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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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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922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귀향’

 

 

드라마 / 2016.2.24. / 127분 / 한국 / 15세 관람가 / 감독 조정래

 

 

지옥. 죄 지은 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살아서는 누구도 가볼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가 지옥”이라고 했다. 죽은 자들이 아니다. 1943년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이다.

 

같은 시간, 지구 정반대 쪽에서 똑같은 말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나치가 만든 지옥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갔고, 신을 원망했다. 두 지옥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사람들과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그 지옥을 만든 사람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거나 외면하기에는 그들과 함께 기억하고,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영화 <귀향>은 그 ‘해야 할 일’의 하나를 이야기한다. 제목이 말하듯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넋이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 그것이 기도면 어떻고, 굿이면 어떤가. 다큐멘터리면 어떻고, 영화면 어떤가. 누군가가, 무엇으로든 그 길을 열고 닦는 일이라면. “이제 그만하자.”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적, 외교적으로 마무리했으니, 잊고 미래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시대상황, 정치적 손익에 따라 바뀌거나 달라지는 역사의 청산은 진실도 아니고, 진심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다. 오히려 아물지 않은 역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상처에 소금만 뿌리는 일이다. 아직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날을 찾아가는 영화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귀향이 증언에 따른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서, 상업적 계산으로 두 감정, 즉 슬픔과 분노를 극대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귀향 역시 그런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된 20만 소녀들이 겪은 ‘지옥과 치욕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영화가 표현한 슬픔과 분노는 오히려 억제되고 생략된 것일지도 모른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선택이 오히려 영화 귀향에는 위험과 부담일 수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더구나 팔순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수없이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도 많이 있었다. 그 증언의 기록이야말로 ‘진실’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은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또 한 번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을 알면서도 귀향은 구음과 굿판이 벌어지는 우리의 무속과 폭력적인 성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운명적으로 만나고 화해하는 드라마적 이중구조를 선택했다. 죽은 위안부 정민(강하나)의 넋이 1991년 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성폭행을 당한 은경(최리)에게 빙의되고, 은경이 씻김굿을 하는 노인의 제자가 되어 위안부 할머니 영옥(손숙)과 만나고, 은경을 통해 영옥은 죽은 정민을 다시 만난다. 이 모든 것이 일본군 위안부로 죽은 14세 소녀 정민의 넋을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영화는 중간중간 73년 전으로 돌아가 천진난만한 정민과 그와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만주 길림성 목단강가로 끌려온 조선의 소녀들을 따라간다. 정민은 헤어질 때 어머니가 당부한 “정신만 차리면 돌아올 수 있다. 거창 땅 한득이골로 데려다 주세요라고 해라.”란 말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첫날부터 엄청난 충격과 고통, 절망으로 정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군 오장은 어린 소녀들에게 무자비한 육체적, 성적 폭력을 가하면서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성군을 위한 암캐다.”라고 말한다. 과장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귀향이 보여주는 일본군과 그들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위안부들의 모습은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보았거나 증언을 통해 알고 있다. 때문에 영화가 일본군과 위안부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줄 때는 충격보다는 참담함이 앞서 눈을 감아버린다. 비극성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자극적 성적 묘사로 느끼거나 받아들일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귀향에는 물론 영화적 우연과 설정도 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본군들이 위안부들을 학살하려는 순간 광복군이 기습을 하고, 정민과 그녀가 언니라고 부르는, 지금은 영옥이란 이름으로 사는 영희(서미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았으나, 쓰러진 일본군 오장이 기어이 다시 일어나 총을 쏘고, 정민이 영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신 그 총을 맞고 죽는다. 정민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다나카를 통해 ‘지옥에도 인간은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렇다고 위안부의 비극성과 일본군의 잔학성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귀향은 마침내 은경의 빙의와 굿을 통해 죽은 정민의 넋을 불러내 “차마 마음은 그곳에서 못 돌아왔다.”는 영희와 다시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둘은 “우리 이제 집에 가자.”며 함께 돌아온다. 그들을 따라 죽은 위안부들의 영혼도 모두 나비가 되어 고향의 품에 안긴다. 그것으로 그들의 한과 역사가 남긴 과오가 완전히 씻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조차 쉽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영화로 만들기 위해 투자자를 찾았으나 실패해 우여곡절 끝에 일반시민 7만 5,270명의 후원금(클라우드 펀딩)으로 제작했다. 어렵게 완성한 후 개봉을 하면서는 정치적 상황으로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했다.

 

아픈 역사를 다시 확인하고, 치유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도 우리가 외면하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고, 단단히 아물게 해야 하는 이유는 상처를 준 자와 상처를 입은 자 모두 두 번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을 찾기 위해서이다.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영화 <귀향>에 많은 관객이 몰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신도, 2016년 봄(계간 51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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