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정지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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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04 ㅣ No.48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 정지용 프란치스코 (상)


정지용의 첫 시집 표지는 주님 탄생 예고 성화

 

 

정지용의 삶과 문학 세계를 전시하는 정지용문학관 전경. 출처=정지용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향수’이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이 시는 정지용(프란치스코)이 일본으로 유학 떠나기 전에 썼다. 다시 볼 수 있는 고향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노래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처럼. 수필가 피천득은 ‘향수’를 다시 반갑게 읽고는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고 했다. 또한, 재가 식어진 질화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돋아 고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고 했다. 그래서 질화로 하나 갖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해 다니기도 했다. 또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상이라 했다.

 

 

스승에게 민족 정서와 언어를 배우다

 

‘정지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그란 안경과 반듯한 가르마 그리고 두루마기이다. 정지용(鄭芝溶)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정지용의 어렸을 때 이름은 지용(池龍)이다. 어머니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어서 그렇게 지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보에는 선배로서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이 있었고, 후배로는 이태준이 있었다. 재학 중에 ‘서광’지 창간호에 소설 ‘삼인’(三人)을 발표했다. 휘문고보 문학동아리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아 ‘휘문’ 창간호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문학적 경험은 작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정지용은 3·1 만세 운동에 휘문고보 주동자였다. 이 일로 안타깝게도 정학당했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휘문고보 졸업 후에 발표된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가득 담긴 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정지용에게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킨 가람 이병기였다. 가람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시절에 조선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가람에게서 민족 정서와 민족 언어를 배운 것이다.

 

- 가톨릭 신앙과 민족주의, 모더니즘을 융합시킨 거장 정지용 시인. 사진은 1930년대 초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정지용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그에게 모교 휘문고보가 학비를 대주었다. 조건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모교의 교사로 봉직한다는 것이었다. 도시샤대학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야나기는 조선의 문화예술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 「조선과 예술」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정지용은 ‘윌리암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이란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그리고 교토의 조선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라는 시를 발표했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삐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시 속에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고뇌가 깊이 서려 있다. 이때부터 일본의 문학지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빼앗긴 작가의 꿈

 

귀국 후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꽤 오래 근무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창밖을 바라보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어떤 제자가 당시 스승에 대한 글을 썼다.

 

“시인은 수업 시간에 시상이 떠오르면 ‘자습해!’ 하며 소리치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흥겨워 방긋방긋 웃으며 아름다운 시구를 담뿍 입속에 물어 혀를 굴리었다. … 중학교 3학년쯤 되면 시를 좋아하는 생도들이 생기게 되어 정지용 선생도 이런 제자들의 청을 들어 시에다 음을 붙여 성악가 못지않게 노래를 불렀다. 생도들은 박수는 물론 발을 굴리며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며 교실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내가 본 시인’에서)

 

그러나 정지용은 교사가 된 것과 전쟁과 가난이 그토록 바라던 작가의 꿈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시인이 된 것을 “남들이 ‘시인, 시인’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당시 경향신문에 쓴 글이다.

 

“학생 속에서 청춘을 유실하고 청춘 틈에서 나는 산다. 학생과 청춘! 그들은 팔팔하고 싱싱하다. 괴상하고도 기발하다. 우스워서 요절할 적도 있고 화가 나서 역정이 날 때도 있다. … 나는 무수한 학생을 보아 왔고 이제토록 왕성한 학생 삼림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자식과 제자라는 사이에 인색한 경계선을 긋지 않을 만한 심정의 여유도 가져진다.”(‘학생과 함께’에서)

 

이렇게 정지용은 교직 생활에 대해 매우 복잡한 생각을 가졌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징병 갔다가 38선을 넘어 살아 돌아온 제자가 정지용을 찾아왔다. 스승은 형색이 남루한 제자를 허름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 술과 밥을 사 먹였다. 스승이 먼저 취했다. 스승은 주먹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이놈, 너의 동네에서는 선생님보고 동무라고 한다지! 너도 날보고 동무라고 할 테냐! 이놈”하고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럴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영원히 선생님이지요. 이북에도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 후에 제자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스승 지용에게, 선생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이제 속된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승이라 불러들이겠습니다.” 정지용은 생각했다. 다음 기회에 돈이 생기면 그 제자를 다시 데리고 가서 “동무 선을아!” 하고 주정을 부리겠다고.

