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인간: 하느님의 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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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4

인간 - 하느님의 모상

 

 

1. 머리말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인간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진리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26-27 참조)는 가르침일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불변의 진리는 인간 존재가 지니는 첫번째 특징이며, 이 특징으로써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즉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지성을 소유하며, 영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을 자신 안에 수용 할 수 있으며, 우주까지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인간은 우주의 질서에 순응 하면서, 그리고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계획에 보조를 맞추면서 이 세상을 더욱 새롭게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며, 단지 '하느님의 모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 보이시는 분으로서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드러나며, 이 사랑은 三位라는 위격 안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곧 하느님은 위격(Persona)이시며 동시에 관계(Relatio) 안에서 알아 들을 수 있는 분이시다. 인간 역시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인격(Persona)을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관계(Relatio) 안에서 이해가 가능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가지는 Persona와 Relatio는 하느님이 소유하는 위격(Persona)과 관계(Relatio)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과 동일시 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실재는 절대적 실재가 아니다. 인간 자신을 現存 자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단지 그 현존을 부여 받고, 또 소유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현존으로서의 그 무엇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기원에서부터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선물로서의 현존일 것이다. 즉 인간의 시초부터 끊임없이 그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현존이며, 자신의 존재 전체로 표현되는 인격체로서의 인간 역시 그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하느님과의 기본적인 관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인간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과 갖는 이러한 관계는 이미 깨어져 버렸다고들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이 지니는 본질적 특성인 하느님의 모상도 인간에게서 사라져 버렸는가?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인간의 거울은 깨어져 버리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느님과 함께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관계를 스스로 무효화 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아마도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 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이미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다시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비록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지만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개입으로 결국 인간은 파멸되지 않았고, 비록 인간 본래의 모습은 퇴색 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본질은 인간 안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져 버렸다 하더라도 그의 본성은 결코 상실되지 않았고, 단지 하느님과의 친교만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며, 결국 인간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절대자에 대한 요청과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생동감을 가진 인간 존재로서의 필요성 사이에서 방황한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절대성을 선택한다면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 이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들을 자신에게 부여한 절대자라는 주체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게 되며, 그 반대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활력을 갖는 인간 존재로서의 필요성 만을 생각한다면 인간 존재는 단순히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한 구조로서 이해되는 인간 스스로의 여러 문제점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현실의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과의 기본적인 관계 하에서 자신을 상실했었고, 또 되찾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그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늘 인간 안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은 반드시 정화되어야 하고, 자신 안에서 또한 인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적 본성 안에서 끊임없이 쇄신 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불리움을 받지 않았는가? 

 

인간이 지니는 하느님과의 이러한 관계가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이러한 본질적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 실현 되었다. 곧 이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를 통한 하느님의 役事로서 이해되며, 모든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신비는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본래적 모습이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 가능하여졌다고는 하지만 오늘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의 본래적 모습은 다시 위협 받고 있으며, 현대의 인간은 특별히 그의 사회적 영역에 있어서 그가 본래 지니고 있는 신적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의 사회의 모습에서 부정 할 수 없는 것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본 모습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하느님과의 본래적인 관계는 오늘의 사회 안에서 단절 현상을 나타낸다. 가정이나 국가의 내적 모습들은 이제 단순히 법이나 어떤 계약에 의한 구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의 기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은 사회의 다른 기관들이 그러하듯이 가정의 각 구성원의 개별적인 원의만을 표출되는 불안정한 만남 그 이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법은 단순히 사회적 기능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전락해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하기를 "인간은 유일무이하며, 반복되어 질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사실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생명의 숨을 받았고, 그분의 모상에 따라 그분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며 (창세 1,27; 2,20), 하느님과의 유사함을 통하여 영원에로 불리운 존재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능하게한 존재가 아닌가? 인간의 하느님과의 이러한 초월적 관계는 분명 인간이 갖는 인간 존엄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보증이며 동시에 건설적인 범위가 된다. 왜냐하면 이 초월적 관계가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이 갖는 모든 기본적인 권리들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망 안에서 인간 본 모습이 지니는 인간 존엄성의 확립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과의 초월적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관계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자기 완성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 모습, 즉 하느님과의 초월적인 관계 안에서 존엄성을 지닌 인간에 관한 개념 정립을 시도할 것이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겠지만 성서에서부터 초대교회의 교부들, 그리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가르침들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2. 개념 

