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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리 교우촌과 밀양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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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7 ㅣ No.822

신리 교우촌과 밀양손씨

 

 

1. 머리말

 

내포 신리는 제5대 조선 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의 최후 근거지였다. 다블뤼 주교는 박해시기의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며 조선 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마지막 활동 근거지이자 체포지인 신리는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아 왔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 마을을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 이후에도 1927년에 합덕 성당의 교우들이 ‘안 주교 사택’을 매수하여 교회에 봉헌한 일2)이나 1968년에 시복된 신리의 복자 5위를 기념하여 이듬해에 ‘순교복자기념비’를 건립했던 일3) 등은 다블뤼 주교와 연관하여 신리를 주목했던 일련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 내부의 이러한 관심에 비하여 다블뤼 주교와 신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그동안 거의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근래에 번역 발간된 다블뤼 주교의 전기4)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대한 조현범의 번역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신리 성지 개발과 더불어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차기진은 박해기에 신리와 관련된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하였는데,5) 교회기록과 관찬기록에서 42명의 희생자에 대한 관련 자료를 추출하였다. 이렇게 추출된 자료들을 토대로 신리 지역의 천주교 전개 과정을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 수용은 1790년대 이웃 마을의 원시장ㆍ시보 형제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기해박해(1839) 이전에 모방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공소가 설정된 것으로 파악하였다.6) 그리고 교우촌의 핵심 가정을 ‘손씨 집안’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연구는 신리의 순교자를 총망라하여 일별하는 첫 시도였으며, 천주교 수용도 내포 교회의 복음 전파 초창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혀냈다.

 

신리 순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한 서종태는 42명의 조선인 순교자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사실 관계를 규명하였다.7) 이를 토대로 순교자들 시신의 행방을 추적하고, 상당수의 순교자가 신리 인근의 이른바 ‘무명 순교자 무덤’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희생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손씨 순교자들의 관계를 손씨 집안 가계도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신리 박해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의미 있는 상관성을 제시하는 작업이었고, 특히 무명 순교자 묘와 신리 순교자의 밀접한 연관성을 밝히는 공헌이었다.

 

이상과 같은 성과들이 신리의 교회사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폭넓은 이해를 위해 아직도 여러 주제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리와 연관하여 주도적으로 등장하는 손씨들의 문제이다. 기왕의 연구들에서는 손씨 집안과 손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이들에 대한 비중 있는 검토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신리 교우촌의 성격과 역할을 구명하는 데에 결정적인 한계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리 마을의 형성에서부터 성장은 물론 천주교의 수용과 확산이 바로 손씨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역시 손씨 일가의 결정적인 협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리 조선인 순교자의 대다수(18명)가 손씨라는 사실도 신리 교우촌 안에서 손씨 집안이 차지하는 위상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신리의 교회사적 가치를 밝히는 데 있어서 신리의 손씨 집안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신리의 밀양손씨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먼저 밀양손씨의 주도로 신리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당시의 사회 · 경제적 현상과 연관하여 살펴볼 것인데, 여기에는 그동안 고려되지 않았던 ‘密陽孫氏明泉公派世譜’8)와 ‘密陽孫氏明泉公派譜’,9) ‘密陽孫氏大同譜’10) 등 족보류를 활용할 것이다.11) 다음으로 내포 지역에 천주교가 확산되면서 신리의 손씨들이 천주교를 수용하고,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추적할 것이다. 이들의 교회 활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당시 선교사들에게 신리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되는 데 있어서 손씨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내포 지역의 지리적인 조건과 더불어 신리를 선교사들의 입국지로 선택하도록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끝으로 병인박해로 인해 교우촌이 파괴되고 그와 아울러 손씨 집안이 신리에서 와해되는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도 족보를 참고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손씨 순교자들에 대한 기존 자료들과 비교적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양 자료의 신뢰도를 높여 주고 있다. 그리고 신리로부터 피난 나와 생존한 손씨 후손들의 증언도 활용할 것이다. 이 구술 자료는 기존의 기록 자료를 보완함은 물론 박해를 피해 이주한 손씨들이 자신들의 정착지에서 천주교 전파와 유지에 지속적으로 기여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일정한 성씨 집단의 주도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 발전, 파괴, 확산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포 교회사의 폭넓은 연구 방향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신리 마을의 형성

 

