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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현세의 삶과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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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1 ㅣ No.292

[경향 돋보기 - 생명 그리고 죽음] 현세의 삶과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의 의미

 

 

들어가며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럴까?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늘고 있고 120살까지 살 수 있다니, 빨리 죽는 게 억울하다. 현대인은 죽음도 혼자 맞이해야 한다. 그것도 병원에서. 가족 친지와 온 동네가 애도해 주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외롭고 쓸쓸하다. 두려운 것이 죽음 자체인가. 외로움, 소외인가. 과학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는 현대인들이 죽음을 인생의 자연스런 현상으로, 내 생명의 귀향처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현대인에게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종교의 필요성은 높아지는데 인간의 탄생과 사망, 질병과 노화에 대한 의미부여와 적절한 교육이 모자라기 때문인가. 혹시 일부 종교나 교역자가 지옥불의 고통과 천당의 복락을 과장함으로써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있지는 않는가.

 

여기에서는 죽음에 대한 성경과 신학, 교회의 입장을 살펴보고 인간다운 삶,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의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에게 죽음의 의미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건임을 알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고, 종교의 유무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어찌 보면 종교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존재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라는 허무감, 사후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내세의 존재와 인간 완성의 미래지향적 희망에 대한 해답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우선 육체의 삶이 끝남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체적 고통, 이별과 비탄, 후회와 죄책감, 아쉬움과 분노 등의 심리적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눈에 보이고 숨쉬고 활동하는 육체적 삶 이상의 영혼의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어떤 형태로든,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죽음을 ‘돌아가다’는 표현을 쓰는데, 탄생으로 떠나온 또는 새로운 삶을 제공하는 저 세상으로 귀향, ‘환원’을 의미하며, 사후세계의 존재와 생명의 영속성을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말해준다.

 

철학적으로는,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학파(스토아, 에피큐로스 학파)도 있지만 죽음을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영혼을 옮기는 과정으로 보는 철학자도 있다(플라톤). 헤겔도 무(無)로부터 존재의 생성을 다루면서 소멸하는 ‘무’를 순수한 ‘무’로 보지 않고 다른 어떤 존재로의 이행으로 보았다.

 

20세기 실존철학은 죽음을 가장 절실한 실존문제로 다루었는데, 하이데거는 죽음의 공포를 피하지 않고 죽음이 미래에 닥쳐올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삶의 한복판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현존재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인간은 존재의 출발점을 찾게 되는 적극적 계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무의식 내지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속에서 죽음의 현존을 같이하고 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진정한 의미를 찾고 풍부해지며 삶의 방향과 삶에 대한 책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나 책무에 관한 의문은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죽음에 관하여 성경은 일관된 견해보다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구약성경 : 죽음의 기원을 아담의 범죄,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대가나 ‘하느님의 벌’로 이해한다(창세 2,17; 지혜 1,12). 또한 죽음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그 예로서 아브라함의 죽음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따른 공로로 평화로운 성취로서 죽음을 맞이하였다(창세 25,8).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맞는 것이 아니라 인생 목적 성취의 마무리로서 인간이 축복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한편 구약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았다. 생명을 단순히 개인의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 관계 속에서 실현되고 얻어지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스라엘인에게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고, 그 충만함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흙에 입김을 불어넣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언제라도 생명의 숨길을 앗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도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신명 32,39). 따라서 죽음을 ‘생명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고 하느님의 명령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였다(여호 23,14).

 

신약성경 : 죽음을 단순한 신체적인 죽음(1테살 4,15-16)과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죽음(요한 5,12)으로 구분하였다. 죽음을 사건인 동시에 상태로 보고 이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종결시킨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다(히브 2,14). 그의 부활로 인류는 죽음의 공포와 암흑에서 해방된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라는 대역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의 끝인 동시에 영원한 삶으로 가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결정적 사건이다.

 

교회의 가르침 성경에 기초하여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원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인류가 다시 살아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죽음은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전초 단계이자 동시에 지나가는 과정이며 신앙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다. 세례로 새로 시작한 생명이 죽음을 통해 완성되며 하느님께 돌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인간의 나약함과 유한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전통적 가르침을 재천명하면서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의 활동과 죽음의 의미를 갈망”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이며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인격적 사건이며 절망과 좌절이 아닌 희망의 사건이다. 죽음은 인간이 삶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거짓 없이 바라보게 하며, 인간 실존의 깊이와 의미를 깨닫게 한다. 따라서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며 삶을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길이고, 삶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체험하는 궁극적인 사건이다”(곽승용).

