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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15: 교구에서의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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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21 ㅣ No.737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5) 교구에서의 시노달리타스


담대하게 발언하고 경청하며 창조성 발휘하는 자문 기구 갖춰야

 

 

- 지난 4월 23일 부산교구청에서 부산교구 사목평의회 제1차 정기회의가 열리고 있다. 부산교구 사목평의회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 교구 단계에서 제시된 시노드 정신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구성됐다.

 

 

“보편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진 ‘개별교회들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in quibus et ex quibus) 유일하고 단일한 가톨릭교회가 존재”(교회헌장 23항; 교회법 제368조)하는 교회의 특성을 염두에 둘 때, 교회의 생활 방식이자 활동 방식인 시노달리타스는 개별교회의 차원에서 더욱 명확한 형태로 실현되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구조는 ‘모든 사람’과 ‘몇몇 사람’과 ‘한 사람’ 사이의 친교적 역동성 안에서, 즉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체적 측면과 합의체적 차원, 그리고 직무적 권위가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노드적 구조를 교구의 범위 안에 적용하면, 개별교회인 교구의 목자인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교회헌장 12항) 참여와 공동 책임의 논리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자리한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바로 ‘자문’(votum consultivum)에 있다. 국제신학위원회의 문헌에서도 언급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시노드적 삶의 쇄신을 위해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자문을 구하는 절차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5항)하다.

 

그런데 이 ‘자문’의 개념을 단순히 사회적 시각으로 해석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자문’의 가치는 상실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교회의 의결 과정에 있어 ‘결국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 성직자에게 있다면, 자문을 해봐야 소용없는 것 아닌가?’하는 회의론이 자리한 현실이다. 그러나 “의결 투표와 건의 투표를 구별한다고 해서, 표현된 의견과 투표 결과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다만 ‘건의 투표(자문)’라는 표현은, 만일 그것을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사회법의 정신에 따라서만 이해한다면, 부적절하게 된다”(68항)는 문헌의 언급처럼, 교회에서의 자문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시노드적이고 교회론적인 시각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의 주도권 논쟁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 백성이 ‘함께 식별’한다는 것에 교회의 삶의 방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교회적 자문의 가치

 

교회에서의 자문 절차는 곧 신앙 감각을 모으는 과정이다. ‘신앙 감각의 수렴’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하느님 백성의 신원은 개인적 성숙이 아니라, ‘개별 신자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s)으로부터 비롯되는 신앙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적)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으로 승화시키는 가운데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 그 과정이 길어지더라도 ‘자문’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러한 신앙 감각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모으는 데에만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자신의 자리에 두도록’ 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자문은, 우리가 사회적 관념 안에서 쉽게 떠올리는 것과는 그 의미와 가치가 상이한 것이다.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차원’이 사회적 자문이라면, 교회적 자문은 ‘기도하고 경청하고 분석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조언’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와 공동책임의 과정이다. 요컨대 교회적 자문이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문제를 연구 및 검토하고 필요한 모든 생각과 의견을 모아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하는 과정’을 통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담대한 발언’과 ‘경청’의 태도가 요청된다. 모든 하느님 백성 ‘사이’에 이루는 ‘상호경청’과 모든 하느님 백성이 ‘함께’ 이루는 ‘공동경청’으로써,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식별해 가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자문절차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떠한 결정에 이르는 것은, 단순히 다수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체를 통해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뜻인 ‘신앙 감각’의 은사를 수렴하고 식별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민원 해결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기 위한 복음화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교회 자문 기구 더 활성화 돼야

 

교회 역사 안에서 때로 그 중요성이 잊혔을지라도 그 존재 자체는 절대 상실되지 않았던 시노드 정신을 담고 있는 제도와 기구는 이미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제도와 기구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우선적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먼저 개별교회 안에서 제도화된 시노드적 기구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교구 시노드’이다. 교구 시노드는 시노드 정신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되는 정점에 있는 도구로서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 유지되어 오던 제도이다. 단순히 교구 설정 기념일을 전후하여 개최되는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교구 사목의 통상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교구의 개별법이나 관례에 따라서 특정한 주기마다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개별교회 안에 존재하는 시노드적 기구에는 각 평의회(사제평의회, 사목평의회, 재무평의회 등)들이 있다. ‘평의회’(consilium)라는 용어 자체가 ‘자문’이라는 것에 있듯, 시노드적 절차이자 방법론을 실현하는 ‘자문 기구’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교회적 자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 평의회들이 그 가치와 자리를 잃은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도 사회 논리에 젖어 신속성과 효율성 중심의 결정 과정만을 추구해 온, ‘가치의 세속화’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에 따라 함께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임을 주지할 때, 충분한 대화와 경청, 식별의 과정을 포괄하는 ‘자문’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더디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평의회’들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제자리 찾기’가 필수적이다.

 

또한 교구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자문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절차와 제도화된 구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문의 절차가 더욱 역동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그 상황에 맞추어 ‘교구에서부터 지구, 본당에 이르기까지’ 창조성을 발휘한 새로운 자문기구와 구조도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노달리타스의 토착화’이자, ‘실질적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effectiva)를 향한 개별교회의 기반이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8월 20일,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춘천 만천본당 주임ㆍ세계주교회의대의원회의 제16차 정기총회 교구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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