 

사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용어학적인 연구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인간을 향한 하느님 자신의 점진적인 계시로써 밝혀진 인간이 지니는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아주 활발하게 진행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사실 어떤 철학적인 원리를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규정하기 보다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계시의 내용을 잘 이해하는데 중점을 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하느님의 점진적인 계시에 촛점을 맞추어 이 주제가 지니는 하나의 신학적인 전망을 제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1. 성서적 이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주제는 신학적 인간학의 기초이며 중심이 된다. 이 주제의 기초가 되는 성서의 본문인 창세기 1,26의 해석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의 의견이 여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전문적인 성서 해석학적 입장을 떠나 이 주제에 관한 학자들간의 일치된 견해와 일반적인 의견들을 짧게 다루려고 한다. 

 

2.1.1. 구약성서 

 

구약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주제를 찾아 볼 수 있는 성서 본문들은 시편 8,1: 창세기 1,26-27; 5,1; 9,6; 집회서 17,1: 그리고 지혜서 2,23으로서 대부분의 이 본문들은 인간의 창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창세기 1장 26-27절의 본문은 여러 본문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성서 본문이다: "하느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와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 

 

제관계 문헌의 표현으로 보여지는 이 성서 본문은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 주고 있으며, 여기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소명, 이스라엘, 그리고 약속된 땅에 이르기까지의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나며, 이러한 역사-구원론적 본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주 창조의 原形이 되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본문을 통하여 유의해야 할 것은 폰 라트(Gerhard von Rad)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 자유에 의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을 당신 자신의 대화와 사귐의 상대자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현존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부름받은 그대로 인간은 그의 존재 전체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성서 본문에서 사용된 용어들은 Tselem(Imago)과 Demut(Similitudo)이다. 

 

모상(Imago)을 뜻하는 Tsemel은 주로 질료적인 의미로서 모조품, 조각품, 나아가서는 초상의 의미들을 지니는 단어이며, 따라서 모상이 된다는 의미는 인간의 내적인 면까지를 포함하는 인간 실재 전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신체적 외관의 유사성까지도 거의 함께 가지고 있다고도 알아 들을 수 있다. 즉 인간은 그의 전체성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존재, 즉 하느님의 分身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 보다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서 창조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원형으로 삼으셔서 당신의 살아있는 복제품인 인간을 만들어 내신 것이다. 

 

닮음, 혹은 유사성(Similitudo)을 뜻하는 Demut는 모상(Imago)과 동의어이거나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는 아니다. 이 용어는 어느정도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로서 주로 추상적인 '외관', '유사성', '상응성'을 의미하며, 이 용어로써 모상(Imago)의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엄밀히 규정하고 있다. 이 용어로써 좀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모상으로하여 창조된 인간이 창조의 원형이신 하느님과 닮았다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서 창조된 인간,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이 본문이 의미하는 본래의 깊은 뜻은 무엇인가? 이를 단순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영적인 능력, 감각, 지성, 자유의지 등을 부여 하셨다는 의미로 알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위 본문은 사실 인간 자신의 본질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통치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세상을 다스리고, 혹은 적어도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근거가 되는 이유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능력들, 즉 이해하고, 볼 수 있고, 또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써 자신에게 위임된 이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지고하심에 참여하는 존재이며,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善性과 아름다우심, 그리고 지고하심을 드러내는 존재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 창조의 본문 안에서 인간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정의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을 아버지로하는 父子와도 같은 관계를 지니는 존재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본성을 위임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사람과 친교를 맺고,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소명은 사실 인간의 범죄 이전에는 하느님의 계획에 순조롭게 일치 되었으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부정 할 수 없는 것은 사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과 함께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본 모습은 구원-종말론적 범위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창조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구원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하느님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 안에서 요약하여 말하자면 구약성서는 메시아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인간학적 의미에서의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자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모상으로서의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과 닮은 인간으로서의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 한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1.2. 신약성서 

 