신리 지역에 처음 입촌한 인물은 밀양손씨 명천공파 일족이다. 밀양손씨 명천공파는 당진의 유력 성씨 가운데 하나였다. 입향조이자 파조인 명천공 潤生이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에 은둔하면서 손씨 일가의 세거지가 형성되었다.12) 여기서 번성한 손씨 가운데 명천공 6세손 漢이 신리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손씨 집안의 신리 입촌 시기는 《신묘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1644년생인 한은 사망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折衝副護軍을 壽職으로 받은 것으로 보아 1724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이다.13) 世譜에는 한과 한의 아들 啓運(계운, 1683~1707)의 묘가 모두 ‘洪州合德開臺鳳凰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계운이 1707년에 먼저 사망하여 안장되었다면 1707년에 이미 손씨 일가의 선산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을 입촌 인물로 보고, 당시에 일반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나이를 20세에서 45세 정도로 본다면, 한의 입촌 연대를 1664~169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을 필두로 손씨들의 묘가 있는 ‘洪州合德開臺鳳凰山’이 신리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현재 신리 인근에는 ‘개대’나 ‘봉황산’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비교가 가능한 기록으로 《輿地圖書》(英祖33, 1757)에 나타난 홍주 합남면의 개기리[開基里]14)와 《戶口總數》(正祖13, 1789)에 있는 개기상리[開基上里], 하개기리[下開基里]가 있다. 한자로 표현된 기[基]와 대[臺]가 땅이나 터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개기, 개대 등은 고유한 지명을 뜻하기보다는 모두 새로 개척한 땅과 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1971년에 간행된 《신해보》에는 같은 곳에 대해 ‘合德開 鳳凰山’이라고 적고 있어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한편 1872년 지방도에는 개기리, 개기상리, 개기하리 등은 나타나지 않는 대신 홍주 합남면 지역에 新里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개대와 개이 그리고 개기 등으로 여겨지던 곳이 점차 新里라는 지명으로 고유명사화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15) 《대동보》에 같은 장소를 ‘合德面 新里 鳳凰山’16)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정착 당시에 신리는 현재의 범위보다는 조금 확장된 지역을 일컬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손씨 일가는 신리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당진 고대 지역에 세거하던 손씨 일족이 신리로 이주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대지역 손씨들은 16세기 중반 처음 분가한 명천공 4세손 ?을 필두로 17세기 후반까지 주로 서자와 방계 자손들이 분가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은 16세기에 진관 지역으로, 17세기 전반에는 5세손 應雲과 應億이 각각 대호만변의 고산 지역과 태안 지역으로 분가하였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는 6세손 開山과 海가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무한천변의 신양 지역과 해미생포로 각각 분가하였다. 6세손인 한 역시 17세기 후반에 삽교천변의 신리로 이주했는데 이들의 분가 지역이 주로 해택이나 천변의 저습지 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구의 증가와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저평지나 간석지의 개간이 활발히 진행되던 17~18세기 내포 지역의 분가 양상을 대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17) 종법체계가 진전됨에 따라 종손들은 대체로 입향지인 대촌리 지역에 세거하며 종가를 유지해 나갔고, 방손이나 서손들에 의한 분가가 인근의 해안 간석지나 하안의 저지대로 확대되었다.18) 이들은 특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력과 지역사회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 지역의 간척사업을 주도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합덕 지역에 정착한 6세손 한 역시 간척을 통해 신리 지역의 농지 확보와 마을 형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의 지도에 나타난 삽교천변의 모습을 보면 삽교천 주변으로 곳곳에 제방의 모습들이 보이고, 하천을 따라 형성된 들에는 듬성듬성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곳에 지속적으로 제방의 축조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마련된 토지 위에 마을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때문에 신리를 포함한 삽교천 주변의 마을은 背山臨水의 전통적인 입지 조건에는 맞지 않는 저습지/평지에 형성되어 있다. 즉, 이 일대의 마을들은 간척을 통해 새로 형성된 토지를 관리하고 경작하기 위한 신생 촌락이라고 할 수 있다.19) 신리 지역의 자연 마을 지명들이 섬말, 강개, 아랫개안 등 하천지형을 연상시키거나 신리, 신촌, 신포장 등 새로 생긴 곳을 가리키는 지명들이 많은 것은 신리 지역의 이러한 성격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

 

 

3. 신리 밀양손씨와 천주교

 

1) 밀양손씨의 천주교 수용과 신리 교우촌 형성

 

신리 지역의 천주교 수용 시기를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신리의 순교 성인 손자선에 관한 기록을 살필 수 있다.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토마스)20)은 그의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부모와 형과 온 집안은 물론 친척도 다 교우였다고 한다.21) 또한 그의 당숙이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22)이며, 아버지는 손치황(요한)23)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표 1>에서 보듯이 손경서와 손치황은 사촌간이라는 것이 확인된다.24) 이는 손경서(안드레아) 역시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해일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25) 따라서 손경서의 아버지 손후대(자빈)와 손치황의 아버지 손후언(광연) 그리고 손후설(극려) 등이 이미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었으며, 그 형제들도 입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손치호에 대한 “홍주 손니콜라오는 본디 충청도 거더리 중인의 사람으로서 삼대 교우이다”26)라는 증언은 이들의 천주교 수용시기에 대한 추정을 치황의 조부 손점수27)에게까지 올라가게 한다.

 

이 시기의 내포 지역 전교활동 상황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리에서 불과 4km 거리에 있는 여사울에서는 이존창이 1785~1791년까지 전교활동을 벌였고, 이 기간 동안에 그 동네에는 300가구가 넘는 입교자가 있었다고 한다.28) 또한 1789~1790년 사이에 입교한 원시장(베드로)은 신리에서 불과 3km 거리에 있는 응정리 사람으로 1793년 1월 28일 순교하기 전까지 30가족 이상을 입교시켰다.29) 당시 신리 인근의 이러한 입교 상황을 미루어 보아 인접한 신리에도 천주교가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 시기에 신리에 거주하던 손점수와 그 아들들이 천주교를 수용하였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30)

 

 

** 《신묘보》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① 《신묘보》의 인물과 연도는 굵은 명조체로 표기하였다. ② 《신묘보》에는 없고 《신해보》에서 추가된 내용은 명조체로 표기하였다. ③ 《신묘보》와 《신해보》에 없지만 교회기록과 관찬기록에 있는 인물들로 내용상 가계와 일치하는 인물은 고딕체로 표기하였다. ④ + 표시는 교회기록과 관찬기록의 순교자와 이름 혹은 내용상으로 일치하는 인물이다. ⑤ (†) 표시는 처음으로 천주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 《신묘보》에는 丁亥生(1827)으로 되어 있으나 丁丑生(1817)의 오기인 듯하다.

