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피천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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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2-06 ㅣ No.53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5) 피천득 프란치스코 (상)


‘한국 수필 문학의 거장’ 피천득, 인간적인 예수님께 반하다

 

 

피천득은 자신의 좋은 점은 모두 어머니에게 물려 받았고, 자신이 결점이 많은 것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그렇다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사진은 어머니와 소년 피천득.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수필 ‘인연’으로 기억하는 피천득(皮千得, 프란치스코, 1910~2007)은 평생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산 문인이었다. 키가 1m 50㎝ 정도이고 몸무게는 40㎏이 조금 넘는 작은 체구였지만 영혼은 한없이 맑았다. 어떤 사람은 “암흑이 지배하는 시대에 선생님의 수필을 읽는 것은 밤하늘에서 별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피천득은 평생 세 종류의 책을 지었다. 「인연」이라는 수필집 한 권, 「생명」이라는 시집 한 권, 「셰익스피어 소네트」라는 번역시집 한 권이다. 시와 수필은 각각 100편 내외만 창작한 지독한 과작(寡作)의 작가이다.

 

 

국어책 속에서

 

중학교 때, 국어책에는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란 수필과 나다니엘 호손이 지은 「큰 바위 얼굴」 그리고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들어있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도 수필 ‘인연’을 비롯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실려있었다. 모두 피천득이 짓고 번역한 글이다. 지금도 그 글의 앞부분은 영화 예고편처럼 내 가슴 속을 흐른다.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 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나의 사랑하는 생활)

 

“어느 날, 오후 해 질 무렵, 어머니와 어린 아들은 자기네 오막살이집 문 앞에 앉아서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큰 바위 얼굴)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대단히 늦었고, 더구나 아멜 선생님이 물어보시겠다고 한 분사법에 대하여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꾸지람을 들을 것이 겁이 났었습니다.”(마지막 수업)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인연)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가지 않은 길)

 

이렇듯 피천득은 국어책을 통해 아름다운 글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때 배양된 정서가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따뜻하게 숨 쉬고 있다.

 

젊은 시절의 피천득.

 

 

아흔 넘어 짜장면을 맛본 이유

 

피천득의 책상 위에는 늘 엄마 사진이 놓여있었다. 흑백 사진 속의 엄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웠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피천득은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타고난 영광이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고, 자신이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엄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새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 때문이며, 햇빛 속에 웃는 자신의 미소는 엄마한테서 배운 웃음이라고 했다. 그런 엄마는 피천득의 모든 글 속에 살아 있다.

 

피천득은 무척이나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었다. 몇 가지 일화가 이를 말해준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당 고해소로 들어갔다. 죄를 고해야 하는데 판공성사 표만 달랑 놓고 나왔다. 피천득을 모르는 젊은 신부가 고해실에서 뛰쳐나왔다. “할아버지 성사 표만 내고 가면 어떻게 하세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나는 죄가 없는데 어떡하나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젊은 신부가 야단을 쳤다.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랬더니 피천득은 이내 자신이 매우 교만했고, 죄를 성찰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지인 한 사람이 피천득을 모시고 서울대 구내 중국 음식점에 들어갔다. 코스 요리를 주문했는데 순서에 따라 짜장면이 나왔다. 피천득은 짜장면을 보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젓가락을 댔다. 그러고는 “나 짜장면 처음 먹어 보는 거야”라고 했다. 그때가 95세였다. 지인은 그 연세까지 짜장면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까닭을 물었더니 “모양이 좀 혐오스러워서 …” 라고 말을 흐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여름 방학에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댁을 찾아갔다. 골목이 많은 동네라 문패를 보고 찾아야 했다. 아무리 다녀도 문패가 보이지 않았다. 날은 덥고 다리는 아프고 학생들은 짜증 났다. 그런데 어느 집 앞 나무 조각에 희미하게 ‘피천득’이라 적힌 문패가 보였다. 붓글씨로 쓴 글자였는데 오랜 세월로 많이 지워져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문패 찾느라 고생했다고 하자, “나는 번쩍번쩍 빛나는 돌에 이름 석 자를 기록할 만큼 유명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으니까”라고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신년 세배 때, 제자가 세배하면 스승은 책상 위에 나란히 세워 놓은 크리스마스카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었다. 그해에 받은 카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모았다가 주는 것이었다. 또는 예쁜 양말이나 미제 초콜릿(당시는 귀한 식품)을 주기도 해서 받는 사람은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또한, 길을 걸을 때도 늘 가장자리로 걸었고, 자리를 잡아도 늘 낮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일화가 피천득이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하며 겸손한지를 말해준다.