신약성서 안에서는 특별히 사도 바울로에게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주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바울로의 서간들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2고린 4,4; 골로 1,1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모상(골로 3,1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상(로마 8,29; 1고린 15,49; 2고린 3,18)이 된다는 본문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도 바울로의 사상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 된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이와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의 풍요로움에 더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항상 그러한 관점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 관한 성서의 다양한 내용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인간의 얼굴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신 그리스도 안에 성부의 모습을 드러내는 계시가 자리하고, 성부의 당신 창조물에 대한 의지의 완전한 의미와 당신 모상에 대한 신비-구원론적인 면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 즉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실현 시키는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 바울로의 사상은 단순히 구약성서의 개념을 반복하지 않는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神的 父子 관계로서의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위치에 놓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그외에도 구원신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골로사이서 1장과 필립비서 2장의 찬미가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본질의 개념으로서 보다는 힘과 활동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강하게 연계 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닮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닮았다는 것이 더욱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은 하느님의 모습과 같아질 수 있게 되었고(로마 8,29), 하느님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들려 높여지게 된 것이다(2고린 3,18). 또한 인간은 세례를 통한 구원으로 말미암아 처음의 인간의 지위 보다 더 향상된 지위를 갖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1고린 15,45-59 참조), 결국 그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로마 8,14). 

 

처음의 창조에서 창조의 주역이신 하느님의 모상은 아담이었고, 두번째 창조, 곧 구원의 역사 안에서 구원의 주역으로 높이움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내는 우주 안에서 여러 형제들의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우주-구원론적 임무를 수행하셨다는 점이다. 그분께서는 죽음에서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맏아들이 되셨고, 또한 주님이 되심으로써 하느님의 우주 통치에 참여하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인간 아담은 하나의 자연적인 생명에 의해 주어진 육체적 존재였지만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 영적 존재이시다. 한 가정의 가장이 자손에게 조상들의 공과 덕을 전달해 주듯이, 아담의 자손들 역시 그들 조상의 모습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자손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해 주며, 그러므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와 닮을 수 있게 한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장차는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9). 

 

2.2. 교부들의 사상 

 

하느님 모상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교부들의 신학은 특별히 원형과 모방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특성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를 나누어 받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기초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며, 인간 존재의 원인은 하느님인 것이다. 교부들의 가르침 안에서 이러한 인간 존재에 관한 정의를 찾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부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에 관한 질문으로 대두되는 것은 모상의 의미가 원형 자체를 의미하는 것인지(삼위일체의 하느님 혹은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원형) 혹은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인지(영혼만 하느님을 닮았는가 아니면 영혼, 육신 모두 하느님을 닮았는가에 관한 문제)에 관한 것이다. 또한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모상(Imago)과 닮음(Similitudo) 사이의 구별이 시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1. 비가시적인 로고스 

 

하느님의 모상이란 비가시적인 로고스로서 인간의 원형이 된다는 사상이 4세기까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곧 비가시적인 로고스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肉化(Incarnatio)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지닌 본래적인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원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이성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정의된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모상인 로고스에 의해 존재를 부여 받은 하나의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역시 인간은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의 기원 안에서 신적 본성을 존재론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정의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육체는 단순히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는 단순히 하느님의 모상을 감싸 주는 의복에 불과하며, 이 육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영혼이 투사해 주는 단순한 映像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볼 때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보여준 모범과 인간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의 예수의 결정적인 개입은 아주 큰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2.2. 신적 본성으로서의 삼위일체 

 

성 아오스딩 역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특별히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사색의 방법은 인간의 철학적 본성의 투시를 통한 연구라고 말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원형은 하느님 본성의 일치 안에서 드러나는 신적 삼위일체이다. 즉 하느님의 모상은 인간 본성의 일치를 통해서, 그리고 정신, 의지, 사랑 (혹은 기억, 지성, 의지)이라는 인간 영혼의 삼위일체적 능력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 신적 삼위일체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을 적용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한 비유를 인간 안에 개별적으로 적용한다. 이러한 아오스딩의 해석은 중세기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다. 

