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신학] 신학서원65: 신앙의 서사가 있는 삶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13 ㅣ No.734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5) 신앙의 서사가 있는 삶


내 삶과 신앙의 서사가 무엇인지 자주 묻고 찾으며 살아야

 

 

우리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며,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사진은 2020년 개관한 이태석 신부 기념관의 전시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서사적 주체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지만 동시에 이야기를 읽고 듣고 배우고 체험하면서 자란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형성하고 성장한다. 이야기를 통해 주체로 선다는 뜻이다. 살아오면서 듣고 몸에 밴 이야기들, 그 숱한 이야기들이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 삶의 여정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들에 끌렸는지 점검하면, 자기 모습이 얼추 나온다.

 

나의 삶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읽고 듣고 끌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나를 사로잡고 긴 충격을 준 역사적 사건들의 이야기가 있다. 조성만 이야기, 김장하 선생 이야기, 1980년의 광주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등등.

 

숱한 신앙 이야기들이 있다. 성경 이야기, 교회 역사 속의 순교자들 이야기, 신앙적 모범을 보여 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데 왜 나는 신앙의 서사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이야기들에 더 많이 끌릴까. 성경 이야기들 가운데 왜 코헬렛 이야기가,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코린토 서간의 이야기가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목격한 교황들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공부한 숱한 신학자들 가운데서 토마시 할리크의 신학 이야기와 로완 윌리암스의 신학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신앙의 이야기가 내 신앙의 모습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앙의 서사가 곧 자기 신앙 서사이며 자신의 신앙적 삶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생각과 삶의 일치가 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사적 삶

 

우리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다.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의 생각과 관점과 시선과 신념, 그의 말과 글, 그의 행위와 자세와 태도의 여정을 통해 엮어진다.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제임스 R. 해거티)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는 자신의 시선과 타자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모든 삶은 하나의 이야기지만, 이야기가 되는 삶이 있고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삶이 있다. 이야기에 대한 가치 평가 기준은 시대와 사람마다 다르다. 이야기는 언제나 해석과 평가가 따른다. 신앙의 행위 안에도 해석의 행위가 포함된다. 교회 역시 신앙 이야기의 해석 공동체다.(토마시 할리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 꼭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만이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오늘날은 가공되고 화려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소박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진정한 공감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욱 필요한 시대라는 의미다. 신앙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어떤 신앙 이야기가 절실히 요청되는가? 신앙의 좋은 이야기를 식별하고 해석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시선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사제 삶의 서사

 

지난달에 어느 교구 사제 연피정 강의를 했다. 신앙의 서사가 있는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 사제들이 그리는 삶의 서사가 어떠한지 점검하고 성찰해보자고 했다. 사제들의 생각(시선과 신념)과 말과 행위(자세와 태도)에 대해 같이 반성해보는 시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우리 사제들의 이야기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 삶의 서사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구석진 자리에서 묵묵히 신앙적 삶의 서사를 쓰는 훌륭한 사제들이 있지만 말이다.

 

바쁜 사목 생활 탓인지 사제의 삶에서 사유와 성찰의 시간이 줄어든다. 생각하지 않고 규범과 관습 속에서 관행적으로 산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양한 관점과 섬세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사제의 말들은 너무 당위적이고 전형적이다. 살아있는 말, 적합한 말들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전통의 말, 전해진 당위와 규범의 말들을 영혼 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글도 잘 쓰지 않는다. 말과 글은 다르다. 글은 사유에서 나오고, 손으로 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하다. 글을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과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고, 즉 자신의 시선과 관점을 드러내고, 감정을 표현하고, 즉 공감과 연대를 드러내고, 의지와 다짐을 표현하고, 즉 실천과 결부된 자세와 태도를 드러내는 도구다. 사제들의 말과 언어가 창의적이고 살아있는 것인지. 또한 사제들의 행위는 주로 전통적으로 부과된 행위다. 전례의 제관으로서 행위, 사목의 자리에서 통치와 운영의 행위다. 사실,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 속에 들어있는 내적 자세와 태도다. 사제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삶의 자세와 태도가 어떤 모습인지.

 

이 시대 우리 사제들의 삶이 과연 어떤 이야기로 서술될 것인지. 우리 사제의 삶이 정말 서사가 있는 삶인지.

 

 

아름다운 신앙의 서사가 되기 위하여

 

이야기가 우리 자신과 삶을 구성한다. 당연히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저마다 이끌리는 삶의 서사와 신앙의 서사가 다르다.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가?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정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의 이야기, 참된 신앙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든 서사는 결국 죽음이라는 지점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다 만난다. 저마다의 서사는 일종의 강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서사와 우여곡절을 경험하지만, 종국에는 바다에서 만난다. 신앙적 관점에서도 우리의 서사는 하느님이라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 같은 것이다. 다양한 형태를 지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에게로 이른다. 아름다운 섬진강, 유장한 낙동강, 서울이라는 도시를 품은 한강 등 세상의 숱한 강들이 있지만, 모든 강의 근원적이고 보편적 속성은 생명과 흐름의 물이라는 점이다. 물의 결들과 그 물길이 빚어내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말이다.

 

듣고, 배우고, 읽고,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과 지향이 무엇인지, 삶과 신앙의 문맥에서, 자주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 아니면 그저 주어진 것들에 사로잡혀 그냥 살아갈 위험이 많다. 순명과 질서 속에서, 관습과 전통이라는 주어진 것에 충실한 삶을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신앙의 질문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신앙의 서사가 무엇인지. 하느님과 자신이 그려내는 서사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이 그려내는 서사가 무엇인지. 묻고 찾아갈 때,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서사를 써 나갈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8월 13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4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