 

 

그리스도인의 내세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후의 세계를 거론할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단연 ‘천당’과 ‘지옥’이다. 오랫동안 상벌의 심판에 따른 장소로서 천당과 지옥이란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지침이 되어 마치 지옥 가는 것을 피하고 천당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인식되었고, 일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들 사이에 아직도 그렇게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많은 현대 지성인은 문자 그대로의 ‘천당’과 ‘지옥’의 개념에 고개를 돌리고 좀 더 의미 있는 정의를 찾고 있다.

 

 

천국과 지옥의 신학적 종교학적 의의

 

지옥은 하느님이 설계한 삶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상실한 상태로 본다. 처벌 장소로서 지옥은 집단적 공포의 표현이며 종교집단이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이용하였다. 구약성경에서는 지하세계, 죽음의 왕국으로서 ‘셔올’을, 사후 최후 심판 때까지 죄인들이 머무는 처벌 장소로 묘사한다.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여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의 구별과 상벌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느님 나라(천국)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라면, 지옥은 하느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멀어져 있는 상실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의 상태라고 얘기한다. 지옥과 천국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영원한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설득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성을 완성할 수 있게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천국과 지옥의 교리는 인간 각자의 현재와 역사에 대한 성실성을 촉구하는 권고이며 구원론과 종말론의 관점에서 인류의 최종적 완성, 최종적 승리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현세와 미래 : 하느님 나라, ‘천국’은 현재와 미래라는 양쪽 시간에 걸쳐있다. ‘겨자씨’처럼 계속 자라나고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역사의 끝에 다다른다. 이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된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현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연속성을 지닌다. 현세의 모든 것은 미래와 완성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중요하고 성실성을 요구한다.

 

미래를 향한 하느님의 나라는 개방적이고 통합적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으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 그리고 종말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 완성이라는 대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 오는가? 인간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이 생긴다. 예수회 신부로 한때 교회로부터 이단시되었던 인류고고학자 테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그의 저서 “인간 현상”, “인간의 미래” 등 수많은 저서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계획된 거대한 진화 흐름의 와중에 있고, 인류 자체가 하나의 과정, 현상이며 궁극적으로 진화의 정점, ‘오메가 포인트’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샤르댕 신부의 주장은 앞서 살펴본 성경과 신학, 교회의 가르침에서 죽음, 인간의 미래,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이해에 보탬이 될 것이다. 칼 라너는 최근 진화론적으로 보면 죽음이 다른 생명을 위해 생명을 마련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우리의 삶이 개개인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인류 공동체적 삶을 가능케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겠다. 이는 개개인보다 인류 전체의 진화를 보는 샤르댕 신부의 큰 안목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삶

 

이상의 성찰에서 우리 인류는 사후에도 변모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 미래 세계는 영원한 삶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세 삶의 고통과 기쁨, 번민과 후회, 성실과 불성실이 사후의 미래를 결정할 요소로서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결국 우리의 삶은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기 위한 행적 쌓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얻어질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인간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인가 살펴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니 일생 하느님을 닮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을 희생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보편타당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수립하여, 자기중심주의, 물질주의, 허무주의,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 문명의 충돌이 난무하는 현대인의 삶에 모범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전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자신, 가족, 신자뿐 아니라 하느님이 지향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선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에게서 왔다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축복의 사건이다(요한 16,28).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온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오메가 포인트로의 여정을 선도한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삶, 희생하는 삶, 배려하는 삶, 베푸는 삶을 산다.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회의 교육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찰과 그리스도적 삶에 대한 함의를 어떻게 알리고 교육할 것인가? 일차적인 책임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이들 주제에 관한 정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평신도를 위한 강의, 세미나, 성경대학 등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책임은 역시 교회가 져야 한다. 신앙교육의 통합적 프로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교육실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점은 대상자들의 교육 정도와 신앙적 수준이다. 자명한 것은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일반인들에게 교리교육이 내용과 방법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일반 성인들도 그 사람의 인지적 수준과 교육적 배경 그리고 도덕적 사고의 발달단계와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강론이나 교리시간에 지옥불의 고통과 공포만을 강조하고 천국의 행복만을 강조한다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냉소를 지을 신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과 지옥의 신학적, 철학적, 이론적 해석에 초점을 맞춘다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는 신자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정보를 제공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신앙심 발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고, 교역자들의 교육과 수련에 반영되어야 한다.

 

* 홍강의 미카엘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분당병원 외래교수이며 한국자살예방협회 회장이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홍강의 미카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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