 

- 정지용은 자신의 첫 시집 표지에 천사 가브리엘 그림을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시를 통해 신앙을 드러내다

 

정지용은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함께 참여한 사람은 박용철,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대적 언어로 시를 쓰는 모더니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정지용은 문예전문지 ‘문장’을 통해 후에 청록파 시인이 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을 발굴해냈다. 또한, 민족시인 윤동주도 정지용에 의해 문단에 등단했다. 정지용의 첫 시집은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는데, 제목은 「鄭芝溶詩集」(정지용 시집)이었다.

 

시집이 나오자 문단은 열광했다. 모윤숙은 시집을 읽고 “나는 이 시집 속에 가득 찬 조선말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윤동주는 「鄭芝溶詩集」에 “1936.3.19. 평양에서 구입”이라 쓰고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시문학’ 동인 박용철은 시집의 발문을 이렇게 썼다. “그는 한 군데 자안(自安)하는 시인이기보다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이려 한다. 그는 이미 사색과 감각의 오묘한 결합을 향해 발을 내어 디딘 듯이 보인다.” 시집의 표지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주님 탄생 예고’ 중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가져왔다. 주님 탄생 예고는 성모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했음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이다. 이렇게 정지용은 자신의 첫 시집 표지에 성화를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또한, 시집에 실린 많은 시가 신앙시이다. 대표적인 시가 ‘임종’, ‘갈리리 바다’, ‘그의 반’,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이다. 정지용은 시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노래했다.

 

‘영원한 나그네길 노자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圓光)! 나의 영혼에 칠색(七色)의 무지개를 심으시라’(‘임종’ 중)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그의 반’ 중)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五官)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다른 하늘’)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월 1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 정지용 프란치스코 (하)

 

열렬한 신앙을 노래한 정지용, 시대의 격랑 속으로 사그라지다 

 

 

1937년 성 프란치스코 재속회 착복식. 밑에서 세번째 줄 왼쪽 네번째가 정지용(점선) 시인이다. 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장면 박사,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장발 화백이다.

 

 

가톨릭 신자 정지용

 

정지용은 도시샤대학에 다닐 때, 교회 입교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도시샤대학은 개신교 대학이었다. 지원서에 입교 동기를 “구원을 받고 싶은 마음의 요구 때문에”라고 적었다. 정지용은 대학 안에 있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정지용은 개신교 세례를 받은 지 채 1년도 안 되어 가톨릭으로 귀의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프란치스코’(方濟角)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지용이 왜 가톨릭으로 귀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교토제국대학의 한 한국인 교수의 권유로 귀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녔던 한 한국인 학생이 쓴 글에 따르면 정지용은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신앙생활을 해나갔다고 했다. 어떤 국내 신문사가 정지용에게 책 추천을 의뢰했다. 이에 대해 정지용은 최근에 읽은 책 제목을 써주었다. 성경을 비롯해 「준주성범」, 「진화론과 가톨릭 정신」, 「가톨릭 사상사」, 「가톨릭교리서」. 모두 가톨릭 관련 책이었다. 이렇게 정지용은 가톨릭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이때 쓴 시가 ‘승리자 김안드레아’이다.

 

“새남터 우거진 뽕잎 아래 서서 옛 어른이 실로 보고 일러주신 한 거룩한 이야기 앞에 돌아 나간 푸른 물굽이가 이 땅과 함께 영원하다면 이는 우리 겨레와 함께 끝까지 빛날 기억이로다. … 오오 좌깃대의 목을 높이 달리우고 다시 열두 칼날의 수고를 덜기 위하여 몸을 틀어 대인 오오 지상의 천신 안드레아 김 신부! …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도 오히려 성교를 가르친 선목자 안드레아! … 오오 승리자 안드레아는 이렇듯이 이기었도다.”

 

정지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재일본조선가톨릭신우회 교토지부 서기로 봉사했다. 귀국해서는 서울 명동성당 청년회 간부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회 재속 회원이 되어 신앙생활을 더욱 굳건히 해나갔다. 또한, 조선 천주교에서 창간한 월간지 ‘가톨릭청년’의 편집을 맡으며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화가 장발 루도비코도 함께 편집일을 도왔다. 장발은 ‘가톨릭청년’과 ‘가톨릭소년’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 정지용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식 성화를 그린 장발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수도자처럼 경건하게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보고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2021년 2월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한 코너에 정지용과 장발의 ‘이인행각(二人行脚)’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자료가 나란히 전시되었다.