 

손 안드레아는 이미 유 파치피코 신부 때부터 선교사들의 활동에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다. 이는 신리 교우촌과 손씨들이 병인박해기만이 아니라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줄곧 선교사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신리의 공소 설정이 모방 신부의 방문 이전에 유 파치피코 신부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32) 손 안드레아의 교회에 대한 봉사는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조선의 선교사들에게 계속 이어진다. 그는 앵베르 주교33)의 마지막 은신처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했다. 기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손 안드레아는 수원 고을 상게라는 반도34)의 끝에 자신의 비용을 들여 주교의 피난처를 마련하였다.35) 이곳은 모든 조선 선교사들의 비밀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용감하게 (앵베르) 주교님을 모시고 있던 집 주인 孫안드레아는 자기 배로 선교사들을 모셔 오는 일을 맡았다. 7월 24일 자정에 그는 샤스탕 신부와 함께 돌아왔다. 그런 다음 모방 신부를 모시러 다시 길을 떠났는데…”36)

 

앵베르 주교를 은신시키고 있던 손경서는 1839년 7월 24일과 29일에 주교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배를 이용하여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이곳으로 직접 데려오기도 했다. 이처럼 손경서는 위험에 처한 선교사들에게 가장 내밀한 협조자로서 조선 교회의 보호와 성장을 위하여 활동한 인물이었으며, 신리 교우촌은 이러한 활동의 배후지였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은 손경서 이후에도 신리의 손씨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었다. 무진년(1868)에 순교한 손치호(니콜라오)가 체포된 이유는 양인을 ‘宿應’하였다는 것이다.37) 즉 서양인 성직자들을 집에 묵게 하여 시중들고 보살폈다는 것인데, 그는 거더리의 회장으로서 다블뤼 주교와 여러 신부들을 도와 활동하고 있었다.

 

“손치호는 손 요한의 사촌이다. 열심 수계하여, 세속 일에도 모든 일을 잘 안배하므로 안주교께서 회장 책임을 맡기신 후 여러 신부께서 그곳에 계셨다. 성교회 사정을 잘 다스리므로 안주교께서 총애하시고 긴한 사정을 많이 맡기셨다.”38)

 

서양인 성직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 없는 교회 안팎의 사안들을 적절히 안배해 줄 역량 있는 인물들이 필요했고, 신리의 교인들은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고 있었다. 포교들도 손치호의 역할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김백손이 경포를 데리고 들어와 잡으면서, ‘네가 주교 · 신부의 물건을 많이 맡았다는 말을 우리들이 들었으니 내놓고, 책과 당을 대라’하니, 니콜라오 말하되 ‘민신부와 안주교의 물건이 홍주와 면천으로 다 들어갔으니 어디 있으며, 책은 본래 무식하여 볼 줄도 모르고, 어느 정도 동네 사람의 책전이 있었는데 병인년에 모두 불살랐다’하면서 ‘묻지 말고 어서 가자’하였다.”39)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40)가 자신의 활동에 필요한 물품들을 손치호에게 보관하도록 맡겼다는 사실에서 손치호와 신리 교우촌에 대한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정묘년(1867)에 순교한 손소사 역시 다블뤼 주교의 복사를 3년이나 하였으며,41) 병인박해 동안 프랑스인 선교사 3명이 이곳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도 신리가 선교사들의 보호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왔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신리 교인들의 활동은 내포 지역 천주교 전파에도 영향을 끼쳤다. 다블뤼 주교는 손경서에 대해 “많은 재산과 너그러운 성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외교인과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고, 모든 불행에 대한 관대한 도움의 손길을 폈다”42)고 지적한다. 이러한 자질과 성품은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내포의 천주교 전파 양상 가운데 하나는 哀矜의 실천43)이었다. 넉넉한 재산과 너그러운 성품을 소유한 손경서가 많은 외교인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관대한 도움을 주었다는 지적은 애긍실천을 통한 그의 전교활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청주 태생인 송구현이 1833년에 이미 손경서로부터 천주교를 배웠고, 7년 전(1861)에는 신리로 이주하여 살았다는 증언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44) 또한 손경서의 당질인 손 마르셀리노에 대한 기사에서도 “세간이 넉넉한 고로 가난한 사람을 많이 구제하여 이웃에 가난한 자들이 많이 도움을 받았다”45)고 기술하고 있다. 또 무진년 순교자 박영신이 손자선의 집에서 聖敎를 배웠고, 손자선의 권유로 안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역시 애긍 실천과 전교활동이 신리 교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신리 출신 조선인 순교자 42명 가운데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교인이 13명이나 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손씨들의 활약은 신리가 내포 교회의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는 제5대 조선 대목구장 다블뤼 주교가 자신의 거처를 신리로 정하는 데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거점은 국외로부터 잠입하는 선교사들의 입국 루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내포 지역은 중국과 이어지는 서북 육상 루트에 이어, 전교 성직자들이 비밀리에 안전하게 임지로 입국하는 제2의 비밀 통로로 알려져 왔다.46) 그런데 이 비밀 통로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이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간 새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한강을 통해 서울로 입국했다. 그러나 1865년에 입국한 네 명의 선교사는 서울이 아니라 내포로 입국했다.47) 그들이 관례대로 서울로 안내되지 않고 내포에 상륙한 이유는 당시 국경에서 행해지는 밀수에 대한 감시가 엄중해져서 서울로의 잠입이 이전보다 더 큰 위험이 따랐기 때문이었다.48) 이 소식을 접한 다블뤼 주교가 네 명의 선교사들을 맞이하게 된다.

