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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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17-18: 수도회와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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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04 ㅣ No.742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7) 수도회와 시노달리타스 (상)


세속화·개인주의 등 대화와 소통 방해… 수도 정체성 이해가 우선

 

 

시간전례 기도를 바치기 위해 입당하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도자들. 한국교회 시노드 여정 종합의견서에는 교회의 모든 지체가 수도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최근 가톨릭교회의 뜨거운 화두는 아마도 시노달리타스일 것이다. 사실 시노달리타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의 원리였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잠들었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다시 깨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된 새로움’이라 하겠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백성이 친교와 일치 안에서 경청과 나눔으로 서로 소통하며 식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면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백성은 각자의 부르심에 따른 사명 수행으로 이 여정에 참여한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경험과 좁은 식견으로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한국교회 수도회의 상황과 역할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나누어 보려 한다.

 

 

■ 수도회의 상황

 

한국교회 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수도회가 있고 수도자의 수도 적지 않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카리스마가 있고, 그에 따라 교회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지역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와 협력을 위한 노력, 사회 문제와 생태환경 문제 등 우리 사회와 시대의 긴급한 문제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 그리고 세상에 대한 개방과 환대를 위한 노력은 한국교회 수도회의 긍정적 측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하느님 백성뿐만 아니라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걸어가는 보편적 시노달리타스 여정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세상에서 물러남(fuga mundi)이라는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세상과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했던 점을 생각하면 분명 긍정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긍정적 측면이 많지만, 굳이 여기서 다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직면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 개인주의 문제

 

저출산으로 인한 핵가족 사회에서 각자의 개성과 고유성에 대한 강조, 이로 인한 공동체성의 약화는 일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이제는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우선되고 강조되는 풍조가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수도공동체 역시 다르지 않다. 수도공동체 안에 이런 개인주의 경향은 공동체성의 약화와 공동체 생활의 와해를 낳는다. 그 결과 공동체와 타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참된 의미와 중요성은 망각되고 각자 자기 건강과 행복, 자기 시간 챙기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시노달리타스의 정신과 삶을 구현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 세속주의 문제

 

세속주의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남들 위로 올라가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 안으로만 모으려는 것이다. 반면 복음적 가치란 아래로 내려와 남을 섬기는 것,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고 자기 밖으로 나누는 것이다. 수도자는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를 포기한 사람이다. 하지만 수도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포기한 가치를 다시 찾으려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는 격이다. 오늘날 수도 생활 안에 침투한 세속주의는 수도자 자신도 모르게 복음적 가치에서 멀어져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게 한다.

 

이런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경향은 시노달리스 측면에서 깊은 우려를 낳게 한다. 한국교회 시노드 여정 종합의견서(이하 ‘종합의견서’)에서도 “수도자들 가운데서는 수도자들의 세속화, 개인주의, 세대 차이 등이 시노드 정신과 삶,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종합의견서 6쪽)는 우려가 있었다.

 

-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 문제

 

한국교회 내 대부분의 수도회가 외적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다 보니, 상대적으로 내적 생활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과도한 치우침은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을 낳아 내적 깊이의 결여와 신앙과 영성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수도자의 모든 활동은 관상이 그 토대가 되고 관상의 열매로 표현되어 나올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의 불균형으로 초래되는 현상들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도 수도자의 증거적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요사이 한국교회 수도회들이 너무 획일적이고 평준화된 방향과 활동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기능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적 차원에서 수도회 고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다소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든다. 외부적 활동에 참여하고 투신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교회 내 다른 공동체가 줄 수 없는 수도회 고유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놓쳐서는 안 되는 과제 중 하나는 수도자의 정체성, 소명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우리 시대 수도회의 진정한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지역교회와의 관계 문제

 

이는 특히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가 겪는 어려움이다. 실제 본당에서 적지 않은 수녀들이 공동체 운영과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한국교회 종합의견서에도 본당에서 “수도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때 무력감을 느끼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공동 협의의 한 주체로서 역할이 존중받기를 희망하였다”(종합의견서 8쪽)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어려움은 수도자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 부족에서 올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수도 생활과 수도자의 소명에 대한 사목자의 이해 부족에 기인하기도 한다.

