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윤석중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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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2-20 ㅣ No.55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7) 윤석중 요한 (상)


암울한 시대, 밝고 아름다운 동시로 아이 어른 모두를 위로하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요한, 尹石重, 1911 ~2003)이 시를 짓고 윤극영이 곡을 붙였다. 윤석중은 1300편이 넘는 동시를 지었고, 그중 800여 편이 동요로 불렸다.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30대에는 한 달에 예순 편 넘게 창작했다. 매일 일기처럼 동요를 쓴 것이다.

 

 

윤석중의 동요

 

사람들은 윤석중에게 “그동안 지은 동요가 몇 편이나 되냐?”고 묻는다. 그러면 “천 편”이라고 말하려다가 “천 편 남짓”이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천 편’ 하면 천편일률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밤낮 같은 소리’, ‘그게 그것’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라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대표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일 년만 기다려 달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답해온 것이 오래되었다. 혹시 나이가 더 들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기에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윤석중 동요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고향 땅, 새 신, 고추 먹고 맴맴, 달맞이, 기찻길 옆, 동대문 놀이, 달 따러 가자, 퐁당퐁당, 어린이날 노래, 새 나라의 어린이, 우리 산 우리 강, 졸업식 노래, 나란히 나란히, 앞으로, 옹달샘, 봄나들이, 옥수수나무, 산바람 강바람, 우산1, 낮에 나온 반달’ 이렇게 많았다. 모두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불렀던 동요이다. 나이가 든 지금도 이 동요들을 부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윤석중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밝고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윤석중이 지은 동요는 한결같이 밝고 희망차다. 그 어둡던 일제강점기와 그 참혹했던 6ㆍ25 전쟁 때 지어진 동요가 그렇게 밝고 희망찼던 까닭은 무엇일까? 윤석중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어찌 해방 전만 그렇겠습니까? 38선의 기막힘, 6·25 동란, 겨레 싸움의 원통함, 남의 전쟁에 뛰어든 괴로움, 이런 일들이 연달아 생기는 동안 우리 겨레에게는 근심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슬프더라도 자는 시간, 노는 시간, 웃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동요에 있어서는 무겁거나 벅차지 않은 가볍고, 우습고, 재미나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홀로 살아남은 외톨이

 

윤석중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회운동을 하던 지식인이었고, 어머니는 부농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윤석중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윤석중의 형제들은 8남매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막내로 태어난 윤석중만 살아남아 외톨이가 되었다. 윤석중의 이름을 ‘석중(石重)’이라고 지은 것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마라’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윤석중이 아홉 살 때 재혼했기에 서울 수은동 외가에 맡겨져 자랐다.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처음 배운 노래가 ‘하루(春)’라는 일본 창가였다. 우리말도 ‘봄’이 있는데 굳이 ‘하루’라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봄’이란 동시를 지었고,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실렸다. 양정고보로 진학했다. 그해 ‘어린이’ 잡지에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야”로 시작하는 ‘오뚝이’가 당선되었다. 어른의 모습을 오뚝이에 비유한 것이다. 윤석중은 동요를 창작하면 이를 들고는 홍난파, 윤극영, 박태준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나온 동요가 홍난파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달마중’, 윤극영의 ‘흐르는 시내’, ‘제비 남매’, 박태준의 ‘맴맴’, ‘오뚝이’ 등이다.

 

 

동심을 잃지 않은 석중

 

윤석중은 10대 중반부터 천재 소년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의 동포들아 / 이천만민아 /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 나아오너라 / 우리 것 우리 힘 / 우리 재주로 / 우리가 만들어서 /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가’ 물산장려운동을 기념하는 노래 현상 공모에 열다섯 살 학생의 작품이 당선된 것이다. 또한, 윤석중은 열여덟 살에 정순철과 함께 동요 ‘짝짜꿍’을 만들었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아빠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이 동요는 ‘우리 애기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신문에 실렸다.

 

동요가 발표되자 인기가 폭발했다. 경성 라디오 방송이 노래를 내보내자 누가 만들었냐는 문의가 쇄도했고, 재방송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어린이 행사에선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다. ‘짝짜꿍’의 노랫말 중 “엄마 한숨은 잠자고 / 아빠 주름살 펴져라”를 보면 슬픔에 잠겨있던 당시 어른들의 마음을 어린이가 달래주는 듯하다.

 

양정고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신문에 윤석중의 시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신문에 윤석중(尹石重)이라는 이름이 ‘윤석동(尹石童)’으로 잘못 나왔다. 이를 보고 춘원은 ‘석동(石童)’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 했다. 그래서 ‘석동’은 윤석중의 아호가 되었다. 또한, 춘원은 후에 「윤석중 동요집」 머리말에 윤석중을 ‘아기 노래 시인의 거벽’이라 칭찬했다.

