버지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아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장황한 말로 우리의 요구를 알릴 필요가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해서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갈림 없는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의 가난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바람조차 겸손히 의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풍부하고 고귀한 은총의 선물로 남아 있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이끌어주신다.(마태 6,9-15 참조)

 

떼르뚤리아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를 ‘복음 전체의 요약’(breviarium totius evangelii)이라 일컬었다. 이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물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 고유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기도를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바칠 수 있는지 체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그분의 정신을 따라 바치도록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일상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부활의 영성으로 가는 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모세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없이도 우리는 그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 알듯이, 하느님 체험은 예수님의 일상과 그분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함에 열려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육화이신 그리스도를 안에서 체험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면을 통한 이 나눔은 결국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성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다시금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마음을 읽다보면 그분께는 세상에 실존하신 순간부터 부활의 삶 안에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신앙인의 생활이 부활의 영성으로 점철되는 이유이다. 

 

예수님께는 수난과 십자가 이전의 공생활이 부활의 삶이셨고, 또한 부활의 빛으로 교회 안에서 현존하신다. 작금처럼 혼잡한 사회문화의 조류가 심할수록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를 깊이 묵상하고 관상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과 삶의 주변을 사랑과 존중으로 바라보는 영혼의 시선이 충만할 때 영성생활이 정리되고 부활체험은 지속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2월 5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3)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는다. 언어로서의 소리 중에 각자의 이름만큼 분명한 음성이 또 있을까 싶다. 세례성사로 주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세례명을 받았다. 신앙인은 세속의 이름보다도 자신의 세례명이 호칭될 때 스스로의 통합적인 정체성을 느낀다. 

 

놀랍게도 모세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당신의 신원을 알리시는 하느님과 대면한다. 더할 수 없는 이 완전함을 인간이 담아낼 수 없음에도 복음서는 ‘아빠! 아버지!’(마르 14,36)하며 하느님과 일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게 전한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는 예수님 기도의 정점에서 하느님을 본다. 

 

사람이 상대방을 소리내어 부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매우 절박한 상황을 내포하기도 한다. 인간의 죄 안으로 육화되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늘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을 먼저 계시하고 계심을 아셨다. 

 

이에 그리스도인도 하느님께서 먼저 가까이 오시므로 그분께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다.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처럼 그분을 믿고 고백하는 특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되었음을 통감하게 된다. 

 

하늘에 계시다는 은유적 표현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초월하여 계심을 증언하신다. 이는 세상을 하느님의 일부로 치부할 수 없고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 또한 그분께 대한 경외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창조적 차원에서 관상하시며 내면으로부터 아버지 곁에 계셨다. 그렇게 세상 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함께 머무르셨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찬양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당신에게서도 성취되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라고 성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이는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께서 거룩해지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는’(시편 34,19) 구원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들 또한 하늘에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 안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자녀를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이시다. 그러기에 순박한 어린이와도 같은(마르 10,14 참조) 우러나는 찬미와 겸허한 공경은 하느님께 이른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언제나 깊이 인식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 또한 우리의 영이 거룩해지는 일로 압축된다. 이 지속적인 인간의 영적 성숙은 당신의 완전성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늘 깨어있음으로 가능하다.(마태 5,48 참조) 

 

단, 이 초대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기도수련을 해야만 한다거나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만 성취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의 인성이 당신께 이르기 전에 이미 임마누엘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일상에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현존체험은 증대된다. 사실 신앙인은 세상 안에 그렇게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이에 응답하는 영성생활은 생동감이 넘친다. 삶의 순간순간에 “오, 하느님 아버지!”하고 부르는 신앙인이 되자. 제자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10 참조)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2월 12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4)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완성시키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다스리심은 세상 안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그리고 제자는 종말론적인 아버지의 나라를 고대하는 세상의 순례자다. 현세의 교회공동체와 개별 신앙인들 각자도 제자로서 세상 안에서 펼치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품위와 공동체가 생명으로 약동하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동고동락하시며 열정을 다하신 이유다. 

 

세상이 뿜어내야 할 의로움과 평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친교와 상생의 가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6,33) 하신 예수님의 절박함에서 짙게 묻어난다.