 

한편 ‘가톨릭청년’의 문예면은 1930년대 문단의 주요한 발표 무대였다. 이 잡지에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최고의 시인과 소설가였던 이상, 신석정, 김안서, 유치환, 이병기, 이태준, 박태원, 김동리 등이었다. ‘가톨릭청년’은 신자가 아닌 작가들에게도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가톨릭과 사회의 충실한 가교 역할을 했다.

 

정지용은 천주교에서 발행하는 ‘경향잡지’ 편집일을 맡았다. 경향잡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간된 잡지로 신자들에게 필요한 교리와 교양을 알려주었다. 또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정지용은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 초대 주필이 되기도 했다. 당시 경향신문 주간은 노기남 주교가 맡고 있었다. 노 주교는 정지용을 주필로 기용한 이유를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서 내가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부터 종현성당에 자주 드나들어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한, 일제가 공습을 이유로 서울 소개령을 내렸을 때, 정지용은 소사(현 부천)로 이사 갔다. 그곳 소사공소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정지용의 이웃에 살았던 사람은 “소사로 이사 온 정지용은 평일엔 기차로 서울에 있는 휘문학교까지 출퇴근하며 2세들을 위해 열심히 강단에 섰고, 일요일이 되면 집 바로 옆에 자리한 소사공소에서 공소 예절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정지용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복음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정지용(왼쪽에서 여덟 번째) 시인이 1939년 1월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허원식을 마치고 허원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친일도 배일도 못한 시인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지용은 친일파 문인들이 만든 ‘국민문학’에 일제 찬양 시를 썼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곯아진 흙에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 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이토(異土)’에서)

 

정지용은 ‘문장’지에 일제 찬양 시를 쓴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나는 산수(山水)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국민문학에 협력하든지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협위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조선시의 반성’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던 가냘픈 지식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정지용은 해방되던 해 11월에 명동성당에서 상해에서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나아가 축시 ‘그대들 돌아오시니’를 낭송했다.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정지용은 광복과 함께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옮겨갔다. 「이화 100년 야사」란 책에 정지용에 대한 일화가 적혀있다.

 

“1930년대의 한국 문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정 선생은 1945년 10월 개강과 함께 부임해서 3년간 국어와 영어, 라틴어를 담당했다. 애주가, 호주가인 데다 이름까지 비슷해서 학생들은 그에게 ‘정종’이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그의 기질과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따랐다. 눈 오는 겨울밤에 제자들과 마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넉넉잖은 월급을 털어 형제주점의 추어탕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가난한 시인이 가난한 학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정지용·송재숙 부부와 어린 시절 장남 구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광복 이후 좌익과 우익은 물불을 안 가리고 싸웠다. 이런 모습에 정지용은 크게 실망했다.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 자신과 시대를 한탄하는 글을 실었다.

 

“재주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敵)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이어(鯉魚)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정지용은 경향신문 주필과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 자택에서 은둔했다. 그러다가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 인사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후 정지용에 대한 소식은 여러 갈래로 들려왔다.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다 경기도 포천 근처에서 포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정지용은 월북작가가 되었기에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은 남한에서 그의 작품은 일체 논의되거나 간행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 신경림은 ‘동족상잔의 진흙밭에서 뒹굴기엔 역시 지용은 너무 고고하고 도도한 시인’이라 했다. 수필가 이양하는 “우리는 이제 여기 처음 다만 우리 문단 유사 이래의 한 자랑거리가 될 뿐 아니라, 온 세계 문단을 향하여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만한 시인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참고자료 = ▲ 피천득. 금아문선. 일조각. 1980. ▲ 권영민 편. 정지용 전집(산문). 민음사. 2016. ▲ 권영민 편. 정지용 전집(시). 민음사. 2016. ▲ 정지용. 초판본 정지용 시집. 미르북. 2021. ▲ 월간조선. 문인의 유산, 가족 이야기(정지용의 손자 정운영). 2015.3월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잃어버린 시인 정지용 신앙시 다시 읽기’. 2012.10.25. ▲ 신경림.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1998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월 8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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