 

“석동 윤석중군은 조선 아기 노래 시인의 거벽이다. 그의 노래 중에는 전 조선 아기네의 입에 오른 것이 여러 편이다. 그는 지금 이십이 넘은 청년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4~5세로부터 12~13세에 이르는 아기네의 마음과 뜻을 겸하여 가졌다. 이른바 ‘동심’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에게 백발이 오고 이가 다 빠져서 꼬부랑 늙은이가 될 때까지 이 ‘어린 맘’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춘원의 말대로 윤석중은 아흔 살이 넘어서도 ‘어린 맘’으로 동요를 창작했다.

 

 

유학길에 올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양정고보 졸업반이었던 윤석중은 그 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다. 양정고보에서 호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졸업장을 받는 것이 마음에 가책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스물여덟 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조선일보사 사장이 윤석중에게 학비를 대주며 일본에서 신문학(新聞學)을 배워오라고 한 것이었다. 윤석중은 당시 편집을 맡고 있던 잡지 ‘소년’에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남기고 떠났다.

 

“들입다 퍼 쓰기만 한 나의 지식의 우물은 마침내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이 나지 않는 우물은 메워버리거나 더 깊이 파야 합니다. 나는 마침내 더 깊이 파기로 하고, 일손을 멈추고서 유학의 길을 떠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2월 19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8) 윤석중 요한 (하)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이 평생 간직한 두 마음, 동심과 신심

 

 

노년의 윤석중 선생. 가톨릭평화신문 DB

 

 

신앙에서 찾은 영혼의 샘

 

윤석중이 일본으로 유학 간 대학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소피아대학(上智大學)’이었다. 독일인 신부들이 강의와 학교 운영을 맡았다. 학교에는 마음을 닦는 수련관과 작은 성당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쉬는 시간도 묵상할 수 있을 정도로 캠퍼스는 조용했다. 벨기에 태생의 한 신부가 윤석중이 잡지 편집 경험한 것을 알고는 ‘빛’이라는 우리말 가톨릭 잡지 편집을 맡겼다. 그 신부는 집을 전세 내 한글 활자를 구해다가 조판소를 차리고는 매월 몇만 부씩 잡지를 인쇄해 한국으로 보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빼앗긴 그 시절에 ‘빛’은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신부였다. 그 신부를 통해 진정한 한글 사랑을 배웠다. 또한, 학장 신부를 통해서는 가톨릭 신앙을 깨우쳐 나갔다. 학장 신부는 하느님을 이렇게 비유했다.

 

“무한히 뻗어있는 기차를 생각해보자. 아무리 끝이 없더라도 맨 앞에는 기관차가 이끌고 있을 것 아닌가! 아득히 뻗어있는 기차를 우리네 인간에 비긴다면, 맨 앞에서 끌어주는 기관차야말로 천주님이 아니겠는가!”

 

윤석중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영혼의 샘을 발견했다. 윤석중은 집에서 대학까지 가려면 성당 앞을 지나가야 했다. 성당 앞을 지나갈 때마다 성당이 자신을 늘 지켜보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했다. 학교 안에도 성당이 있어 유학하는 내내 가톨릭 분위기에 젖어 지냈다. 윤석중은 세례받기로 했다. 그리하여 대학 수련관에서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해서는 혜화동성당 근처에 집을 얻었고, 정릉과 반포로 이사해서도 성당이 옆에 있었다. 그후 방배동으로 이사했을 때 성당이 없었는데, 나중에 성당이 생겼다. 성당은 윤석중을 따라다니며 지켜주었다.

 


어린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윤석중은 해방의 기쁨을 시로 읊었다.

 

“해방의 날 / 서울 장안에 / 태극기가 물결쳤다 / 옥에 갇혔던 이들이 / 인력거로 트럭으로 풀려 나올 제 /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 울지를 못하였다 / 아이들은 / 설에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 어른들은 / 아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 서울 장안을 뒤덮은 / 태극기, 우리 기 /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해방의 날’)

 

윤석중은 이 시를 꾸며서 쓴 것도 아니고 보태서 쓴 것도 아니었다. 그날 자신의 눈으로 똑똑이 본 감격의 순간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은 어린이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윤석중은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스승 방정환의 ‘색동회’를 잇기 위해 새롭게 ‘새싹회’를 만들었다. ‘새싹회’는 많은 일을 했다. 어린이합창단, 어린이 합주단, 글짓기 교실, 애기회 등을 운영했고, 소파상, 장한 어머니상, 해송동화상, 새싹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새싹문학’도 창간했다.

