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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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66: 다정한 공동체에 관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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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30 ㅣ No.739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6) 다정한 공동체에 관한 상상


오늘날 하느님 나라 가치 실현할 ‘다정한 공동체’ 어떻게 형성할까

 

 

-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는 청주교구 음성 보천공소 신자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닮아있는, ‘다정함’이 살아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공동체 의식의 실종

 

세상이 어지럽다. 각자도생이 삶의 핵심 방식이 되었고, 개별적 주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기주의에 빠져있다. 책임을 잃어버린 자유는 세상을 혼란하게 한다. 공동체적 가치는 사라지고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은 그저 옛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확립과 더불어 근대적 주체의 등장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정착된 후 오늘의 상황은 점점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이 되고 있다. 거대한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개체는 파편화되고, 자발적 변화의 동력을 상실했다.

 

기후위기를 일상에서 실감하면서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극단적 양극화를 목격하면서도, 사람들은 눈앞의 물질적 쾌락에만 집중하며 이기적 욕망과 개인적 감정만을 내세우고 있다. 세상 도처에서 성찰적 사유의 부재,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실패를 쉽게 목격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길들여진 개별적 주체들에게 미래를 향한 공동체적 지혜의 추구와 공동체적 행동과 실천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어찌할 수 없이 압도적인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득해 보인다. 무기력과 체념의 정념만 가득하다.

 

 

공동체로서 교회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때로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때로는 세상을 거슬러, 때로는 세상을 변혁하는 일종의 대안적 공동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공동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따르는 거룩한 공동체다. 교회는 하느님의 통치와 완성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의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숱한 도전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공동체성이 사라져가는 오늘의 세상 안에서 교회는 공동체의 성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에 바탕하여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가 가능함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리라. 이것은 물론 가르침이 아니라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라야 설득력을 얻게 된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사람들이 오늘의 교회를 보고 공동체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었다. 공동체는 너와 나의 존재가 동등하게 인정되고 다름이 존중될 때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 공동체성이 상실되면 교회도 물질적으로 환원하여 성장과 번영의 대상이 된다.”(최종원 「수도회 길을 묻다」) 교회는 세속적 영향력을 확대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공동체이며, 세속의 기쁨이 아닌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대조 사회, 대안 사회로서 교회 공동체는 오늘의 세상에서 과연 어떤 성사적 증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수도원 운동

 

외적 성장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할 위험을 내포한다. 공동체성은 외적 규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친교에 달려있다. 하지만 외형의 확대는 내적 친밀성을 약화한다. 로마 제국의 공인 속에서 교회의 외적 확장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옅게 했다. 수도원 운동은 영적 수련과 완성을 향한 집중이라는 개인적 차원과 세속의 흐름을 거슬러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출발했다. 수도원 운동의 밑바닥에는 신앙과 일상 삶의 원천을 세속의 가치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에서 찾으려는, 세상에 대한 저항 정신이 깔려 있다. 수도회 정신은 세상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의 변혁을 위해 신앙적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물질문명에 대한 교회의 응대 방식의 하나로 수도회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 로드 드레허는 자신의 책 「베네딕트 옵션」에서 세속화 시대에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가 대항 문화의 첨병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와 실천에서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야” 하고,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에 따라 마음의 습관과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고, “타협하지 않고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드레허는 제안한다. “우리는 일하고, 기도하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긍휼을 보이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계명을 지킨다.” 아름다운 선언이다. 하지만 원칙을 선언하는 것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일종의 게토를 만들고 문화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는 세상을 극복하고 변혁할 수 없다. 로드 드레허의 구상은 “역사적 맥락의 변화를 무시하는 전통주의의 불행”(토마시 할리크)을 보여줄 뿐이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에서 발생하고 있다. 전통적 수도원 운동이 수도원이라는 공간에서 수도복을 입고 함께 생활하는 방식이었다면, 새로운 수도원 운동은 가정과 세상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실천하고 제자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 Rory McEntee & Adam Bucko 「The New Monasticism」 참조)

 

신자유주의 물질문명 시대에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가려는 노력과 시도들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공동체 형성을 위한 원칙들과 당위적 진술들은 많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성취를 이룬 공동체 운동은 그리 많지 않다. 공간 중심의 공동체 운동들은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초기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창시자들에 의해 유지가 되지만, 한 세대만 지나면 약화되고 소멸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한다.

 

 

21세기의 공동체 – 다정한 공동체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가 아날로그 시대의 공동체를 압도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디지털 문명 시대에 사람들의 관계 맺기는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친밀성과 소속감을 느끼는 방식 자체가 변했다. 이 시대의 공동체는 지역적 연결망과 네트워크적 관계망을 어떻게 조화롭게 병립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을 우리 시대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김연수의 소설 「너무나 많은 여름이」)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다정함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닮아있다. 다정함은 환대이다. 그런데 과연 다정함은 어디에서 오고, 또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오늘의 교회는 다정한 공동체일까.

 

[가톨릭신문, 2023년 8월 27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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