 

“바다로 오기로 했던 동료 4명이 관례대로 수도로 안내되지 않고 제 관할지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쪽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작은 배 세 척에 짐을 모두 싣고 출발하였습니다. 큰 마을에 도착해서 저는 한 달 동안 조금씩 차례로 짐을 모두 무사히 수도로 보냈습니다.”49)

 

다블뤼 주교가 새 선교사들과 함께 보다 안전한 곳을 선택하여 들어간 곳이 ‘큰 마을’이었다. 큰 마을이라면 오히려 사람들이 많았을 것임에도 어떻게 다섯 명이나 되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큰 마을이란 신자들이 주도하던 교우촌 마을이어야 했다. 더욱이 선교사들의 짐은 배를 세 척이나 구해서 나누어 실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이었고, 그것도 한 달 동안이나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철저한 교우촌이어야 가능했다. 이러한 요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신리 교우촌이었다. 당시 입국한 선교사 가운데 하나였던 위앵 신부에 관한 기록에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다.

 

다블뤼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서울에 계시는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보냈다. 그러는 동안 28일 저녁 그도 역시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와 함께 그들의 모든 짐을 가지고 약 400명을 헤아리는 주민들이 모두가 교우인 큰 마을 거더리 혹은 신리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들은 밤중에 그곳에 도착한 후 며칠간 평화롭게 보냈다.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진 다블뤼 주교는 모든 근심을 털어버렸고 위앵 신부와 그 동료들은 서로 기뻐하며 베르뇌 주교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50)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손씨들의 경제적 지위와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신리를 가장 안전한 입국처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400명을 헤아리는 큰 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교우였다는 사실에서 이곳이 그동안 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곳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피해가 적었던 교우촌이라는 점 외에도 신리 지역은 삽교천변의 나루를 포함하고 있는 지리적인 요인과 더불어 이곳의 교우들이 다수의 배를 소유하여 자유롭게 부릴 수 있었다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기해박해(1839) 순교자 손경서가 자신의 배를 이용하여 선교사들을 도운 것이나 병인년(1866)에 다블뤼 주교를 배에 태워 신리에서 바다로 피신시키려 했던 사실,51) 그리고 무진년(1868) 이른바 ‘덕산 굴총사건’ 당시 체포된 손경로(치행)가 굴총하던 배의 주인이라 하여 처형되었다는 증언52)들은 교우들이 소유한 배를 이용하여 이 지역의 지리적인 여건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선교사들의 안전과 자유로운 이동 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신리는 어느 곳보다도 유리한 입국처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신리 손씨들은 당시 천주교회의 존립과 전파라는 천주교회의 본질적인 요청을 자신들의 지위와 활동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4. 신리 밀양손씨 순교자에 대한 검토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박해 이전의 모습으로 더 이상 재건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선교사들을 체포하러 거더리로 왔던 포졸들은 그 마을 주민들을 다른 도당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정식 통행증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써 주지 않고 떠나면서 公州의 포졸들에게 그 일을 맡겼었는데, 이들도 전혀 그것을 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선의 가장 중요한 천주교인촌 중의 하나였던 이 마을은 그 뒤 피점령도시 같은 취급을 받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53)

 

신리 교우촌의 시련은 박해가 끝난 수십 년 후에도 신자를 찾아볼 수 없었을 만큼 혹독한 것이었다.54)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박해기 희생자 가운데 신리에서 체포되었거나 이곳이 출신지 및 거주지인 인물은 45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3명이 당시 내포 지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성직자이고, 42명이 조선인이다.55) 그런데, 조선인 희생자 가운데 18명(43%)이 손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신리가 손씨들이 주도하던 교우촌이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으므로 밀양손씨 족보 및 신리 희생자 명단, 순교 기록 등을 토대로 신리 교우촌과 손씨 일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비교가 가능한 신리의 밀양손씨 족보는 《신묘보》,56) 《신해보》, 《대동보》 세 종류가 있다. 이들 족보와 순교자 기록의 명단이 확실하게 일치하는 인물은 孫景奎(敬瑞), 孫景誼(致煌), 孫景老(致行), 孫世桭(子汝) 등 모두 4명이다.