 

오래 전 ‘아버지의 나라’로 떠나신 은사 신부님의 훈화가 생각난다. 당신을 폭탄공장 공장장, 사랑의 원자폭탄을 만드는 공장장이라 하셨었다. 신학생들이 비둘기같이 양순해 보여도 가슴에는 사랑의 폭탄을 품고 사는 사랑의 혁명가로 양성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학교는 전공과 양성뿐만 아니라 모든 교육을 통틀어 세상을 개혁할 혁명가 양성소요, 이 나라와 민족에 일조할 혁명가를 길러내는 정신개혁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명에 충실한 사제는 당연지사 애국자임도 강조하셨다. 혹자들은 폭탄 생산은 좋지만 불발탄이나 오발탄은 어찌 하느냐고 염려한다. 실천보다 말을 앞세우는 불발탄도, 엉뚱한 곳에 열정을 쏟는 오발탄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그래도 사랑의 폭탄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야 없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자. 배타적 거대 경제주의와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자비 속에 개인적·공동체적 고통의 배가로 상생의 문화가 표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용기를 내어 이런 현실의 전환을 지향하며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 세상이 쏟아내는 파괴와 상실의 아픔에 맞서 희망을 잃지 않고 치유자로서의 복음생활을 계속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세상의 장대함과 아름다움도 그대로 꿰뚫어 보아야 한다. 신앙은 이러한 기도와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이것이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드려야 할 기도의 범위다. 그 힘의 원천은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육화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페 4,9) 

 

은사 신부님과 그분의 영성에 대한 존경은 사제직에 몸담고 있는 현재의 나 자신을 환기시킨다. 사랑의 폭탄을 만들고자 함은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나라가 임하기를’, 이 땅에 사랑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는 희망가처럼 이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가 먼저 자신 안에서부터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의 영혼 안에서 다스리시며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 나라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과 삶의 주변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제자의 영은 헛된 욕심과 명예로부터 해방되어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용과 평화와 의로움의 태도와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열어간다.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각자가 한 사람의 성실한 제자인 이상 그 나라의 완성은 자신과 세상 안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2월 19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5)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 부분은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의 백미다. 

 

우주의 역동성과 인간의 일상사를 통합하고 계신 예수님의 영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로부터 땅에로의 길에서 교차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도 구원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에 힘입어 신앙인도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실존적인 변화가 촉진된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뜻’이 요청하는 것들을 깨닫는 마음의 눈과 영혼의 귀가 열려 그 뜻이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스며들게 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형화되는 사회현상 앞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창의적 사고와 휴머니즘적 연대보다 경직된 획일주의와 도피성 개인주의가 대세다. 첨단사회가 낳은 편리주의는 인간의 영적 영역에 그늘을 드리우고 내면에 대한 통찰을 가로막는다. 인문학적 활자보다 영상매체를 통한 사회문화에 노출된 성장기 세대들의 철학능력은 퇴화하고 있다. 고유하면서도 다양해야 할 개별 인간의 상호 교류와 사회정의의 순환은 경계심과 배타성에 막힌다. 

 

상대적 박탈감 속에도 과도한 소비문화는 합리화되고 신앙인 각자가 안고 있는 복음의 생활화(토착화)도 요원한 실정이다. 듣고자 하나 듣지 못하고, 정작 들어야 할 것에는 고개를 돌리는 게 다반사인 인생사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7)하는 신앙의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신앙은 난감한 이 현실을 내면으로부터 반전시킬 수는 있는지 자문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주관적 판단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뜻’(voluntas Dei)은 현실에서 식별돼야 한다. 이는 공동체를 통해, 진리와 정의의 삶을 통해, 자연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때문에 개별 인간의 고착된 주관에서 기인되는 존중과 배려의 상실, 공동체적 상생과 공존의 제도적 붕괴는 하느님 나라를 가로막는 장벽이자 위험요소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수행하는 세상의 모든 환경과 문화 안에서 폭넓게 이해되고 수용돼야 한다. 신앙인은 그러한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성숙한 문화와 인간 삶의 질적 향상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를 갈망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신앙인의 복음생활과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깊이 지녀야 할 마음이다.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섭리의 확장은 당신의 고유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제외될 수 없고 수동적인 방관자도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긴다. 의인뿐 아니라 죄인까지도 회개하고 모든 이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실현된다. 

 

하늘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은 곧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하느님 체험을 향한 내면적 성찰과 공동체와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은 복음적 사고의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자연질서 안에서 피조물간의 상호협력, 인간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성장,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통합된 사회공동체에서 구체화된다. 의식 있는 신앙생활로 자신을 일깨우자.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2월 26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6)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끼리 “밥은 먹고 사냐?”는 인사 아닌 인사를 주고받을 때가 있다. “당연히 밥은 먹고 살지!”하며 밥을 사는 여유까지 부린다. 