 

 

만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다

 

피천득의 호는 금아(琴兒)이다. 거문고 ‘금(琴)’, 아이 ‘아(兒)’이다. ‘금아’는 춘원 이광수가 지어주었다. 금아의 엄마는 거문고를 잘 탔다. 춘원이 그 거문고와 아이를 결합해 ‘금아’라 지어 준 것이다. 피천득은 ‘금아’를 무척 사랑했다. 피천득은 자기 이름에 대해 ‘피가지변(皮哥之辯)’이란 글을 통해 재밌게 얘기했다. 옛날 조상이 제비를 뽑았는데 皮씨가 나왔다. 皮가 좋지만 더 좋은 성(姓)이었으면 하고 면사무소 직원에게 부탁해 다시 뽑았다. 이번에는 毛씨가 나왔다. 毛씨도 좋지만 毛(털)는 皮(피부)에 의존한다고 생각해 皮씨를 택했다고 한다. 피천득은 자신의 이름인 ‘천득(千得)’이 점잖은 것 같지 않아 다른 이름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부르던 이름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름은 하늘에서 얻었다고 해서 ‘天得(천득)’인데, 호적계의 실수로 ‘天’이 ‘千’으로 바뀌었다. 이름을 풀이하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평생 부자로 살 팔자였는데 이름의 획수가 하나 적어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피천득은 어려서부터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십 대 중반에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상월 스님에게 유마경과 법화경을 1년간 공부했다. 어떤 이는 피천득이 금강산에 계속 머물러 스님이 되었다면 고승(高僧)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피천득은 ‘잠’이란 글에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곧잘 잠을 잔다. 찬미 소리에 잠이 깨면 천당 갔다 온 것 같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개신교 신앙도 가졌던 것 같다.

 

예수회 김태관 신부는 피천득이 77세였을 때, 서강대학교 사제관에서 세례성사를 거행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피천득은 자신이 존경했던 중세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닮고자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례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다른 이유도 전해진다. 수도회 ‘회칙’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오래전에 제자 한 사람이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적힌 족자를 선물해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피천득은 교적을 서울 반포성당에 두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어 성경을 가죽 표지가 다 닳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샘터’ 지령 400호를 기념하는 대담에서 김재순이 피천득에게 물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종교를 못 가질 것 같아요’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만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셨지요. 과연, 이 세상에 신이 있음을 믿으시는지요?” 금아가 대답했다.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신의 높은 경지나 정신은 가끔 느끼지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을 볼 때도 그런 걸 느낄 수 있고 음악 중에 최상의 음악, 이를테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과 같은 음악을 들을 때도 신의 존재를 느낍니다.” 그러고는 가톨릭에 입문하게 된 사연도 이야기했다. “얼마 전 작고한 김태관 신부님이 제가 쓴 글 한 편을 보고 특별히 문답도 없이 저한테 세례를 줬어요. 그때 신부님이 읽었던 제 글이 ‘권력에 굴복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 저버리지 않게 해주소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대단치 않은 것에 근심 걱정하지 않게 해주소서’ 이런 내용이었답니다.” 피천득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말했다. “예수님의 친구는 어부같이 당시 가난하고 천대받던 이들,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을 오직 사랑으로 대했지요. 얼마나 인간적인 분입니까? 저는 신적인 면보다도 예수님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 사랑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2월 5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6) 피천득 프란치스코 (하)


밀레의 ‘만종’ 타고르의 시 한구절에서도 신앙을 느낀 피천득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피천득의 신앙 고백

 

피천득은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했다.