 

  

 

孫景奎(敬瑞)57)는 “그의 친척이 번성하였고, 獨子다”라는 현석문의 증언58)과 “그는 41세로 12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였다”는 다블뤼 주교의 기록59)이 족보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족보의 손경규(경서)가 孫厚大의 독자인 동시에 1798년(무오)생이므로 1839년(기해)에 정확히 41살이 되기 때문이다. 孫景誼(致煌)는 《치명일기》 689번의 손치황과 일치한다.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의 부친이라는 증언과 손경서와 사촌 간이라는 점도 일치한다. 孫景老(致行)는 관변 기록에는 孫京老로 표기되어 있고,60) 교회의 기록에는 손치양 요한으로 되어 있는데,61) 양쪽의 내용들은 모두 ‘덕산사건’의 주동 인물로 묘사하고 있어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치명사적》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경서) 안드레아의 사촌이니, 4형제 중 말째라”라고 적고 있어 족보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62) 孫世桭(子汝)는 《신묘보》에는 기록이 없고, 《신해보》에만 있는데, 손경의(치황)의 아들로 나온다. 교회 측 기록인 《치명일기》에는 “공주에서 치명한 손자선의 형”63)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손자선이 손치황의 작은 아들이라는 교회 측 기록의 증언들과 내용상으로 일치한다.

 

이상의 4명을 제외한 손씨 희생자들의 명단은 족보의 이름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은데, 그 이유는 보통 字를 사용하거나 이름과 자의 발음이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다르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박해의 와중이라 족보에 기록할 경황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증언 기록이나 취조 기록, 이미 족보를 통해 밝혀진 인물들과의 관계를 토대로 유추해볼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

 

먼저 손(자선) 토마스는 족보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와 연관된 《치명일기》, 《치명사적》 등의 기록에서는 “손자여의 아우, 손치황의 둘째 아들 그리고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의 당질, 기해년 순교자 손안드레아의 당질”이라고 거듭 언급된다.64) 따라서 그는 손치황의 아들이 분명하다.

 

손(치호) 니콜라오는 족보의 孫景煥(致化)이 아닐까 추측된다. 《치명일기》와 《치명사적》에는 무진년(1868)에 순교한 “손치호 니콜라오의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어65) 그의 출생년이 1812년임을 알 수 있는데, 족보상에 孫致化가 바로 1812년생이다. 또 “손치황 요한과 4촌”이라는 《치명사적》의 기록66)도 족보와 일치하고 있다. 즉 1812년생이며 손치황과 4촌인 손치화를 평소에 부르거나 기록하는 과정에서 손치호로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묘년(1867)에 순교한 손 마르셀리노는 孫世補로 보인다.67) 그가 잡힐 때 이를 목격하고 그 사실을 증언한 이가 바로 그의 아들 손 요한이다.68) 요한의 증손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손세보(마르셀리노)는 순교 후 포졸들이 그 시신을 소지품들과 함께 직접 신리로 옮겨왔으며, 인근 왕소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또한 손 요한은 신리 손씨家의 종손인 손정호(여상)로 박해를 피해 아산, 청주 등지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69)

 

병인년 순교자 손사중은 손치황(요한)의 당질이고 순교 당시 47세였다.70) 손치황(요한)의 당질들 가운데 병인년에 47세인 사람은 1820년생인 世祐와 世鎭 그리고 世瑚가 있다. 그런데 증언자인 종손 손 요한이 그의 재당질이라 했으므로 그 당숙이 되는 세우가 제외된다. 또한 세진은 손경서의 아들이 확실하므로 따라서 손자중은 족보의 孫世瑚라고 할 수 있다.

 

정묘년 순교자 손사준은 손치호의 조카이며 37세에 순교하였다.71) 따라서 그는 1831년생이므로 《신묘보》 重刊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경근(치배)의 둘째 아들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손자중은 무진년(1868) 포도청의 신문에서 부친이 기해년(1839)에 순교하였다고 한다.72) 또 《치명일기》에는 손여도가 손자중의 장자이고, 기해년에 치명한 안드레아의 손자7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손여회 필립보에 대한 포도청 신문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손자중이라고 증언하고 있다.74) 한편, 손여일 필립보도 기해년 치명자 손 안드레아의 손자75)이며, 손자선이 7촌 숙부라고 대답한다.76)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손경서의 아들 손자중과 그 큰 아들 손여도, 작은 아들 손여회가 희생당하였고, 손경서의 또 다른 아들에게서 난 손여일도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보에 字가 기록되지 않은 세진이 자중이며, 여일의 아버지는 世祐(自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진년 순교자 손자진은 손사중의 사촌이고, 손 마르셀리노의 6촌이라 했다.77) 따라서 족보에 손 마르셀리노의 6촌이자 손자중의 사촌은 孫世連이 유일하므로 그가 자진일 것이다.

 