 

역으로 이런 상황에서 위축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인간관계에 자신감마저 잃는다. 이런 인사를 듣노라면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게 한국인의 정서인가 싶다. 

 

어느새 먹고 사는 게 삶의 전반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나보다. 누려야 할 행복감마저 사치가 아닌가 싶고, 먹고 살아야 하는 전쟁같은 현실을 거부할 수 없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신앙인도 현실적인 가난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질 않아서 부담스러울까마는 가진 게 있어야 성당에 나간다는 항간의 속설은 적잖이 찜찜하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청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마저 백지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영적 식별이 필요하다.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마태6,8 참조) ‘오늘’ 필요한 양식을 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신다. 

 

과연 오늘 양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지 의구심에도 겸손되이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마음이 실존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예수님은 꿰뚫어보고 계신다. ‘오늘’은 ‘영원’으로 이어진 시간의 다리이다. 

 

그래서 날마다 허락하시는 ‘오늘’에 집중하라고 하신다. 일용할 양식에 비친 ‘오늘’을 대면하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carpe diem)는 명대사가 겹쳐진다. 

 

교부들은 ‘일용할 양식’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기르는 참된 양식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고 의미 짓는다. 구원의 성찬인 이 양식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영적 생명력을 받아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에서처럼 일용할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승화된다. 물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루치 양식의 의미도 포함된다. ‘양식’은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 모두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필요한 양식을 청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러한 청원기도가 얼마나 현실적이며 절박한 지 알 수 있다. 최소한의 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강대국들의 경제소비와 낙후한 제3세계의 절대빈곤이 공존하는 세태는 언제 종식될 것인가. 

 

제자들부터 예수님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충만할 수 있는 청원기도를 바쳐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의 첫 번째 관심사는 하느님의 일에 관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고 믿는다. 

 

신앙인이 오늘 청하는 진정한 양식은 안전한 미래를 보장하는 풍부한 재물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다만 ‘오늘’ 필요한 것을 청한다. 

 

인간의 본성은 많은 것을 원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필요마저 나누는 사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제자로서 지녀야 할 신앙인의 영혼이다. 제자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며 나눔과 절제와 겸손의 덕을 빛나게 한다.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시며 사셨다.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선뜻 내어놓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요한 6,9 참조) 절실한 세상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3월 5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7)

 

 

주님의 기도에서 잘못에 대한 용서 부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청원기도가 조건문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전제하신다. 이 조건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조건을 이행했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청원을 올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 조건부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살 속에 박힌 아픈 가시처럼 남아 있다.

 

하느님은 당신 은총을 되는 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줄 때에만 우리가 그분을 거슬러 범한 죄의 짐을 기꺼이 떠맡아 주신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받게 되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 서로의 잘못으로 인해 파생된 그릇된 상황을 극복하는 새로운 수용이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에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가장 큰 은총일 것이다. 죄는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양상이다. 자비와 화해를 선사하시는 하느님을 뒤로한 불신과 반목, 원한과 분노는 인격을 손상하고 삶의 가치를 실추시킨다. 우리의 경험상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안다. 궤양성 종양과도 같은 죄를 깨끗이 치유해 줄 의사를 필요로 하면서 어떠한 사례를 할 능력 또한 없는 처지다.

 

하느님 홀로 의사가 되시며, 그분은 기꺼이 우리 죄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 주신다. 결국 이 기도는 종말을 상기시키고 있다. 자신의 죄는 그때에 다시 확인될 것이므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희망한다. 무지와 무의식으로 행한 죄와 타인에게 전달된 걸림돌도 용서받아야 한다. 용서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자비로 이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와 치프리아노 같은 교부들은 세례성사로 죄를 용서받았지만 이후로도 날마다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날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믿는 이들만이 바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양육하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나날이 용서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이들의 기도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세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용서에는 이미 나에게 끼친 타인의 모든 허물도 용서한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이 약속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준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 또한 가장 큰 죄가 된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잘못한 모든 이도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용서는 바로 하느님의 정의이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을 닮고 그분을 만난다. 하느님과의 계약의 성취는 회심과 용서하는 기도, 그리고 이에 따른 행위뿐이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이라는 긍정적인 정신과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이 상반될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기다리신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은 한없는 자애로 다가온다. 세상에서 화해와 친교가 활발할 때 주어지는 은총임을 언제나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용서는 치유의 법으로 정립된다.(마태 6,14 참조) 여기에는 아무런 빈틈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이 말씀을 확고하게 보완한다.(마태 18,23-35 참조) 이러한 정신의 법이 깊숙이 자리 잡아 그 생활을 다스리지 않으면 진실한 믿음이란 무력해진다.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1코린 4,4)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를 어려워하지만 용서에 대하여는 신속한 그리스도인의 영은 샘물처럼 맑다. 참된 하느님의 자녀요, 가히 예수님의 제자라 하겠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3월 12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8)