 

2.2.3. 사람이 되신 로고스 

 

하느님 모상의 원형은 사람이 되신 로고스이다. 하느님께서는 훗날 육체를 취하고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그리스도를 예견 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떼르뚤리아노와 쁘루덴시오, 그리고 특별히 이레네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레네오에게 있어서는,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다시 가득히 담은 육체가 그 원형이다. 즉 그 원형은 성자와 성령이라는 하느님의 두 팔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이 두 개의 팔에 의하여 인간은 만들어진다. 따라서 모상이란 무엇보다도 靈이 함께 하는 육체이며, 이 육체는 천사들은 소유하고 있지 않고 인간 만이 소유하는 육체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이미 처음부터 로고스의 육화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고스는 영광스럽게 된 자신의 人性을 통해서 창세기 1,26을 완전히 실현하는 존재이며, 전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창세기 1,26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은 아담에서부터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영적인 존재에서 부터 완전한 인간에로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단계적인 발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며, 따라서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2.3. 토마스 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대부분의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상에 있어서 영혼의 탁월한 우위성을 인정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인 기능에 해당되는 것이며, 또한 이는 하느님의 본성에의 고유한 영역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지보다는 하나의 확실한 본성에 더 큰 인식의 비중을 두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 모상의 궁극적 기초를 인식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상은 일차적으로 인식 능력에 자리 잡는다. 인식 능력이란 천부적인 것으로서 의지가 기억과 지식으로부터 원인을 이끌어 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모상은 모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의 부분에서 찾을 수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 다음으로는 감성적인 영역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인식의 부분은 인간됨의 특징이 되며, 감성의 영역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의 質을 구별 할 수 있게 하는 특징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얼만큼 닮았는지, 그리고 다른 여타의 피조물과 얼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한다. 그는 인간보다 하위의 피조물에 대해서는 닮음의 정도가 하위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며, 또한 이러한 존재들에 대해서는 모상(Imago)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흔적(Vestigi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천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복합적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인간 스스로가 갖는 인간적 본성 보다는 하느님의 본성과 더 닮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더우기 그는 인간이 갖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은 천사들이 갖는 하느님과의 유사성 보다도 더 크다고 말한다. 이렇듯이 복합적인 면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자신에게 맡겨진 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복합적인 동시에 조화를 이루면서 창조된 자신의 모습 안에서 피조물을 재조명하여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강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사실 하나의 小宇宙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전체 우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들 역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시대부터 논쟁이 되어온 문제, 즉 죄가 하느님의 모상을 상실케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논쟁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모상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는 인간 안에는 3가지의 다른 형태로서의 하느님의 모상이 함께 자리 한다고 설명한다. 즉 하느님의 모상은 창조(Imago creationis), 삼위일체(Imago similitudinis), 그리고 은총(Imago recreationis)과의 관계 안에서 고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상의 첫번째 유형(Imago creationis)은 신적 지혜를 표현하는 기능으로서의 이성 안에 아주 탁월하게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나무나 대리석등으로 만든 하나의 조각과도 같은 형태의 모상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모상의 둘째 유형(Imago similitudinis)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본질(지성과 의지)을 표현해 주는 영혼의 기능들을 구별하는 기능으로서 인간 안에 자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연관을 갖고 협력하는 것과 비교하여 이 유형의 모상을 설명한다. 즉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각기 독특한 기능을 가지면서 서로 협력하여 하느님의 모상을 표현 한다는 것이다. 모상의 셋째 유형(Imago recreationis)은 주어진 습관이나 혹은 초자연적인 덕 안에서 계속 드러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유형의 모상은 여러가지 색깔이나 장식으로 꾸며진 육체적 모상으로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상의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죄로써 상실되는 것은 단지 셋째 유형의 모상(Imago recreationis)일 뿐이며, 나머지 두가지 유형의 모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결론 짓는다. 왜냐하면 이 모상들은 인간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특성들보다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에 관한 사상과 함께 본질적인 영역을 연구하게 되는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인간학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에 관한 연구가 하느님과 같은 관계 안에서 인간을 이해 하려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간 자체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독립된 인간으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의 이해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하나의 기본적 교의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 기본 개념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본성, 기원, 그리고 궁극적 운명과도 같은 인간에 관한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3.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상 

 

3.1.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인간의 존엄성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주제는 교부시대, 중세 전통 신학에서 뿐 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주제는 특별히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의 모상에 관한 성서 - 교부학적 기본 개념 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 의 구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창세기 1,26: 지혜 2,23 참조)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집회 17,3-10 참조). '인간이 무엇이기에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기에 돌보아 주시나이까? 천사들보다 약간 못하게 사람을 만드시고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만드신 것들 위에 사람을 세우시고 모든 것을 그 발 밑에 굴복 시키셨나이다'(시편 8,5-7)". 

