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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11: 구산성지 - 교우촌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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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07 ㅣ No.1606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1) 구산성지 - 교우촌의 생활


옹기 구워 생계 해결… 교우촌 회장이 신앙생활 중심 역할

 

 

- 구산 교우촌 첫 회장인 김성우 성인의 묘역.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교우촌 회장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가는 등 교우촌의 원동력 역할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잃은 조선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이후 1834년 유방제(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하기까지 30여 년을 사제 없이 신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신유박해 이후 전국 곳곳에 형성된 신앙공동체 교우촌 덕분이었다. 목자 없는 교회 안에서 교우촌 공동체는 어떻게 신앙을 이어왔을까.

 

 

교우촌의 옹기가마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 99(망월동) 구산성지. 켜켜이 쌓인 기와로 만든 담이 인상적인 성지는 성 김성우(안토니오)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박해시대부터 이어오는 교우촌이기도 하다. 다른 교우촌들처럼 여러 지역에서 피신해온 신자들이 만든 교우촌은 아니지만, 북쪽으로 한강을 끼고, 강변 안쪽 언덕에 소나무 숲이 울창한 지형 덕분에 마을 전체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성지 순교자 묘역 뒤쪽에는 옹기가마가 있었다. 성지 곳곳을 꾸민 옹기와 도자기, 기와 등을 여기서 구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지금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가마는 아니다. 순례자들이 교우촌 생활을 묵상할 수 있도록 복원한 옹기가마다.

 

구산을 비롯해 전국 여러 교우촌들은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해야 하는 만큼 생업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밭을 일구는 등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찾았다. 그중 교우촌의 가장 대표적인 생업이라면 역시 옹기점을 꼽을 수 있다.

 

많은 교우촌이 옹기를 만든 이유는 먼저 옹기장이가 신분을 숨기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옹기장이는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부류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옹기장이에게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옹기를 팔러 다니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다른 신자들이나 흩어진 가족을 수소문하고 신자들끼리 연락을 하는 데도 유용했다.

 

무엇보다 큰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고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컸다. 옹기를 만들면 보통 4~5배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날씨나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 농사와 달리 옹기는 팔고 오면 일정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농사지을 땅은 적고 공동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옹기점은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에 적합한 생계활동이었다.

 

물론 옹기점에서 사용할 흙이 부족해지면서 교우촌 전체가 와해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해자들의 손에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 신분, 재산, 학식 등을 넘어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룬 신자들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많은 교우촌이 옹기점과 화전을 통해 살아남았다.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많은 교우촌들이 여전히 옹기를 구우며 생활해나가기도 했다.

 

 

- 구산성지 입구.

 

 

 

교우촌 생활을 묵상할 수 있도록 복원한 구산성지 옹기가마. 적당한 이윤을 남길 수 있고 박해자의 눈을 피하는 데 유용하다는 장점으로 많은 교우촌이 옹기점을 통해 살아남았다.

 

 

교우촌과 회장

 

옹기가마를 지나 순교자 묘역으로 향하니 ‘김성우 안당 순교 현양비’가 눈에 들어왔다. 구산 교우촌의 첫 회장인 김성우가 순교하자 신자들은 구산 교우촌에 김성우의 유해를 모셨고, 그 자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구산성지가 됐다.

 

구산에서 김성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신앙을 지니기 이전부터 덕망이 높아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김성우는 입교하면서 가족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온 마을 사람들이 신자가 되도록 전교했다. 이렇게 김성우가 전한 신앙이 여전히 구산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옹기가 교우촌 신자들에게 밥을 먹여줬다면, 신앙을 먹여준 이들은 회장들이었다. 특히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회장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우촌 생활은 대부분 회장이 중심이 됐다. 회장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나갔다. 특히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회장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신앙을 이어가고, 또 전파하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박해시대 교우촌의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로 편찬된 「회장규조」에는 회장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돼있다. 회장들은 신자들에게 어린이 대세, 혼인, 장례, 주일과 축일의 기도 모임 등을 지도했고, 성직자를 대신해 여러 예절을 주관했다. 또 교리교사이자 교사로서 교리를 가르치고 한글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성직자가 사목 방문을 하면 회장들이 이와 관련한 모든 준비를 했다.

 

교우촌들이 박해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회장들의 열성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에 관한 기록이 담긴 「사학징의」에는 신자 146명을 심문한 내용이 담겼는데, 이 내용을 보면 성직자 없이도 신앙이 퍼져나가는데 회장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심문 내용에 따르면 146명 중 49명만이 당시 복자 주문모 신부를 만난 경험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심문을 당한 신자들 중 약 66%는 성직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도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오랜 박해로 성직자가 없는 시기, 또 성직자가 있지만 만나기 어려운 시기들이 있었지만, 회장들은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공백을 메우고 한국교회가 이어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구산성지 성모상.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11월 5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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