 

 

주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이다. 죄의 위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일상적인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통상적인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유혹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는 유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확고함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는 특별한 유혹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몸소 체험하신 것과 같은 유혹이다. 즉 배신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배척하라는 것이다. 유혹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를 등지고 탐욕과 불의에 굴복함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유혹을 받으셨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게쎄마니에서 번민하실 때에도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셔야만 했다.(마태 26,41 참조)

모든 것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제자의 기도 또한 진실하고도 간절해야 한다. 유혹에 맞설 수 있을지, 또는 악마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 흔들림 없이 살고 있다면, 때마다 자주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신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

일상에서의 유혹들은 사회 심리적 경향에 편승하여 전해진다. 이는 독단, 과도한 사리사욕, 자기중심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의지의 포기, 절망의 상태를 띤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영적 투쟁을 거쳐 부정적 감정(시기, 미움, 분노 등)에서 벗어나 승화시키지 못할 때,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확장되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악’의 개념에 귀착된다.

아직도 아버지의 나라가 진전이 없는 이유는 악의 세력이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완전히 분쇄될 때까지 사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총체적 악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루카 18,27 참조)

희망차게 시작된 기도가 암울한 어조로 끝나는 분위기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성을 띠며 하나하나의 간구가 각별한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주 이 기도를 마음 깊이 숙고해야 하며, 그 기도의 정신이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와 같은 정신으로 가득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바쳐야 할 기도의 척도이기에 그렇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한마디에 우리의 모든 청원이 포함된다. 악에서 벗어나 구원된다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그릇되게 바쳐왔던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타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주저하면서 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의 죄 사함과 평안을 청했는지 말이다.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상습적인 거짓말과도 같다. 주님과 조건부 계약을 맺는 청원기도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 ‘제가 용서했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다. 다른 이의 죄와 잘못에 대한 관용은 곧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길이다.(시편 51,19 참조) 그리고 상대적 인격을 넘어 세상(공동체)의 상처와 아픔까지도 통찰하게 된다.

비로소 “악에서 구하소서”하는 마지막 청원은 주님의 기도를 요약하며 하느님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탄원을 완성시킨다. 하느님 나라는 다양한 현실과 구체적 상황에서 파생되는 악한 경향들을 부단히 식별하고 치유해 나갈 때 그 상징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부활의 영성은 끊임없는 관용과 영적쇄신의 지평을 넓히려는 내적 자유에서 꽃핀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3월 19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9)

 

 

주님의 기도에는 상반된 구조적 방향이 전개되고 있다. 아버지,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위(하늘)를 향하고, 다른 쪽은 빵, 용서, 유혹, 악은 땅을 향해 있다.

 

신앙의 눈은 둘이다. 먼저 하느님을 우러르고 그분의 빛을 응시하며, 또 하나는 땅을 향해 어둠의 비극을 분별한다. 내적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는 동시에 땅 위에 있는 외적 인간의 무게를 경험한다.

 

모든 현실은 하느님 앞에 놓여 있다. 하늘을 향한 무한한 갈망과 일용할 양식 모두가 하느님께 올려진다. 신앙인 또한 주님의 기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전달된 비의(秘義)를 만난다. 세상의 모든 비극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이 기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기도하는 제자에게는 하느님의 침묵, 그분의 멀리 계심, 그리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고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고백이 전제된다.

 

아버지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을 기대하는 확고한 희망이다. 이럴 때라야 하느님의 ‘평화’(shalom)가 그 안에 동터온다. 이는 거대한 사랑의 행위다. 단순히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기에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로마 8,15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더불어 나누는 종말론적 친교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하느님의 관심은 인간의 관심사와 유리되지 않고, 인간의 관심사가 낯설지도 않다. 하늘을 향한 간구의 힘은 되돌아와 땅 위의 관심사에 영향력을 발휘한다(이사 55,11 참조). 심오한 통일성에 싸여 있는 하나의 운동과도 같다. 이러한 상호 개입은 실로 놀라운 투명성이다.