 

이 주제에 관한 최근의 성서학의 연구는 아주 활발하다. 피조물들 중에 가장 마지막 날에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걸작품이며, 절정이며 동시에 완성이다. 창세기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타의 피조물들을 창조하는데 있어서는 단순히 한 마디의 단어 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의 모습대로 만들자"(창세 1,26)라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분명히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창조한 창조주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인간에게만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셨고, 이에 인간은 숨을 쉬게 되고 생명을 갖게 되었다(창세 2,7 참조).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근원적으로 인간이 하느님과 가진 가장 첫 번째 접촉이며, 동시에 신비로운 맞닿음에서부터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모상에 따라, 지고한 품위를 지닌 그분의 살아 있는 복사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느님과 아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당신이 지니신 자유를 인간 안에 그대로 보존 하시면서 당신의 내적 역동성을 함께 부여 하셨기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친구로서의 하느님은 인간의 그러한 위상을 존중하시면서 인간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다른 여타의 피조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은 온 땅에 퍼져서 온 땅을 정복하도록(창세 1,28)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사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을 갖는다고 보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그를 만드신 창조주의 책임감 있는 대화의 상대자라는 지위에 이르기까지 높임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에 더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지닌 이러한 고귀한 존엄성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은 결코 침해 당할 수 없다는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오직 한 분만의 창조주가 존재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들은 같은 창조주로부터 창조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형제가 되며, 동시에 같은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인간들은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은 모든 인간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게 창조 되었고, 또한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가능성으로써 온 땅을 다스리도록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면들이 인간이 지니는 존엄성과 그에 따르는 인간의 의무에 대하여 말 할 수 있는 근원이며, 인간 창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의 근본 정신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3.2. "하느님의 모상" 개념의 특성 

 

창세기의 인간 개념인 "하느님의 모상"은 합리적이고 동시에 역동적인 범위를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창세 1,27). 이러한 성서적 인간은 분명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내적 일치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창조된 인간, 또한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서 창조된 친교의 존재인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와 더불어 이해될 수 있는 존재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사실 "깊은 본성에서부터 사회적 존재요, 타인과의 관계 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고 그 자질을 발휘 할 수도 없는 존재"로서 우리는 그와 같은 본성과 함께 인간 역사에서 나타나는 경험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본 모습에 더욱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재의 이와 같은 사회적 특성의 기원을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 즉 그분의 실체론적 질서 안에서 보게 되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인간들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 경험의 여러 지평들을 통하여 인간의 경험적 범위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안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을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을 한 백성으로 모아서 당신을 진실히 알아모시며 충실히 섬기도록 하시었다". 즉 교회헌장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인간을 위한 구원 행위 사이의 일치를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창조 되었고, 인간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 현실 안에서 서로 친교를 이루며, 그 안에서 구원을 향한 여정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관한 공의회의 이러한 사고는 특별히 인간이 탁월한 역동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인간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사회성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별히 사목헌장은 이러한 점에 공감하면서 인류의 완성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결코 실망하지 않는 인류 전체의 숙명적인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즉 사목헌장은 인류가 몸 담고 있는 현대 세계의 몇가지 특징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오늘과 같이 강한 자유의식을 가져 본 일도 일찌기 없었건만 다른 편으로는 사회적 내지 심리적 노예화의 새로운 형태가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종속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의식은 생생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힘의 대립으로 극도의 분열을 자아내고 있다"고 인류의 현주소를 걱정한다. 이러한 걱정은 그 다음 5항에서도 계속된다: "역사의 흐름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므로 이미 여러가지 역사권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혹은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된다". 

