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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김진규 마르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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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2-14 ㅣ No.107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7) 김진규 마르티노 (상)


김진규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사랑받은 배우가 또 있을까

 

 

영화 ‘벙어리 삼룡’에서 김진규와 최은희. 출처=「내 운명의 별 김진규」

 

 

한 평론가는 김진규(金振奎 1923~1998 마르티노)를 이렇게 평했다.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서 김진규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인기스타가 또 있을까? 그리고 김진규만큼 많은 화제작에 출연한, 작품 운이 좋은 배우가 또 있을까?” 또 어떤 영화 전문가는 “1970년 서울대생들이 선호하는 배우를 조사했을 때 김진규는 1위를 차지했다. 신영균과 신성일을 제치고 가장 나이 많고 활동 시기도 길었던 그가 선두를 차지한 것은 그의 페르소나가 갖는 호소력이 그만큼 크고 지속적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김진규가 출연한 영화는 300편이 훨씬 넘는다. 그중에서 내가 본 영화는 ‘암행어사 박문수’ ‘사명당’ ‘고려장’ ‘다정불심’ ‘팔도강산’ ‘카인의 후예’ ‘성웅 이순신’ 등이다. 주로 중고교 시절에 많이 보았다. 특히 ‘다정불심’은 박종화 원작을 각색해 신상옥이 감독한 작품인데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에서 왕비로 맞이한 노국 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특히 공민왕(김진규)이 죽은 노국 공주(최은희)의 초상화 앞에서 처절할 정도로 슬퍼하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진규와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최은희는 김진규를 이렇게 기억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그는 고독하고 과묵한 사랑방 손님 역을 맡았다. 나는 그때 대청마루에 앉아 쇼팽의 야상곡을 치는 미망인 역을 했다. 정말 가슴이 뛰었고 연기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또한 “‘벙어리 삼룡’에서는 삼룡 역을 맡은 그는 마님인 나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충직한 머슴은 나를 들쳐업고 뛰고 또 뛰었다. 심지어 남편 역을 맡은 박노식 씨에게 매를 맞기까지 했다.” ‘벙어리 삼룡’의 감독이었던 신상옥은 생동감을 살리려고 박노식에게 장작개비로 사정없이 김진규를 후려치라고 주문했다. 최은희는 그때 김진규가 얻어맞으면서 지른 비명과 흘린 눈물은 진짜였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 ‘애상’에서 김진규. 출처=「한국영화100년100경」

 

 

배우 최은희 “사랑방 손님 연기 가슴 뛰었다”

 

김진규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계모와 사이가 나빴다. 새할머니는 어머니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인 전북 전주로 왔다. 김진규는 그곳에서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김진규는 극장 구경을 좋아했다. 전주 극장에 공연이 있으면 책가방을 집에 던져놓고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입장하는 손님에게 넙죽 절을 하고는 손 좀 붙들고 들어가 달라고 애원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손님의 손을 붙들고 들어가는데 표 받는 사람이 꼬마(김진규)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손을 떼어놓고 꼬마를 극장 직원에게 데려갔다. 직원은 꼬마를 지하실로 끌고 가 호되게 혼내주려고 했다. 그때 꼬마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손님이 나서며 “아이가 얼마나 구경하고 싶었으면 그렇겠느냐?”고 하면서 극장 값을 내주고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날 그렇게 구경한 영화가 바로 나운규가 주인공인 ‘아리랑’이었다. 김진규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대전중학교에 들어갔다.

 

영화 ‘피아골’ 촬영 현장에서 김진규. 출처=「한국영화100년100경」

 

 

집안이 어렵게 되자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는 일본인 양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외롭게 지냈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연극 무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다. 끔찍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릴 정도’라고 했다.

 

귀국 후에도 연극 무대에 섰다. 조선악극단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뮤지컬 ‘카투사’를 공연했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일본에서 제국음악학교를 나온 삼촌이 음악을 맡았다. 삼촌은 조카 김진규를 단역으로 출연시켰다. 그리고 후에 김진규의 부인이 된 이민자도 발탁했다. 후에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린 이민자가 먼저 주연급 배우가 되었다. 김진규는 이민자와 결혼했다. 그 후 삼촌은 무용과 세미클래식을 공연하는 ‘장미 악단’을 만들었다. 그 악단이 단성사에서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농촌 계몽극을 올렸다. 연일 매진이었다.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까지 관람했다. 그러다가 6ㆍ25전쟁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궁핍해졌다. 대중들에게 연극은 사치였다. 자연히 연극인의 삶도 비참해졌다. 김진규는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부인에게 술주정과 손찌검을 했다. 부인은 가난과 폭력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귀국 후 연극 큰 성공…전쟁으로 궁핍해진 삶

 

김진규는 영화 ‘피아골’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피아골’은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였다. 지리산 공산 게릴라인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는 개봉하기 전에 난관에 부딪혔다. 정부 검열자는 주인공 빨치산 김진규가 잔혹한 이미지가 아니라 휴머니스트로 나온 것을 문제 삼았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그 시절에 빨치산은 무조건 악인으로 나와야 하는데 영웅으로 나온 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성 결여’로 결국 상영이 무산되었다. 이에 영화사는 다시 펄럭이는 태극기를 극명하게 부각하고 지적받은 대사 일부를 잘라낸 후에 간신히 상영 허가를 받았다.