18세에 홍주에서 순교한 손복록은 손자진의 재당질이다.78) 그러므로 그는 누구의 아들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기록되지 않은 입촌 8세손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손치경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족보상의 이름들에서 字를 쓰는데 ‘致’의 사용이 빈번한 6세손들 중 하나로 짐작할 수 있다.79) 포도청의 신문 기록에 손치경은 1868년 당시 52세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817년생이 된다. 그런데 그에 해당하는 인물이 없다. 다만 비슷한 연배로 1819년(기묘)생 孫景周가 있고, 그의 형제들과 모든 종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字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손치경(안드레아)는 무진년 당시 나이나 돌림자로 보아서 아마도 孫厚卨의 셋째아들 景周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포도청의 답변 기록대로 그의 아버지 厚卨도 厚大, 厚彦 등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천주교를 봉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리 출신 손씨 순교자들 대부분이 밀양손씨 족보상의 인물들과 일치하고 있었다. 한편, 1800년대 중반 이후 대다수의 인물에 대한 사망일과 묘의 위치 그리고 후손에 대한 기록들이 족보에 추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사자가 순교하였거나 후손들이 더 이상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순교자의 대부분이 손씨들인 신리 마을은 손씨 동족이 주도하던 동족 마을 교우촌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결국 박해를 통한 손씨들의 몰락은 신리 교우촌의 몰락이라는 피치 못할 결과를 가져왔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신리 밀양손씨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신리 손씨들의 활약상은 ‘밀양손씨’ 족보류를 통해 보다 폭넓게 이해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내포 지역의 사회 · 경제적인 구조 변화와 함께 손씨들은 신리의 주인으로 나서게 된다. 밀양손씨의 원 세거지인 당진 고대 지역으로부터 분가한 손씨 일족은 삽교천 연안의 간척사업을 통해 신리 지역에 정착하여 마을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유교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대신 천주교를 수용함으로써 새로 형성된 마을의 결속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져나갔다. 신리의 천주교는 이존창이 내포지역에 전교활동을 벌이던 18세기 말경에 마을의 주도자들이던 밀양손씨 일가를 중심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손씨들의 활동은 곧 내포 천주교회의 활약상을 대표하게 되었다. 신리의 첫 순교자 손경서(안드레아)는 유 파치피코 신부를 비롯하여 앵베르 주교에게 결정적인 협력자로서 활약하였고, 다블뤼 주교와 그 밖의 선교사들 역시 손씨들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반에는 400명에 달하는 주민 모두가 신자인 커다란 교우촌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865년 위앵 신부를 비롯한 세 선교사들의 입국지로 신리가 선택된 것은 이곳 신자들의 활약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들의 활약이 낳은 또 다른 필연은 교우촌과 손씨 일가의 파괴이다. 척사양이를 표방한 병인박해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결정적인 협력을 제공한 신리의 손씨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말았다. 확인이 가능한 신리의 조선인 순교자 42명 중 18명이 손씨인 것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한편,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생존한 신리의 손씨들은 자신들의 피난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신해보》와 《대동보》를 통해 확인된 신리 손씨들의 세거지는 대부분 구한말과 근현대시기를 거쳐 교우촌이나 본당이 있던 곳이었다. 손세보(마르셀리노)의 손자 영운은 공주 장기에 정착하여 마산(매산) 공소 회장을 지냈고, 1937년에 신축한 공주 성당 건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손세당의 증손인 손업동은 예산 신례원의 공소회장으로 1977년에 본당이 설립되기까지 활동하였으며 신례원 공소 강당을 그가 주도해서 건립하였다.80) 손세호의 손자 영현은 예산 신양면 차동리의 한덕골에 정착하였다. 당시 차동리에 있던 일가들은 천주교인이 아니었으나 이후에 큰 공소로 성장하게 된다. 영현의 집에서 공소를 여는 등 공소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81) 손세진의 아들 정기(우기) 발라바는 박해를 피해 서천 작은재를 거쳐 부여 금사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금사리 본당 설립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으며, 초대 주임인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를 도와 본당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82)

 

‘신리’라는 교우촌과 이곳의 주요 인물이었던 밀양손씨 일가의 모습을 통해 조선후기 내포교회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내포 지역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현실에서 부족하나마 보다 세밀하고 다양한 연구를 위한 초석으로서 이 글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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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31쪽.

2) <치명하신 안주교 사택 매수>, 《경향잡지》 21, 1927. 7, 324~325쪽.

3) <병인 순교 복자 5위 기념비 제막>, 《경향잡지》 61, 1969. 6, 26쪽.

4) 샤를 살몽, 정현명 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6.

 

5) 차기진, <병인박해기 신리(거더리) 관련 순교자 행적> ; <박해기의 신리(거더리) 공소와 순교사>, 《여사울 · 성거산 · 신리 · 갈매못 성지 자료집》, 천주교대전교구, 2007.

 

6) 신리(거더리)의 천주교 수용에 대해 차기진은 1790년대 응정리의 원시보 · 시장 형제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입수한 족보 자료와 기존의 증언들, 그리고 신리 지역의 지형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오히려 원시장 · 시보 형제가 신리의 교인들로부터 입교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7) 서종태, <신리 무명 순교자 묘에 대한 연구>, 《한국사회와 천주교》, 디자인흐름, 2007 ;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에 대한 연구>, 《신리성지의 학문적 규명을 위한 학술 세미나》, 신리성지, 2008.

 

8) 上之三十一年辛卯(1831)唐津海雲庵重刊. 이하 《신묘보》.

9) 唐津郡高大面大村里寒泉洞 依楸齋, 1971 辛亥. 이하 《신해보》.

10) 密陽孫氏大同修譜委員會, 1984 甲子. 이하 《대동보》.

 

11) 두 족보는 신리의 손씨 후손들을 찾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2007년 11월에 입수하게 되었다. 1831년에 당진의 초락도 해운암에서 중간된 《신묘보》와 1971년에 발간된 《신해보》는 대전에 살고 있는 손병무(손점수의 7세손)로부터 입수하였다. 《신묘보》는 집안에 전해진 것이고, 《신해보》는 본인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한편, 1984년에 제작된 《대동보》는 홍성에 사는 손기성(손점수의 9세손)으로부터 입수하였다.