 

“난 아직도 그때 들어선 그 문턱에서 서성거리고 있어요. 신앙에 충실치 못한 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아직 내가 믿는 바는 하늘에 군림하시는 전지전능한 신이기보다는 불쌍한 우리들 속에서 고뇌를 같이 하시고 우리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주시는 인간적인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는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순결의 상징입니다. 그 순결미는 어느 종교적 진리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천득은 좋은 기도란 바로 ‘감사의 기도’라고 했다. 자신의 방에 노인이 수프 한 그릇, 빵 한 조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소박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종교의 본의(本意)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도 ‘기도’라고 했다. 말로 표현하건 안 하건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으면 그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브루흐의 ‘콜니드라이’와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는 음률로 나타낸 기도이고, 엘 그레코의 ‘산토 도밍고’와 밀레의 ‘만종’은 색채로 이뤄진 기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로 드리는 으뜸가는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 6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라고 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피천득은 타고르의 ‘기탄잘리’ 한 구절인 “저의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그 힘을 저에게 주시옵소서”를 좋아했고, 자신이 읽은 짧고 감명 깊은 기도는 “저희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했다. 피천득은 눈물은 인정의 발로이며 인간미의 상징이며 성스러운 물방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아름다운 데를 묻는다면, 루카 복음서 7장, 죄지은 여자가 예수님의 발 위에 자신이 흘린 눈물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서 바르는 장면이라고 했다. 또한, 미술품으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고 했다. 피에타에는 마리아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있다고 했다. ‘피에타’는 성모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 예수님을 끌어안고 있는 처절한 모습이다. 고개를 숙인 성모님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성모님의 그 표정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라 했다.

 

- 피천득은 평범하고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했다. 사진은 노년의 피천득.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까닭

 

피천득이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으로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주요섭, 윤오영을 들 수 있다.

 

피천득이 중국 상해로 유학 가게 된 동기는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도산을 처음 만난 느낌을 “용모·풍채·음성 등 모든 것이 고아하였다. 그의 인격은 위엄으로 나를 억압하지 아니하고 정성으로 나를 품 안에 안아버렸다”라고 했다. 도산이 잠깐 나간 틈을 타서 도산의 모자를 써 보기도 하고 도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와 비슷한 것을 구입하기도 했다. 도산을 닮고 싶어서였다. 피천득이 심한 병이 들었을 때 도산은 피천득을 차에 실어 상해 요양원에 입원시켰고, 겨울 아침 일찍이 문병을 오기도 했다. 그런데 피천득은 도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피천득은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보다도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렇듯 피천득의 첫 번째 스승은 도산이었다.

 

다음으로 존경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다. 피천득은 춘원을 “싱싱하고 윤택한 오월의 잉어”라고 했다. 춘원은 피천득에게 워즈워드의 ‘수선화’를 비롯해서 수많은 영시를 가르쳐 주었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게 했고, 인도주의 사상과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피천득은 춘원을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춘원은 가톨릭 신부나 승려가 될 사람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 길가의 관상쟁이가 춘원을 보고 출가할 상이나, 눈썹이 탁해서 속세에 산다고 했다. 피천득이 경기부속국민학교 때 검정고시를 보고 두 해 빨리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들어갔을 때 그의 재능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춘원이었다. 당시 춘원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춘원은 고아였던 피천득에게 깊은 동정심으로 느끼고 자기 집에서 3년 동안 데리고 살았다. 춘원은 피천득의 두 번째 스승이었다.

