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토)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별별 이야기: 모자람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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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4 ㅣ No.1012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6) 모자람의 영성 (상)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요한이 부모와 함께 상담실을 찾게 되었다. 사실 요한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상담실에 끌려 온 경우였다. 요한은 하는 수 없이 신부 앞에 와서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책을 얻어가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는 있는 대로 신부님께 다 말씀드리라면서 채근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마지못해 자신의 문제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신부님,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빨리 졸업해서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요.”

 

아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갑자기 큰 소리로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아들에게 딴말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를 사실대로 말하라는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입을 굳게 다물자 이윽고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는 아이의 문제를 하나하나 직접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아들이 게임만 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매사에 게으르고, 부모와의 약속이나 가정의 규칙을 안 지키며, 성당에 나가지 않는 등 아버지 눈에는 하나도 예뻐 보이는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러다 사회의 낙오자라도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러다 너 뭐가 될래?”라는 말을 종종 내뱉곤 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한은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될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성격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관점에서 공부하면 잘할 수 있는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밀려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이러다 보니 아들의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러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요한은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하며 의기소침한 상태였지만 확실히 우울증은 아니었다. 임상적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무기력 증상과는 달리 그 안에는 아버지를 향한 강한 분노의 에너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우울한 감정과 무기력한 행동을 통해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를 수동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요한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불만, 아니 아버지로부터 얻게 된 고통은 아버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것이었다. 사실 자기를 위한 훈육임을 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아버지의 잔소리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받는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아버지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러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체험한 요한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느니 차라리 버림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을 쏘아 올리는 활’이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시위를 힘차게 당기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날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어떤 부모에게는 자식이라는 활을 통해 자신이 쏘아 올려지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이 욕망은 무의식에 교묘히 숨어 있어서 인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자식을 위한 잔소리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을 위한 잔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한다. 분명 잔소리와 훈육은 구별해야 한다.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나무를 한꺼번에 넣지 않고 검불이나 잔가지처럼 불쏘시개를 먼저 이용한다. 나무를 한 번에 다 넣으면 오히려 산소가 부족해 불이 꺼진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정도에 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자람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 때문일까? 아니면 차고 넘치는 것에 대한 강박적 열망 때문일까?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3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7) 모자람의 영성 (중)

 

 

요한의 아버지는 스스로 잔소리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 잔소리도 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부모인가? 아들에게 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자식을 위한 교육이며 그 안에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식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방임하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요한의 아버지처럼 70대 후반의 마리아 자매도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키워왔다. 슬하에 두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마리아 자매는 자녀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마리아 자매는 최선을 다해 세 자녀를 교육했고 극진한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 결과 아들딸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세 자녀가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 중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어머니인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물건을 부수는 등 폭력을 마다치 않는 자녀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녀들이라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요한의 아버지와 마리아 자매는 세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두 사람 모두 자녀에게 최선으로 교육하고 온전하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자녀 교육에서는 더 이상의 노력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분들이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는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두 가정의 자녀들은 모두 부모에게 공격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요한은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응대했다. 즉 수동적 공격을 통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한편 마리아 자매의 자녀들은 매사에 짜증과 분노로 일관하면서 심지어 물리적 폭력과 같은 능동적 공격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세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가정 교육에 최선을 다했을 뿐,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한 사랑에 모든 것을 헌신한 부모가 자신의 사랑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담을 진행해 감에 따라 자녀와의 관계 문제에서 요한의 아버지와 마리아 자매는 점차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반면 마리아 자매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자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같은 문제를 지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의 결과로 이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요한의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가 결국 자신의 문제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통찰하면서 아들과의 관계에 변화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바라는 성공은 표면적으로 아들을 위한 욕구였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의 욕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사실 아들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거나 함께 대화해 본 적도 없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경제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아들의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아버지와 달리 남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학생이었다. 아들의 삶을 아버지의 삶에서 분리해 나가는 심리적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잔소리가 아닌 격려와 배려의 언어 패턴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요한은 서서히 아버지의 눈치를 벗어나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공부나 성공이 아닌 행복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반면 마리아 자매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괴로워했다. 실로 억울하고 답답하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이 감정을 일으킨 대상이 남도 아니고 바로 자기 아들딸이란 사실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이 치유되도록 도움을 청할 것으로 예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7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8) 모자람의 영성 (하)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리아 자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치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심리 정서적 안정이었다. 자신은 문제가 없으니 아이들이 빨리 성격을 고쳐 안정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마리아 자매는 자신은 문제가 없고 괜찮으니 아이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모든 관심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자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살아온 세월을 가늠케 해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희생의 결과는 차디찬 자녀들의 냉소와 비난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너무도 큰 사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리아 자매에게는 지나친 사랑, 혹은 과도한 사랑이란 개념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넘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마리아 자매에게 있어서 부모가 너무 간섭하고 잔소리한다는 아이들의 항변은 모두 사랑에 겨워서 호들갑 떠는 것에 불과했다.

 

마리아 자매는 자녀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해 왔던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아도 남들이 봐서 부러워할 옷이면 억지로라도 입혀 학교에 보냈다. 몸에 좋다는 약은 아이들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라도 먹였으며, 누가 좋다고 하는 것이면 무조건 아이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때 아이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12)는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모든 것은 다 아이들을 위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랑도 넘치면 분명 문제가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넘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가 주고 싶다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고 싶은 것을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기적 사랑 혹은 폭력적 사랑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이기심이나 폭력이 긍정적 의미를 지닌 사랑이란 단어와 합쳐지면 어떤 뜻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리아 자매도 그랬다. 마리아 자매에게 사랑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기적 사랑’이란 말은 ‘나쁜 좋은 것’과 같은 표현처럼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영성’, ‘인간적인 신성함’, 혹은 ‘불완전함의 영성’ 같은 용어 역시 이해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영성적 건강과 성숙을 위해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모자람의 영성’이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거나 넘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영성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한계와 유한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이때 모자라는 부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 혹은 이웃의 도움으로 채워질 수 있다.

 

마리아 자매는 심리적으로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어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강박을 낳게 되었다. 물론 이 완전함에 대한 의미도 요한 아버지의 경우에서처럼 이기심과 혼재되어 구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바로 그 완전한(?) 사랑 때문에 오히려 자식들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리아 자매가 만일 자식들을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아마 그 여지만큼 자녀들이 그 사랑을 완벽하게 채워놓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자식은 어머니가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면서 온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한 분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치를 담가주고 싶어도 자식이 원하지 않으면 그 사랑의 행위를 거두어들이는 용기가 바로 모자람의 영성이다. 손주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는 며느리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아내의 양육 방식에 충고하지 말아 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 모자람의 영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갑자기 유행가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14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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