 

종합의견서의 다음 내용은 이 문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하다. “오늘날 많은 본당에서 수도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문만큼 교회 안에서 수도자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고 수도자들이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쇄신의 여정이 요청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수도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회 전체가 쇄신하는 이 여정에서 수도자들이 앞장서는 모습을 통해 성령의 활동이 역동성을 발휘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종합의견서 6쪽)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3일,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8) 수도회와 시노달리타스 (하)


복음적 공동체 보여주고 영성 심화 이끄는 것이 수도회 역할

 

 

- 시간전례 기도를 바치고 있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회 고성수도원 수도자들. 수도회는 초기교회 공동체를 본받아 친교와 일치를 이루며 경청과 나눔을 통해 하느님 뜻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수도회의 역할

 

극단적 개인주의로 인해 가정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공동체가 무너져 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참다운 공동체를 재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이 일이 바로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가 해야 할 일차적 역할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에 묘사된(사도 4,32-35)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을 삶으로 증거하며 이 여정에 참여해야 한다. 수도회는 초기교회 공동체를 본받아 친교와 일치를 이루며 경청과 나눔을 통해 하느님 뜻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친교와 일치의 모델

 

수도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Unum in Christo)로서 형제적 사랑으로 충만한 친교와 일치의 공동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수도생활 안에 만연해 가고 있는 개인주의와 세속주의다. 개인의 개성과 고유성만을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무시할 때, 모든 것을 세속적 가치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때, 수도원은 그저 독신자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수도공동체는 공동 목표와 공유 비전을 가지고 있다. 결코 각 개인의 이상이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장(場)이 아니다.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려 노력하는 공동 수행의 장이다. 공동체 친교와 일치를 방해하는 개인주의와 세속주의는 우리 시대 수도회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당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해 나갈 때 수도회는 친교와 일치의 공동체 모델이 될 것이다.

 

- 소통의 모델

 

수도공동체는 소통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소통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대화에는 경청과 열린 나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전제된다. 소통은 수직적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평적 쌍방통행이다. 종합의견서에서도 말한다. “소통의 수평적 구조를 위한 필요성과 실행에 대해 주목했는데, 특히 담대하게 말하기(parrhesia)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종합의견서 4쪽) 권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잘못된 행사는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모든 일에 있어 일방적이고 독단적이게 한다. 권위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권위주의는 권위의 그릇된 인식의 산물이다.

 

성 베네딕토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스(장상)는 공동체 전체를 소집하여 형제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심사숙고하여 더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행하라고 권고한다.(「규칙」 3,1 참조) 이는 수도승 전통의 스승과 제자 관계, 즉 가르치고 명령하는 스승의 절대적 권위와 듣고 실행하는 제자의 순종 관계를 뛰어넘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베네딕토의 이 가르침을 염두에 둘 때, 수도회는 참된 소통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경청의 모델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열린 대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차단된다. 특히 윗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경청의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의 토대와도 같다. 종합의견서는 경청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현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교회 안의 다양한 관계에서 듣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대한 동반자적 인식과 믿음의 부족이 경청의 부족으로 이어진다고 진단되었다.… 특별히 경청이 요구되는 그룹이 바로 성직자와 수도자이다.”(종합의견서 3쪽)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수도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수도자는 ‘말하는 자’라기보다는 ‘듣고 실행하는 자’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과 인격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의 정신과 가치를 드러내려 노력해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복음을 희망과 위로를 주는 기쁜 소식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하느님 뜻을 찾는 모델

 

베네딕토는 말한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이 영광 받으시게 할 것이다.”(「규칙」 57,9)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한다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면 ‘공동 식별 과정’이 필수다. 그것은 한 사람이나 소수의 일방적인 식별과 결정 과정이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식별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다양한 소리와 관점을 듣고 수렴하여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가는 것이다.

 

일각에선 시노달리타스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단순한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베네딕토는 결코 다수결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현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말하고 있지 않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에 앞서 아빠스가 여러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참조하여 결정하라고 한다.(「규칙」 3장 참조) 여기서 강조점은 ‘경청’이라 할 수 있다. 또 아빠스 선출에서도 단순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가 아님을 볼 수 있다. “전 공동체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사람이나 혹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보다 더욱 건전한 의견을 지닌 공동체의 일부가 선출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규칙」 64,1) 비록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견이라면 이것을 채택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수’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이런 바람직한 모델이 되는 것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수도회의 또 다른 역할일 것이다.

 

- 영성의 모델

 

지난 5월에 방한하여 강연한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현재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 개혁은 단지 교회의 제도적 구조를 새롭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영성의 심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영성의 심화를 거치지 않는 한, 머지않아 대부분 교회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는 최근 우리말로 출간된 「그리스도교의 오후」(분도출판사·202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성은 살아 있는 신앙으로 (교의적 측면의) 지적 성찰과 신앙의 제도적 표현보다 앞선다. 영성이 그것들을 초월하고, 이따금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되살리고 변형시킨다. 신학적 사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교회 개혁을 이끈 자극들 대부분이 영성의 중심부에서 비롯되었다.”(226쪽) 영성은 교회 개혁의 원동력이자 그리스도인 삶의 토대다. 깊은 영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교회 개혁과 쇄신, 그리스도인 삶과 활동만이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회는 영성 심화를 위한 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상이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한국교회 수도회가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즉 친교와 일치, 소통과 경청,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을 통해 복음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영성 심화의 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10일,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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