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성경자료

[지리] 성경의 세계: 코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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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4 ㅣ No.3137

[성경의 세계] 코린토 (1)



코린토는 그리스 본토와 아래쪽 반도(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있다. 남북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왕래가 가능하다.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쪽 바다를 건너면 터키였고 남쪽 바다는 로마로 가는 뱃길이었다. 1893년엔 양쪽 바다를 잇는 6.3km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아테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는 320km 단축되었다.

코린토가 바다와 육지교통의 요지가 되자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다. 양쪽에서 들어오는 세금 또한 만만찮았다. 일찍부터 현대식 조선소를 세웠고 당시로는 최첨단인 삼단노선을 건조했다. 7세기에 이미 120척을 갖춘 해군력을 지녔다. 삼단노선은 좌우에 노 젓는 자리가 3층씩 있는 전함이다. 코린토는 이 힘을 바탕으로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교통의 요지이자 해상 무역의 거점인 코린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코린토는 그리스 도시들을 동맹으로 묶어 저항했지만 기원전 146년 패한다. 로마는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하지만 100년 뒤 코린토의 중요성을 간파한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제적 상업과 다민족 다종교가 혼합된 개방도시로 변모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할 당시 코린토 인구는 50만이 넘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 것들이다.

기원후 45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반유다주의 정책을 폈다. 44년 헤로데 아그리파가 죽자 이스라엘을 속주로 만들고 유다인 축출을 명했다. 이때 많은 유다인이 코린토로 모여들었다. 바오로는 이들을 상대로 선교했던 것이다. 그가 코린토에 들어간 것은 2차 선교여행 때였다(50~52년). 터키에서 그리스로 왔던 바오로는 필리피와 테살로니카 그리고 베로이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유다인의 박해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아테네를 거쳐 코린토로 피신한 바오로는 두렵고 떨린다고 고백한다(1코린 2,3). 가는 곳마다 박해 때문에 피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린토에서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나 천막 짜는 일을 함께하며 위안을 얻는다(사도 18,2).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18개월 머물며 교회를 세웠고 이곳에서 테살로니카 전서를 집필했다. 최초의 바오로 서간이며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다. 이후 바오로는 에페소로 거쳐 예루살렘에 들렀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 2차 선교여행을 마감한 것이다. [2015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코린토 (2)



바오로는 2차 선교여행(50~52년경) 때 그리스에 4개 교회를 세웠다. 필리피 교회와 테로니카 교회, 베레아 교회와 코린토 교회다. 아테네도 선교했지만 교회를 세우진 못했다(사도 17,17). 오래 머문 곳은 코린토다. 몸소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로마에서 온 아퀼라 부부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이다(사도 18,3). 인지도가 높아지자 유다인은 종교 이단자로 바오로를 고발한다(사도 18,13). 그러나 총독 갈리오(Gallio)는 소송을 기각했다.

고발사건은 바오로의 활동 시기를 확인하는 자료가 되었다. 갈리오는 51~52년 코린토가 속한 아카이아 지역 총독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 때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네로의 스승 세네카의 친형으로 알려져 있다. 갈리오 외에도 코린토에서 바오로를 도왔던 사람은 많았다. 아퀼라 부부와 코린토 첫 신자 스테파나스 가족(1코린 16,15) 집회장소를 제공한 가이오스(로마 16,23) 코린토 소식을 전해주던 클로에 집안(1코린 1,11) 등이다. 이렇듯 2차 선교여행의 꽃은 코린토 교회였다. 이후 아폴로가 교회를 이끌게 되고(사도 19,1) 바오로는 3차 선교여행을 준비하게 된다.

3차 여행의 중심지는 에페소 교회였다. 바오로는 3년 가까이 머물며 많은 편지를 보냈다.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서간도 이곳 작품이다. 성경엔 두 편이 전해지지만 한편이 더 있었다(1코린 5,9). 당시 코린토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교우끼리 법정에서 송하는 일이 잦았고 성찬례 때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코린토 교회는 바오로에게 상황을 알리며 질문도 겸했다. 특별히 혼인 문제와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는 절실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귀중한 자료를 보냈다. 이것이 코린토 1서다.

사도는 교회 분열에 관해 상당 부분 할애한다(1~4장). 당시 코린토 교회는 유다인 출신 교우와 이방인 출신 교우가 섞여 있었다. 상류층에 속한 이도 있었고 노예에서 해방된 교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바오로파 아폴로파 케파파 등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우상에 바친 제물에 대해선 바오로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8장). 음식 자체가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다만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사랑으로 그만두라 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와(12~14장) 모든 길 가운데 가장 으뜸인 사랑에 대해 설파한다. 유명한 코린토 전서 13장이다. 성체성사의 기원이 되는 최후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11,24-25)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2015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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