 

12) 《신묘보》, 명천공사적조. “其後 平安兵使李施愛亂 本道水軍 緣於風浪 過期不進 謂公以不善都察 貶補水使 黃參判保身 朴判書元亨 合啓 無辜旋卽蒙宥 晦迹唐津磨石蓋泉 作亭仍居 自號明泉.”

 

13) 甲申生 壽職折衝副護軍 配坡平尹氏 父俊吉 外祖光山金淑 墓洪州合德開臺鳳凰山新占子坐.

14) ‘개기리’란 지명 역시 ‘터를 새로 열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간척지로 새로 형성된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15) 조선후기 ‘新’里의 의미와 생성에 관해서는 임학성, <18세기 후반 洞里의 증가와 ‘新’리의 증가>, 《역사와 담론》, 2008 참조. 기존의 大里가 분동하는 과정에서 ‘新’자를 첨가하는 형태가 있으나, 그 비율이 적고 보통은 ‘새로 조성된 동리’가 대부분이다.

 

16) 《대동보》 8, 466쪽.

 

17) 당시 손씨 일족의 분가 지역이 진관, 삼봉, 해미 등 해안 간석지나 예산, 합덕 등 하안의 저평지에 집중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삽교천 연안의 합덕, 우강, 예산 지역은 17~18세기에 간척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곳이다.

 

18) 이해준, <朝鮮後期 村落構造變化의 背景>, 《한국문화》 14,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3.

 

19) 합덕읍의 자연 지명들 가운데는 뒷고래원, 하신원, 신풀원, 궁원, 원점원, 상궁원, 새원말, 하궁원 등 ‘원’(언 : 堰)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이는 제방(언 : 堰)을 쌓아 형성된 간척지가 많음을 암시한다.

 

20)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442~443쪽.

21) 서종태, 앞의 글, 49쪽.

22) 《병인치명사적》 정리번호 7-4~8. 이하 《치명사적》.

23) 《치명일기》 689/202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6번 143 ; 《치명사적》 23-18.

24) 서종태도 손경서와 손치황을 사촌으로 확인한 바 있다(<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에 대한 연구>, 49쪽).

25) 《기해일기》, 176쪽.

26) 《치명사적》 11-6~7.

 

27) 손점수는 기유년(1789)에 사망했다. 여사울 출신 이존창이 내포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던 1785~1791년의 시기와 신리에서 3km 거리의 응정리(합덕읍 성동리)에서 원시장이 전교활동을 벌인 1789~1790년 시기를 고려하면, 신리 마을의 손씨 일가도 같은 시기에 천주교를 접했을 것이다. 따라서 손치황에 대한 증언을 따른다면 손점수는 1789년 사망 이전에 신리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수용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8) 달레, 앞의 책 下, 365쪽.

29)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1, 2005, 153쪽.

 

30) 이와 연관하여 차기진은 신리의 천주교가 응정리 원시장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응정리는 신리에 비하면 삽교천으로부터 훨씬 내륙 쪽에 위치해 있다. 당시 교통의 흐름이나 문화 문물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수로와 나루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때, 이 지역의 천주교 전파 경로는 신리를 통해 응정리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신리에는 삽교천이 관통하고, 일제시대 초반까지도 큰 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존창의 여사울 역시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수 지점에 가까워 내포지역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존창을 중심으로 내포 천주교의 전파 방향은 여사울-신리-응정리로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31)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中, 423쪽.

32) 따라서 모방 신부의 방문과 성사를 통해 공소가 설정되었다는 차기진의 주장은 보다 깊은 검토가 요구된다.

33) 앵베르(Imbert, Laurent-Joseph-Marius, 한국명 范世亨, 1796~1839) 주교. 제2대 조선 교구장. 1839년 순교.

 

34) 1839년 모방 신부는 이곳이 ‘달계모리’(tal-ke-mori)라는 곳으로 서해의 한 만에 있는 물가라고 기록했다(모방 신부의 마지막 편지). ; 이곳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에 있는 바닷가로 닭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아산만 방조제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데 방조제 공사로 닭 머리 모양은 유실되었다(내포교회사연구소, 《청양 다락골 자료집》, 다락골 성지, 2009, 145쪽).

 

35) 달레, 앞의 책 中, 423~424쪽.

 

36) 모방 신부의 마지막 편지에도 주교가 자신을 데려오기 위해 배를 보냈으며, 7월 29일에 도착하고, 30일에 그곳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위의 책, 428~429쪽).

 

37) 《치명사적》 23-21.

38) 위의 책, 같은 곳.

39) 위의 책, 11-6.

40) 위앵(Huin, Martin Luc, 한국성 閔, 1836~1866) 신부. 거더리에서 체포, 1866년 순교.

 

41)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번 149; 《치명사적》 23-103 ; 손씨는 아니지만 김양범과 김선행 부자도 원주에서 신리로 이사하여 신부의 복사를 하기도 했다(《치명사적》 9-17~18).

 

42) 달레, 앞의 책 中, 423쪽.

 

43) 김수태, <조선후기 내포지역 천주교의 확산과 이존창>, 《지방사와 지방문화》 7-1, 2004, 역사문화학회, 113~116쪽. 김수태는 내포 천주교회의 시조격인 이존창이 이기양으로부터 양명학의 실천적 전통을 수용하였고, 이러한 기반 위에 천주교를 실천함으로써 내포 지역 천주교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44) 《좌포도청등록》, 무진 6월 20일(양 8월 8일).