 

또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촬영을 끝낸 연기자들이 그 누더기 군복에 따발총을 맨 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을 모조리 수사기관으로 끌고 갔다. 연기자들은 졸지에 빨치산 잔당으로 몰리며 취조받았다. 그들은 영화 시나리오를 꺼내 보여주고 따발총이 군에서 빌려준 연습용 총이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간신히 풀려났다. 영화 ‘피아골’은 그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김진규는 연극배우보다는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내 김보애가 쓴 「내 운명의 별 김진규」.

 

 

연기 노트 계기로 김보애와 부부 인연

 

김진규는 이민자와 이혼하고 혼자 살았다. 그때 영화 ‘옥단춘’을 촬영하고 있었다. 후에 김진규의 아내가 된 김보애도 단역으로 그 영화에 출연했다. 김보애는 어려서 무용가가 꿈이었다. 풍문여고 시절 대학 무용과 교수들이 학교로 찾아와 김보애를 무용과 신입생으로 스카우트했다. 김보애는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 학생이 되었다.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에 연극영화과로 전과했다. 그곳에서 작품발표회를 끝낸 날에 이를 구경한 한 영화감독이 김보애에게 영화에 출연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옥단춘’이란 작품이었다.

 

완고한 부친은 딸의 영화 출연을 반대했다. 부잣집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운 딸을 영화판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 영화배우는 지금과 같이 선망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모친의 도움과 김보애의 ‘단호한’ 행동에 결국 부친은 지고 말았다. ‘옥단춘’은 전라도 광주에서 촬영했다. 김진규가 주인공이었다. 김진규는 분장 전에는 중늙은이 같았으나 분장 후에는 반듯한 선비가 되었다. 얼굴이 ‘조각처럼’ 빛났다. 중후한 연기자로서 카리스마가 넘쳤다. 김보애는 영화 속에서 몸종 역을 했다. 그런데 촬영 도중에 병이 났다. 부친이 연락을 받고는 급히 내려왔다. 김보애가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김진규는 김보애에게 연기론을 정리한 자신의 노트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에서 건강을 회복한 김보애는 적선동에 사는 김진규를 찾아갔다. 그는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대배우가 그런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김진규는 약속대로 연기론 노트를 주었다. 러시아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수업」이란 책을 김진규가 나름대로 번역해 요약한 노트였다. 그 노트가 김보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김진규는 김보애에게 자신의 슬픈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다. 김보애는 그때부터 김진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자신이 보살피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둘은 결혼했다. 김진규는 김보애를 ‘보애’라 불렀고 김보애는 김진규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김보애는 대한민국 최고 스타가 자기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갖은 정성을 다해 그를 뒷바라지했다. (계속)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2월 10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8) 김진규 마르티노 (하)


고뇌와 사색 표현할 줄 아는 배우… 1960년대는 ‘김진규의 시대’였다

 

 

- 김진규. 출처 =「한국영화100년100경」

 

 

주연 영화 작품성·흥행 모두 성공

 

결혼 이듬해에 김진규(金振奎 1923~1998 마르티노)가 촬영한 작품은 무려 22편이나 되었다. 그중에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한국 영화사에서 길이 빛나는 명작이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특별한 영화가 있다. 바로 ‘벙어리 三龍(삼룡)’이다. 신상옥이 감독하고 김진규와 최은희가 열연한 영화다. 나도향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라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히트했다. 김진규는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집에 오면 김보애를 업어 주곤 했다. 각본에 아씨를 업고 달리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집에 오면 솜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말 못하는 사람의 흉내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역까지 나가 말 못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던 어느 날, 촬영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상하게도 끙끙 앓았다. 촬영할 때 아씨를 둘러업고 뛰는 장면이 너무 힘들었던 것. 아씨 남편 역을 맡은 박노식에게 장작으로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이런 고생 덕에 이 작품은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모두 성공했다.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큰상을 받았고, 김진규는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 김진규는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한국영화사를 빛낸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들.

 

 

또한 김진규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범선 원작)과 ‘카인의 후예’(황순원 원작)에 출연하면서 문예영화 전문 배우가 되었다. 특히 ‘카인의 후예’는 해방 후 북한에서 벌어진 공산화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김진규는 지주의 아들로 나오고, 박노식은 지주네 소작농을 관리하는 영감으로 나왔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그 영화를 보았다. 김진규의 그 어질고 착한 모습과 반대로 박노식의 그 악마 같은 표정과 쇳소리 나는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마침 나는 학교에서 나눠준 구충제 산토닌을 먹고 어지러워 얼굴이 노래진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이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 같았다.