 

공의회가 위와 같은 언급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의 현상을 나열하고 고발하자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다분히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의회는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인류가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긴박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본래의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 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또한 그리스도적 성소의 완성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놓여져 있는 현대의 심각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과 함께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신적 생명에 참여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시켜 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3.3. 생명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하나의 선물이다. 성서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생명은 특수한 방법을 통해서, 개별 인간 존재 안에 주어진 하나의 신적 선물이다. 어머니와 자녀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생명이라는 선물이 자리하며, 이 선물로서의 생명은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해 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인간 생명의 보존을 위한 기본적인 권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인간 생명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사랑 하시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역시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거룩함과 정의"를 항상 우위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인간의 통치는 항상 그러한 의무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축복인 것이다. 인간에게 합법적으로 맡겨져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행위는 분명 自然生態學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인간의 주위 환경을 늘 고려하는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만 할 것이며,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살아 있는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미래의 세대에 주어질 인간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위한 권리 가운데에는 미래를 지향하는 권리 뿐 만 아니라, 미래의 권리, 나아가 우리 인간 사회 안에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살아가게 될 사람들의 권리를 남겨 두어야 한다. 지배한다는 것은 결코 파괴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조화를 위협하는 자연생태학의 위기가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동시에 그 결과로 나타날 첫번째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매우 슬픈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위험은 인간에게 뿐만이 아니고 또한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하나의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과 그밖의 피조물을 위협하는 오늘날의 위험한 상황 아래에서 생명을 지어내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 본연의 사명 중에는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을 보호하고 존경해야 할 인간 측의 분명한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땅을 지배하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께서 주신 자연을 찬미하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중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인간 안에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지닌 풍요로움의 총체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세상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인간 안에서 얼굴과 소리를 취하고 있다: "육체와 영혼으로 單一體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 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 할 것이므로 참으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법을 존중하면서, 그리고 하느님의 아름다우심과 지혜를 찬미하면서, 존경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다시 교육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여타의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참된 가치는 영영 그에게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또한 인간 자신의 참된 선을 위하여 하느님의 선물인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현대의 인간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현대의 인간이 처해 있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이미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는 과학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서도 무서운 죽음의 평화 외에는 다른 평화를 맛볼 수 없는 불행한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공의회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불행은 현대 문화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며, 또 그로 인해 현대 문명의 적극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연대성의 확장과 원조와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려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인간이 자각하고 실천 할 때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동참하는 길이 마련되며, 이 길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신적 사랑으로 비추어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3.4. 자유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모습의 본질적인 한 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서 자유를 내포한다. 이에 대해 찾아 볼 수 있는 공의회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오직 자유로써만 선을 지향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하고 열심히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자유를 잘못 옹호한다. 자신이 즐겁게만 하는 일이라면 악이라도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말해 주는 표지인 것이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사에 맡겨 두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自願으로 창조주를 찾아 창조주를 따르며 자유로이 완전하고 행복한 완성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 자유 선택에 의하여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 개개인이 하느님과의 대화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한 영성의 증거가 되며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사실 이 세상 안에서의 모든 사물은 초월적인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인간에게 종속되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반복되어 질 수 없는 固有性을 지닌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사회의 구조로써나 우주의 법칙으로써나 내면이 변화되어 질 수 없는 獨自性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목적이 되며, 이는 모든 인간 개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통해서, 또 자신의 고유한 실존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인간학적 사회성의 탁월한 가치를 실현시킴으로써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 목적을 위하여 각 개인은 출생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복합적인 관계 안에서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실현 시켜 나갈 의무를 갖는다. 이렇듯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고유하면서도 반복되어 질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지니는 자유의 근본 원인이며, 또한 인간적 행위의 초월적인 척도가 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의 힘을 발견하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인간 자신의 의지와 지혜의 자유로운 실천을 통한 응답을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그러한 모습은 성서적 계시의 역사-예언적 맥락 안에서, 그리고 초월에로 개방되어 있는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자연 안에서는 창조의 행위이지만 반면에 인간의 양심 안에서는 법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협력자로서의 인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획득하게 되며, 그러한 품위를 통하여 인간은 피조물들을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도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규범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달리 인간의 양심은 선을 원하지만 자유의지는 반대로 작용하여 악을 행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은 창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지 가치의 등급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양심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윤리 규범, 초월적인 법과 관련되어 사회와 문화, 사회적 구조및 제도들과의 관계들을 인간 내부에 재조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양심은 자유의지와는 별개의 것으로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명령을 위반하거나 존중하는 선과 악의 구별을 객관화하는 기능을 갖는데 이러한 양심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의 귀에 들려 준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준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완전한 절대성에 온전히 참여하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실재를 직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을 결정적으로 밝게 비추어 주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적극적인 동참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참된 자유에 인간 각자가 견고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도록 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의 실천은 양심과는 또 다른 영역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의 의무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살펴 보는데 있어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451년 칼체도니아 공의회에서도 이미 그리스도를 가리켜 神性에서도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人性에 있어서도 완전한 인간이신 분으로 정의 내린 바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하고도 반복될 수 없는 인간 실재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완성이시며,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의 완성이시다. 우리들이 가지는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 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분명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 안에서 종합하는 하나의 실재가 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가 성부의 결정적이고 완전한 계시가 되시면서, 전체 우주와 인간의 변화, 그리고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고귀한 품위를 지니시는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 모두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새롭게 지니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실재와 함께, 특별히 공의회 이후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살펴 볼 것이다. 

