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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요한의 소명 -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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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8 ㅣ No.3094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요한의 소명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요한 묵시록의 도입부에서 독서자와 공동체가 교대로 주고받는 전례적 대화(1,4-8) 다음에 공동체에게 직접 전달하는 직접적이고 연속적인 담화가 이어진다. 이 담화는 비록 산발적인 단절을 포함하기는 해도 결론 부분에서 다시 전례적 대화가 나올 때까지(22,6-21) 묵시록의 거의 전체를 포괄한다.

이 일방적인 담화의 첫 번째 부분은 ‘요한의 소명’사화(1,9-20)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락은 구약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소명사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다니 10,1-21에 나오는 다니엘의 소명사화에 의존하고 있다. 그 구조를 다니엘서의 단락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 지역과 구체적 환경에 대한 설명(묵시 1,9-11; 다니 10,1-4)
2) 초월적 존재의 발현(묵시 1,12-16; 다니 10,5-6)
3) 소명을 받는 사람의 약한 반응(묵시 1,17ㄱ; 다니 10,7-9)
4) 발현한 분의 개입과 소명의 확인(묵시 1,17ㄴ-20; 다니 10,10-21)

이 소명사화 안에서 요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환시를 통해 드러날 모든 일을 기록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소명을 받는다. 묵시록의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한 묘사는 수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가지씩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 나팔 같은 목소리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1,10ㄴ).

요한은 자신의 소명을 목소리를 통해서 받는다. 그 목소리는 요한을 갑자기 덮치는데(뒤에서 들림), 이는 초월적 계시의 항구한 요소이다. 그 목소리는 매우 크며 나팔 소리와 비교되고 있다.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고, 그 중요성은 나팔 소리와 비교하여 해석되고 있다.

목소리의 음질이나 크기가 나팔 소리와 비슷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약 안에서, 특히 하느님 발현의 맥락에서 ‘나팔’의 상징하는 의미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중요성을 지니고 있고“(크고”), 나팔의 수준에 이른다면, 이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

그 목소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요한이 ‘보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것은 1,19에서 다시 취하고 설명하는데“(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 묵시록의 내용 전체를 의미한다. 그 메시지는 큰 목소리로 선포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록되어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기록됨으로써 순전히 구두로 전해지는 것에 비해 더욱 구체적이고 완전해진다.

그 메시지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져야 하는데, 뒤이어 그 교회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된다. 이 도시들은 아시아의 옛 교통망에 따라 나열되고 있고, 총독이 주재하던 도시들로서 다른 지역들보다 중요한 도시들이다.

그렇지만 이 표현은 일곱 개의 개별적 교회보다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총체성 또는 전체성을 의미하는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에서 드러나며, 원문에서 ‘일곱 교회’ 앞에 정관사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사람의 아들’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1,12ㄱ).

목소리는 눈으로 보는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요한은 그 목소리를 보려고 뒤로 돌아선다. 그것은 말하는 존재와 만나고자, ‘보려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본다는 표현은 전통적 의미의 환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만남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뒤로 돌아서는 동작 또한 일상생활과 비교해서 저자가 묘사하는 경험의 특이성을 강조하여 시각화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교회를 가리키는 일곱 황금 등잔대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1,12ㄴ).

요한이 처음 본 것은 일곱 황금 등잔대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일곱 가지를 지닌 황금 등잔대(즈카 4,2 참조)와 모세가 성소에 놓도록 명령받은 순금 등잔대(탈출 25,31)를 연상시킨다. 먼저 등잔대는 성전 안에서 전례를 거행할 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를 경배와 진행 중인 전례행위로 이끈다.

전례행위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거행되는 것이기에 등잔대는 하느님과의 접촉, 그분의 초월성과의 접촉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등잔대의 재료인 금 또한 특별히 제구에 사용되는 하느님의 금속이라는 면에서도 암시된다.

일곱 황금 등잔대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묵시 2,1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들은 ‘초기 발현’의 특징으로 설명하는 구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에페소 교회에 당신 스스로를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라고 소개하신다. 따라서 어떤 공간성을 암시한다.

또 다른 단서는 1,20에 제시되는데, 거기에서 ‘등잔대’는 ‘교회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금 등잔대는 일곱 개인데, 이는 숫자의 상징으로 총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일곱 황금 등잔대’는 총체성 안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것(전체교회)이다.

교회는 전례를 거행하는 상태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이상적인 공간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신 교회의 그리스도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1,13ㄱ).

등잔대로 상징되는 거룩한 공간 안에는 어떤 인물이 있는데 그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다. 이 표현은 다니 7,13에서 나온 것인데, 묵시록에서는 이곳과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종말론적인 추수와 수확을 하는 내용의 14,14에 나온다.

따라서 이는 신약과 특히 ‘요한 학파’의 환경 안에서 자주 나오는 종말론적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역사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등잔대와 관련되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 당신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특징은 다음에 나오는 옷의 상징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1,13ㄴ).


그리스도의 사제직

묵시록의 인간학적 상징에 따르면, 의복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나 상태를 드러낸다. 곧,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규명하고, 그 관계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과 ‘가슴에 두른 금 띠’의 상징은 구약, 특히 다니 10,5에 나온다.

그렇지만 묵시록의 본문은 다니엘서와 비교하여 두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먼저 ‘아마포 옷’으로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으로 되어 있고, 금 띠는 ‘허리’에서 ‘가슴’으로 더 높이 위치한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찾기가 어렵지만, 그 첫 번째 단서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번역본의 구약성경인 ‘칠십인역’에 나온다. 여기에 이 단어는 열두 번 나오는데, 그중 여덟 번은 대사제의 의복을 지칭한다. 이는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지만 분명히 묵시록의 상징 해석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은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월성

그리스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뿐 아니라 가슴 높이에 금 띠를 두르고 계신다. 다니 10,5에 나오는 허리보다 금 띠는 드러나게 더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는 비슷한 인물과 비교해서도 그 탁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제직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15,6에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천사들 또한 가슴에 금 띠를 두르고 있기에 특정한 사제직을 담당한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관례와는 반대로 천사들은 성전에서 나와 역사와 접촉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 또한 하느님의 계획과 역사의 전개 사이에서 수행될 수 있으며,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11,15 참조).

그뿐 아니라 띠가 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사제로서의 신분을 넘어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상징한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그분의 모습에 대한 묘사(1,14-16)를 통해 구체화될 것이다.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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