 

또한 김진규가 감독을 맡은 작품이 있다. ‘종자돈’이다. 신영균(황소를 가진 홀아비)과 김보애(암소 한 마리로 종잣돈을 마련하려는 과부)가 주인공을 맡았다. ‘종자돈’에서 주요 소재는 ‘소’였다.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도 ‘소’였다.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종자돈’은 공화당 당원이면 필히 봐야 하는 영화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그 영화를 보았다. 대통령이 김진규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까지 했다. 그 덕에 ‘종자돈’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유현목 감독은 김진규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진규는 드물게도 고뇌하고 사색하는 모습이 어울리는 배우야.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지. 그래서 내가 그 사람과 가장 많이 일했던 것이야.”

 

김진규 · 김보애 부부와 딸 김진아. 출처 =「내 운명의 별 김진규」

 

 

직접 제작한 반일 영화 잇따른 흥행 실패

 

김진규는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자신이 가진 돈과 살던 집,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모두 합쳐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가 ‘성웅 이순신’이다. 김진규는 일본과 관련된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독립협회와 이승만’, ‘사명당’,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요화 배정자’, ‘일본 천황과 폭탄 의사’, ‘성웅 이순신’, ‘의사 안중근’, ‘서산대사’, ‘유관순’, ‘난중일기’ 등이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설움과 고통을 받았기에 일본에 대한 반항심과 적개심이 컸다. ‘성웅 이순신’도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화 제작을 도와주었다. 관객도 10만 명이나 왔다. 그런데 흥행에는 실패했다. 결국 김진규는 ‘성웅 이순신’으로 파산했다.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김보애와 이혼까지 했다.

 

그런데 6년 후에 김진규는 또다시 ‘난중일기’를 제작했다. 그 영화에서도 이순신 역은 자신이 맡았다. 그리고 친한 사람들(박암, 장동휘, 장혁, 황해, 이대엽, 이낙훈, 하명중, 정애란, 태현실 등)을 배우로 출연시켰다. 두 아들도 출연시켰다. ‘난중일기’ 역시 흥행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대종상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진규를 청와대로 불렀다. 대통령은 화랑 정신이 들어간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김진규는 기대와 희망을 갖고 대본 작업과 현장 답사, 전문가 고증을 받아가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26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랑 영화 제작은 시작도 못 하고 끝이 났다.

 

 

파산… 골수암 투병… 주님 품으로

 

김진규는 영화와 손을 끊고 제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터를 잡았다. 88올림픽 때는 제주 성화 봉송 주자로 달렸다. 미스코리아 선발 때는 제주 지역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문화계 원로로 봉사활동도 했다. 김진규는 서울에서 살던 집을 처분해 제주에 땅을 사 가족호텔을 지었다. 그런데 호텔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채 압박이 커지면서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술로 세월을 보냈다. 건강이 나빠졌다. 딸 김진아가 아버지를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모시고 가 진단을 받았다. 골수암이었다. 눈도 나빠져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김진규는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다.

 

- 딸 김진아는 아버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드라마와 뮤지컬 등에 출연했다.

 

 

김진아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어머니가 하던 음식점을 다시 시작했고, 뮤지컬과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어느 날, 김진규의 한쪽 팔이 심하게 부어올랐다. 담당 의사가 오더니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임종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제주에서 한 신부님이 올라왔다. 바로 그 신부님이 김진규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을 갖게 한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은 김진규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티노 할아버지, 이제는 하느님의 나라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김진규는 입원하기 전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르티노였다.

 

필자는 김진규가 어떻게 해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았다. 일간지를 비롯해 가톨릭신문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주 신문사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필자가 유추했다. 1960년대는 ‘김진규의 시대’였다. 인기 절정이었다. 늘 선한 역과 지식인 역을 맡았다. 그래서 많은 여성 팬이 있었다. 그중에 일본에서 공부한 국문과 여교수가 있었다. 시가 전공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가까워졌다. 김진규는 여교수를 만나면서 시집을 들고 다녔다. 그 여교수는 가톨릭 신자였다. 김진규에게 성모상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서 가톨릭 신앙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그게 아니면 김진규가 ‘포화 속의 십자가’, ‘순교자’, ‘원죄’ 등 수백 편의 영화에서 각기 다른 역을 하면서 가톨릭 신앙과 만났을 것이다. 거기서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제주에서 그 신부님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후 김진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족이 가도 말도 하지 않고 천정만 바라보았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검버섯이 손과 얼굴에 번져갔다. 결국 김진규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아내 김보애는 김진규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분장 케이스를 들고서 영화 촬영이라도 가듯 언제나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 한번 흔들어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떠났다.”

 

참고자료 : ▲ 김보애 「내 운명의 별 김진규」 21세기북스. 2009 ▲ 가톨릭평화신문(2001.9.24) ‘사랑으로 사는 사람 될래요’(호스피스 봉사활동 영화배우 김진아씨) ▲ 가톨릭신문(2006.12.24) ‘입양 홍보대사 김진아 씨’ ▲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국영화 100년 100경」 돌베개. 2019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2월 17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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