 

4.1.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인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참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 할 필수적인 길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와의 일치(1고린 1,9)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처음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1고린 15,47-49 참조)를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이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의 옷을 갈아 입는 것이다(1고린 15,49 참조).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새로운 사상은 그전까지의 그의 모든 사상을 수렴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인간이 구원의 여정을 가는데 있어서의 최후 목적을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이 여정은 그리스도의 모상에 따라 자신을 변화 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인 것이다. 곧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다"(로마 8,29)고 말하면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라는 모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나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것 처럼 "인간 모두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 보는 가운데 주님과 같은 모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고"(2고린 3,18)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점진적인 유사성으로써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모상을 얼만큼이나 완전하게 자기 자신 안에서 다시 실현시키는가 하는 인간 실현의 본질적인 사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삶은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제시해 주시는 하느님(1요한 3,2 참조)과의 견고한 일치에로 인간을 인도하면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 모습을 실현 시켜 줄 것이다. 

 

4.2. 참 인간, 그리스도 

 

인간은 내적 혼돈 안에서 늘 번민하며 매 순간의 내적 투쟁 안에서 고유한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일치되기를 무의식적으로 추구하지만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의 자기 자신과의 유리를 끊임없이 체험하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 나가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하는 면에서도 인간은 늘 그 이상에 못 미치며, 불완전하고, 한계를 안고 있으며, 때로는 타락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모습 때문에 완전하고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교황 바오로 6세의 머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관한 교의론적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몇가지 표현들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이나 대화들 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바오로 6세는 먼저 "인간은 이 지상에서의 삶을 거쳐서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만남의 빛을 향하여 순례하는 순례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오로 6세는 인간을 표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인간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어두움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삶을 종합하고 있으며, 그러한 여정에 놓여 있는 인간의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강한 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오로 6세는 또 말한다: "오늘 밤의 이 거룩한 예절은 하나의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읍니다. 곧 어두움 안을 걷고 어두움 안에서 무언가 찾아 헤매는 인간이라는 상징입니다... 그 인간은 하나의 빛을 찾고 있읍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있읍니다; 그의 길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어떤 인간과의 만남을 찾고 있읍니다. 그가 꼭 찾아야만 하는 어떤 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6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사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인간 삶의 중심이 되시며, 우리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시며, 우리 인간들의 둘도 없는 스승이시며, 친구이고, 또한 형제"가 되신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우리에게 다시 탄생하시는 새로운 인간이 바로 구세주의 빛, 하느님 현존의 힘, 사랑의 강한 불꽃,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교회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빛이 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분명 인간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을 동시에 우리들 인간의 마음 안에 심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능력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효과를 갖는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한 분이시며, 모든 개별 영혼을 위한 분으로서 모든 인간, 종족, 국가, 그리고 사회가 추구해 나가야 할 분이시다.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지닌 인간의 참된 품위가 곧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품위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 때로는 왜소하고 연약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참된 품위를 다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감으로써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3. 모든 인간을 당신과 일치시키신 그리스도 

 