45) 《치명사적》 23-14.

46) 李元淳, <내포 천주교회사의 의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속)》,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321쪽.

47) 1865년 10월 16일 부모에게 보낸 서한 ; 샤를 살몽, 앞의 책, 341쪽.

48) 달레, 앞의 책 下, 371쪽.

49) 1865년 10월 16일 편지 ; 샤를 살몽, 앞의 책, 341쪽.

 

50) Il expeia aussito M. de Preteniees au vicaire apostolique, Mgr Berneux, reidant aa capitale, Seul, auelques cent kilomeres plus au nord; tandis que lui-mee partait le 28 au soir, avec MM. Huin, Dorie, Beaulieu et tous les bagages, pour gagner un village plus grand, Ketori ou Sinli, entieement chreien et comptant environ quatre cents aes. Ils y arriveent de nuit et y passeent quelques jours tranquilles. Deivere de tout souci, Mgr Daveluy ayant pris en main tous leurs embarras, M. Huin et ses compagnons ne songeent plus qu’ae reouir, en attendant les ordres de Mgr Berneux. (Emile Vauthier, UN TEOIN DU CHRIST Luc-Martin Huin, Le Sarment Fayard, 1984, p. 89). 그간의 자료와 연구에서는 이들 선교사들의 입국지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상기 자료를 통해 신리로 입국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51) 달레, 앞의 책 下, 425쪽.

52) 《치명일기》 728.

53) 달레, 앞의 책 下, 431쪽.

 

54) “(양촌에) 도착하기 조금 전, 왼쪽으로 신리(新里)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고 또 1866년에 체포된 곳이다. 그리고 좌우의 세거리와 거더리 두 마을은 1866년 이전까지는 완전히 교우들 마을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은 모두가 외교인일 뿐만 아니라 어느 곳보다도 완고한 외교인들이 되었다. 박해는 이 가련한 영혼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뮈텔 주교 일기》 2, 1896년 10월 26일자).

 

55) 서종태,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에 대한 연구>, 《신리성지의 사적과 순교자에 대한 종합적 고찰》, 신리성지, 2008, 65~66쪽 <표 1> ; 이들의 순교 경위에 대해서는 같은 글, 48~64쪽 참조.

 

56) 1831년 3월 하순에 중간된 《신묘보》에는 명천공 12세손 손경호(성달)가 1830년(경인) 6월 6일에 사망한 것이 인쇄되어 있다. 따라서 1830년 6월 6일 이전까지의 정보를 가지고 족보를 편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3세손인 1837년(丁酉)생 세웅(字 士直)의 이름, 자, 생년을 수기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그것은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에는 족보와 같은 유교적 전통을 버리고 오로지 천주교 신앙에 전념하고자 했던 흔적들이 보이는데,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소각했다거나(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333~356쪽),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집안에 내려오는 문적을 모두 없애 버린 일(김수태, <최경환 가문의 천주교 수용>,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호남교회사연구소, 2010, 64~72쪽 참조) 등이다.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 신리 손씨들의 족보 기재가 없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57) 손경서에 대해서는 서종태도 신리 출신으로 확인한 바 있다(서종태, 앞의 글, 48쪽).

58) 《기해일기》, 176쪽.

59) 달레, 위의 책 中, 526쪽.

60) 《고종실록》 권5, 고종 5년 무진 5월 29일.

61) 《치명일기》 728 ; 《치명사적》 1-97 ; 23-22.

62) 다만 景老를 京老로 적은 것과 致行을 치양이라 적은 것은, 모두 발음되는 대로 이름을 기록하는 데서 오는 誤記인 것을 보인다.

63) 《치명일기》 225.

64) 《치명일기》 225, 468, 689 ; 《치명사적》 23-18.

65) 《치명일기》 223 ; 《치명사적》 11-6.

66) 《치명사적》 23-21.

67) 기왕의 연구에서는 손 마르셀리노의 속명을 언급하지 못했으나, 족보와 그 후손들의 증언 채록과정에서 손세보임이 확인되었다.

68) 《치명사적》 1-144 ; 23-14.

69) 김성태 녹취, 2008년 12월 15일 손철웅(1959년생) 증언.

70) 《치명일기》 690.

71) 《치명일기》 648 ; 《치명사적》 23-22.

72) 《좌포도청등록》 무진 윤4월 12일.

73) 《치명일기》 649.

74) 《좌포도청등록》 무진 윤4월 19일.

75) 《치명일기》 116 ; 《치명사적》 23-16~17.

 

76) 《좌포도청등록》 무진 윤4월 17일 ; 서종태는 손여일이 《치명일기》 116번과 《치명사적》 23-16~17에 1866년에 치명했다는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서종태, <신리 · 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에 대한 연구>, 53쪽).

 

77) 《치명일기》 637 ; 《치명사적》 1-144 ; 23-19.

78) 《치명일기》 691 ; 순교연도가 정확하지 않지만 서종태의 의견을 따라 1867년 이후에 순교한 것으로 한다(서종태, 앞의 글, 59쪽).

79) 서종태, 위의 글, 55쪽.

80) 김성태 녹취, 2007년 11월 21일 손만재 신부 증언.

81) 김성태 녹취, 2009년 11월 21일 손병무 증언.

82) 《金沙里本堂 100年史》, 381쪽.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성태 신부(신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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