 

하늘의 고난이 땅의 고난과 연결된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세상적인 욕구를 위해 결코 배신당하실 수 없으며, 현실에서 그분의 엄위하심이 인간 실존에 한계성을 부여한다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기도, 탄원 그리고 찬양은 총체적인 해방의 기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이며,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의 핵심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과 관계가 고난의 한복판에서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온갖 악의 경향들은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이 기도에 담겨 있는 현실은 아름다운 정경이 아니라 처절한 투쟁의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세상의 혼돈과 피조물의 신음까지도 껴안은 주님의 기도는 기쁨에 찬 신뢰와 정일(靜逸)한 참여의 분위기를 간직한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하나로 통전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방은 우리를 행동에 참여케 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모든 활동의 ‘원동자’(the prime mover)이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밝히 드러내지 못하는 그 어떤 해방의 과정도 목적을 달성하거나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실로 예수님 메시지의 정수인 주님의 기도가 교리적 진술의 형식으로가 아니라 심오한 기도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음에 감탄한다.

 

주님의 기도는 참된 믿음의 목적과 실존(삶)의 가치가 축약된 교회의 기도, 하느님 백성의 기도다. 이렇듯 21세기 오늘의 제자도 주님의 기도를 관상하고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3월 26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밀알 하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 (10)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느끼는 삶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내면의 평화가 촉진되고 인격적 성숙이 뒤따른다. 

 

일상의 무덤을 넘어 믿음과 희망 가운데 복음적 생활로 진보하는 전인적 태도를 지닌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치유와 구원을 고대하는 마음이 생동할 때 삶의 주변까지도 관상하며 기도하게 되고, 이에 맞갖은 태도를 지닌 그분의 제자로서 행동하는 삶으로 변화된다. 곧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마음을 읽었듯이, 기도할 때마다 그 의미들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내면에서 샘솟는 영적 시원함과 용기를 마시게 된다. 비로소 일상을 관상하는 영적 생활에 들어선다. 

 

옛 교리문답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났느니라”하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은 하느님을 알아 섬기고 사랑하며 자기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과 참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의 마음(성령)으로 힘을 얻고 성령에 이끌려 ‘완전한 사랑’에로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 살아가는 것이다.(마태 5,48 참조)

 

등산을 생각해 보자. 정상에 오르자면 등성이를 탈 수도, 골짜기를 건널 수도, 능선을 돌아갈 수도 있다. ‘하느님과의 일치’ 곧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다양하다. 신앙을 기초로 하는 삶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므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활동과 봉사의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쇄신으로 성숙해 간다.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된다. 

 

신앙생활을 성소(聖召)로 이해할 때 신앙의 성사들은 하느님의 선물로 자리하게 되는데, 이때에 참된 신앙은 세상과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가?’ 보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라는 내적인 태도, 즉 하느님의 사랑을 닮으려는 내적 지향과 맞물린다. 

 

올바른 신앙의 정서를 바탕으로 그 깊이를 맛들이기 시작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할까? 어떤 활동으로 그분께 나아갈까?’에 주목하게 된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피조물들의 창조자이신 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사랑 자체이시기에 당신 손수 만드시고 돌보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도 사랑이신 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끊임없이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제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의지로 자신의 희생을 이웃과 나누게 하신다. 때문에 제자는 부르신 분을 만나는 체험에 머문다.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이로운 세상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뜻과 육화하신 말씀에 일치하여 기도하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는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 행동양식을 끊임없이 체득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로 시작된 하느님 체험의 여정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이다. 여기에서 피조물들의 치유와 회복은 부활을 향한다. 바로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기도의 정신에 부활의 영성이 담긴 배경이다. 예수님의 온 마음과 혼이 담겨 있는 절박한 이 기도를 우리의 전인적 완성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요한 3,16 참조)이라 고백할 수 있다. 

 

독자들께서도 “아빠! 아버지!”(갈라 4,6) 하시는 ‘주님의 기도’와 함께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과 지혜를 누리시길 빌며, 열 차례에 걸친 지면 연재를 갈무리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7년 4월 9일, 이상선 신부(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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