여기서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아주 명백하고도 보편적인 진리 하나를 말 할 수 있겠다. 즉 이미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나의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육화된 말씀과 명백하게 일치되어 있어 서로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서부터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토록 불리움을 받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의지에는 전혀 종속되지 않으면서 인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분이시지만 인간 측에서는 그러한 관련 안에서 인간 자신의 소명, 운명, 그리고 품위를 찾아 낼 수 있도록 자신의 창조주께, 그리고 인간의 모델이며 영광스런 구원자이신 육화된 말씀을 향하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아야만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육화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의 시초부터 주시고자 의도하셨던 그 비중을 인간의 생명에 부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을 위해 본받아야 할 완전한 인간으로서, 또한 인간이 인간됨을 위하여 따라야 할 스승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제시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위성을 갖는 말씀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4.3.1. 인간의 초월성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은 육화된 말씀이다. 이는 어떤 기본 원리로서가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말씀인 것이다. 말씀 없이 모상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모상 없이 말씀은 완전하지 않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인격이다. 인간은 그의 정성과 의지, 그의 양심과 마음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도 전혀 반복되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생명의 역사가 있고, 가장 중요한 자기만의 영혼의 역사가 있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인간은 또한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며, 이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원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받고 예정된 인간은 다름 아닌 '각' 인간, '가장 구체적인' 인간,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다. 바로 인간의 이러한 면이 교회의 관심을 인간에게 집중시키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목헌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어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대한 교회의 근본적 관심을 여러가지로 표명했었다. 이것은 만인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나오듯이 <교회는 절대로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아무런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 동시에 인격의 초월성의 표지요 수호자인 것이다> (사목헌장 76항)". 

 

4.3.2. 인간의 소명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인간이란 단순히 죄로 인해 타락했던 인간의 상태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복구된 것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창조로 인해서 인간은 오히려 그 이전의 상태보다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과 진리가 충만한 상태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육화된 말씀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으며(요한 1,12 참조), 이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에서 "인간은 새 생명의 원천인 이 능력에 의하여 내부에서부터 변혁되고, 그 새 생명은 사라지거나 지나가는 법이 없어 영원히 인간을 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 된 것이다. 인간은 비록 죽음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의 생명 안에는 성령이 주시는 불멸의 생명이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이 생명이야말로 인간 소명의 최종적 실현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된 인간 조건의 이러한 근본적인 변혁에 의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자기가 들어 올려진 그 높은 경지와 자기 인간성의 탁월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발전시켜 나가야 할 탁월한 가치들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충만성 내지는 소명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인간의 소명을 "진리를 좇는 탐구, 선을 향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증, 자유에 대한 주림,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 양심의 소리등"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소명을 위해 가야 할 길을 바로 교회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주제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몇가지 고유한 특성들을 살펴 보기 위해서 이 주제와 관련된 성서, 교부들, 그리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의 사상들을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이 주제에 관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무엇보다도 인간 모습의 불변하는 특징들에 대해서 강조한 반면, 성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은 발전되고 변화되기 위하여 불리움을 받았다는 인간의 소명을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면서, 인간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강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서는 인간의 눈에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이 주제를 설명하고 있으며(창세 1,26-27), 여기에서 인간 안에서 찬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이데아는 같은 창세기 안에서 인간이 지니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엄성에 대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 역시 이 주제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은 명백하게 그리스도(골로 1,15; 히브 1,23 참조) 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유일하고도 참된 모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일치 시키면서 그분의 완전성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로마 8,29; 2고린 3,18 참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진리 안에서 발견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주제를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 안에서 다루면서 공의회의 본문들에 관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해설한다.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속화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과 그에 대한 위협을 직시하면서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핵심적인 무기로서 인간성의 참된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어온 이 주제는 단순히 인간이 처음의 인간인 아담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새로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새로운 모상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시도했다. 하느님의 새로운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구원된 인간이요, 어떠한 암흑의 상황 하에서라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존재를 변화시켜 나가는 변화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마음 안에서 완전한 인간이신 구원자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며, 계시와 죄의 용서, 그리고 은총으로 다가오는 복음에 인간은 자신을 개방시켜야만 할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육화된 말씀이시며 구세주이시고, 또한 십자가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원형과 모범을 발견 할 수 있으며, 또 발견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은 외적인 그 무엇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 안에서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시며,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참된 모상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이 높이 들리움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용서 받았고, 또한 구원되어 새롭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7호(1992년 6월,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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