 

그렇게 어린이에게 쏟아부은 사랑과 정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윤석중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게 되었다. 수상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입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로부터 진실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배움으로써 자신들의 위선과 몰인정과 추함을 버릴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최상의 양심이며 만물의 본심인 동심으로 돌아간다면 지상낙원이 이룩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모든 참석자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 윤석중은 서산 율목리 느티나무 아래서 ‘우리마을 느티나무’와 ‘고향땅’ 등의 동요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동요에 얽힌 일화

 

“기찻길옆 오막살이 / 아기아기 잘도 잔다 / 칙칙폭폭 칙칙폭폭 / 기차소리 요란해도 / 아기아기 잘도잔다 /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길 옆’이란 동요이다. 윤석중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해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달리는 기차의 창가에 앉아 갖가지 상념에 잠겼다. 그때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잠을 자는 아기를 보았다. 당시 철길 가에 늘어선 집들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달리는 기차 소리에도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이 동요를 지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먼 길’이라는 동요이다. 윤석중은 일본 유학 시절에 징용통지서를 받았다. 징용을 가면 어떻게 죽을지 몰랐다.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통지서를 받자마자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피신해 들어왔다. 금강산 장안사 마을에 숨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피해 다녔다. 윤석중에게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먼 길을 떠나는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아기가 잠들면 먼 길을 떠나려고 했는데 아기는 잠들지 않고 계속해서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아빠는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빠와 아기의 슬픈 사연이 담긴 동요이다.

 

또한, 윤석중은 문교부에서 졸업식 노래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를 지었다. 그때 윤석중은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고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는 꽃다발이 그렇게 많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윤석중이 남긴 유산

 

윤석중은 꿈을 가졌다. 막사이사이상으로 받은 상금과 여러 기관의 협조를 얻어 이 땅에 ‘어린이도서관’을 세우고 싶어 했다. 어린이도서관에는 어린이 책은 물론 세계의 인형, 세계의 장난감, 세계의 어린이 노래, 세계의 어린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모두 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윤석중의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윤석중의 그 꿈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 서산시는 윤석중이 남긴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사업을 기획하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석중 동요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윤석중 유물전시관, 동요·동시 역사관, 아동문학도서관, 어린이 공연 전용극장, 동요공원 등의 시설과 함께 동요·동시 관련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서산 율목리에는 수령 70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어떤 여름날, 가방을 든 30대 신사가 그 느티나무 아래로 왔다. 그는 나무 아래 앉아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썼다. 그 신사가 바로 윤석중이었다. 동시 “우리 마을 느티나무 / 하도 오래되어서 / 아무도 모른대요”로 시작하는 ‘우리 마을 느티나무’와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의 ‘고향땅’도 이곳에서 지었다.

 

윤석중의 아버지는 서울에서의 사회운동을 접고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을 데리고 율목리 마을로 이주했다. 마을에는 어머니가 물려받은 많은 논과 밭이 있었다. 이 재산은 외가의 유일한 혈육인 윤석중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대신 관리하며 살았다. 윤석중은 결혼 후에 서산에 적을 두고 30여 년간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다. 율목리에서 자식을 낳고 길렀다. 그렇게 정든 율목리를 떠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동생들을 모두 앗아 갔다. 그 참혹한 슬픔을 잊으려고 정든 고향을 떠난 것이다.

 

윤석중 장례 미사가 서울 방배동성당에서 봉헌되었다. 평생을 어린이 동요에 바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성가대에서는 특별히 ‘졸업식 노래’, ‘낮에 나온 반달’을 부르며 애도했다. 참석자들이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를 부를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윤석중은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묻혔다.

 

“금년 8·15날에는 석중에게 기를 높이 들리우고 우리 어린이를 나팔 불리고 북 치라고 해야겠다.”(시인 정지용)

 

참고자료 : ▲ 윤석중. 날아라 새들아. 창비. 2012. ▲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세계적인 동요시인 윤석중. 시아북. 2021. ▲ 권영민 편. 정지용 전집(산문). 민음사. 2016.▲ 가톨릭다아제스트 엮음. 확실한 암호. 흰물결. 2006. ▲ 가톨릭신문. 1975.7.20, 1975.7.27, 1975.8.24. ▲ https://namu.wiki/(윤석중) ▲ 조선일보. [모던 경성] 양정고보생 윤석중·동학 최시형 외손자 정순철, 국민동요 ‘짝짜꿍’만들다(2022.5.14.) ▲ 홍성신문·내포타임즈. ‘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우리나라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율목리 느티나무.(2017.6.26.) ▲ [네이버 지식백과] 윤석중-수많은 동요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해준 동요의 아버지(인물한국사, 노경수, 장선환)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2월 26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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