 

그리고 피천득은 여덟 살 위인 소설가 주요섭을 ‘친형보다 더한 존재’라고 했다. 주요섭을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때, 중국 상해였다. 주요섭은 당시 호강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학교로 찾아간 피천득을 YMCA 식당에 데려가 저녁을 사주었고, 주말이면 영화를 구경시켜주었다. 주요섭은 특대생이었고, 영자신문 주간이었다. 모든 학생이 주요섭을 흠모했다. 피천득은 그를 이상적인 인물로 보았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는 피천득 어머니에 대한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또한, 피천득은 수필가 윤오영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피천득은 윤오영을 정으로 사는 사람으로 서리같이 찬 그의 이성이 정에 용해되면서 살았다고 했다. 윤오영은 양정고보를 졸업했다. 그는 밤이면 송강 정철과 노계 박인로를 읽고 연암 박지원을 숭앙했다. 그리고 중국의 노신을 좋아했다. 또한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와 「장자」도 탐독했다. 그는 해방 후 보성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30년간 근무했다. 피천득은 윤오영을 ‘조지훈 이후로 남은 그리고 미래에도 있을 선비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윤오영은 피천득의 글에 대해 산곡(山谷) 간에 옥수 같이 흐르는 맑은 물로 그 시냇물의 밑바닥에는 거친 돌부리와 아픈 자갈이 깔려 있다고 했다.

 

 

피아노 소나타 31번

 

피천득이 문학 작품을 보고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은 셰익스피어, 도연명, 로버트 프로스트, 찰스 램이었다.

 

피천득은 셰익스피어를 보고 ‘사람은 신과 짐승의 중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 자체라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세대를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고 했다. 또한, 민주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피천득은 “나는 그저 오늘도 도연명을 생각한다”고 했다. 피천득은 시끄러운 도시 생활을 싫어했다. 그래서 도연명처럼 아홉 평 집 마당에 꽃을 심었고, 울타리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러면서 도연명을 늘 생각했다. 도연명이 쓴 유명한 시 「귀거래사」에는 “젊어서부터 속세에 맞는 바 없고, 성품은 본래 산을 사랑하였다. 잘못 도시 속에 빠져 삼십 년이 가버렸다”라는 구절이 있다. 도연명은 마흔한 살에 귀거래 했는데 자신은 쉰 살이 되는데 늙은 말 같은 몸을 채찍질하며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피천득은 미국에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만났다. 그를 정직한 사람, 순박한 사람, 지성을 뽐내지 않는 사람, 인생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프로스트의 시는 뉴잉글랜드 과수원에 사과가 열리고, 겨울이면 그 산과 들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이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정성껏 번역했는지도 모른다.

 

피천득은 평범하고 정서가 섬세한 사람, 동정(同情)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수줍어하고 겁 많은 사람, 순진한 사람, 아련한 애수와 미소 같은 유머를 지닌 사람을 좋아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찰스 램이었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오래된 책, 옛날 작가, 그림과 도자기를 사랑하였고, 작은 사치를 사랑했다. 또한, 어린 굴뚝 청소부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웃으면 따라 웃었다. 그는 램(羊)이라는 자기 이름을 향해 “나의 행동이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나의 고운 이름이여”라고 했다. 사람들은 피천득이 찰스 램과 취향이 비슷해 ‘한국의 찰스 램’이라 부른다.

 

피천득은 하루에 세 시간 이상 클래식을 들었다. 음악을 들을 때는 “잃어버린 젊음을 안갯속에 잠깐 만난다”고 했다. 그의 시 ‘이 순간’에서도 “오래지 않아 /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 이 순간 내가 / 제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라고 음악을 찬양했다. 피천득은 베토벤을 가장 좋아했다. 피천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이 울려 퍼졌다. 피천득은 살았을 때,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장례식장에 소나타 31번을 미리 부탁했었다. 피천득은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묻혔다. 그곳에 제자들이 시비를 세웠다. 시비에는 스승이 가장 좋아했던 시 ‘너’가 새겨져 있다.

 

눈보라 헤치며 /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 사라져 가는 / 너

 

오는 주말에는 잠실에 있는 금아기념관에 갔다 오려 한다. 잠실 석촌 호수 겨울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참고자료 : ▲ 피천득. 수필. 범우사. 1976. ▲ 피천득. 피천득 시집. 범우사. 1987. ▲ 피천득. 생명. 샘터. 1997. ▲ 피천득. 금아문선. 일조각. 1980. ▲ 피천득. 어린 벗에게. 여백. 2002. ▲ 정정호. 피천득 평전. 시와진실. 2017. ▲ 정정호 엮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샘터. 2014.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2월 1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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