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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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코헬렛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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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0 ㅣ No.3086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코헬렛은 누구입니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신학생 시절에 코헬렛(옛말로 전도서)을 읽을 적마다 궁금증만 커갔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때때로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 구절 같은 경우입니다. “내 허무한 생애 중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 너는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 너는 너무 악하게 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마라….”(코헬 7,15-17)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너무 의롭게 되지 마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너무 악하게 되지도 말고 바보가 되지도 마라?’ 이건 또 무슨 뜻인가?

반면 성서는 늘 우리에게 의롭게 살아야 장수한다고 가르칩니다. 먼저 십계명의 한 장면을 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탈출 20,12) 잠언도 의롭게 살면 장수하지만 악하게 살면 쉬 죽는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살날을 더해 주지만 악인의 수명은 짧아진다.”(잠언 10,27) 한편 시편 저자는 사기꾼들이 제 명을 다 살지 못할 것이라고 기도합니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들 그들은 일생의 반도 채우지 못하지만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시편 55,24)


그렇다면 왜 코헬렛은 ‘너무 의롭게 되지 마라’라고 말합니까?

코헬렛은 틀림없이 체험했을 겁니다. ‘삶의 현장이 유다교의 가르침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아무리 의롭게 살아온 사람이라 해도 하루아침에 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온 사람이 버젓이 장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본 시인은?

인간적 회의를 느껴 다음처럼 읊기 시작합니다. “나는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지고 걸음을 헛디딜 뻔하였으니 내가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우고 악인들의 평안함을 보았기 때문이네. 그들에게 아픔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몸은 건강하고 기름졌네.”(시편 73,2-4) 이 시편의 신앙인은 끝에 가서 주님께 굳은 신뢰심을 고백합니다. “이제 보소서, 당신에게서 멀어진 자들은 멸망합니다. 당신을 배신한 자를 당신께서는 없애 버리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저는 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아 당신의 모든 업적을 알리렵니다.”(시편 73,27-28)

코헬렛은 이 시편의 신앙인처럼 악인들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서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너무 악하게도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무 의롭게 되지 말라’는 코헬렛의 표현은 아마도 ‘하시딤 Hasidim’과 같은 당시 유다교 극단적 신심주의를 피하라는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신앙도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몰두하여 주변 상황을 외면해버린다면 지나친 경건주의나 광신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는 물론, 친척이나 동료들,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거나 인간관계에 금이 가게 되고 갈등이 심해져 기본 질서까지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너무 악하게 되지 말라’는 표현은?

적당한 악이나 작은 범죄는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제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전혀 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다음 구절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해줍니다.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코헬 7,20) 코헬렛은 극단적인 입장들은 모두 다 비효율적이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코헬렛이 좋아하는 표현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걸로 보아 ‘허무’라는 단어라고 봅니다. ‘허무로다’(히브리말 ‘헤벨 hebel’)는 구약에 40차례 정도 나오는데 코헬렛 안에서만 33차례나 등장합니다. 코헬렛은 책 맨 앞에서 뿐 아니라(1,2) 끝부분에 가서도 ‘허무로다’를 등장시킵니다(12,8).


그런데 ‘전도서(傳道書)’를 왜 ‘코헬렛’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그 이름은 코헬렛 첫 장 첫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코헬 1,1) 코헬렛은 본디 ‘집회, 회중,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말 ‘카할’의 동사형(모이다) 여성 단수 분사로서 ‘공동체의 직책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전도서’라는 말은 종교의 도리를 전파하기 위해 집필된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와는 달리 코헬렛의 보다 정확한 뜻은 그냥 ‘전도사의 책’입니다. 그러니 ‘전도서’라는 이름은 ‘코헬렛’에 걸맞은 뜻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코헬렛을 ‘모임에서 연설하는 이, 수집가, 수집 책임자, 대변인’ 등으로 이해합니다. 코헬렛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그 뜻이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보니, 오늘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우리처럼, 아예 히브리말 원어 그대로 음역해서 그냥 ‘코헬렛’이라고 부르는 추세에 있습니다.


코헬렛의 내용을 간추린다면?

코헬렛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주제에 따라 나란히 전개되는 책이 아닙니다. 그래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1,12-2,26)은 머리말(1,3-11)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 코헬렛은 자기 삶을 돌이켜봅니다. 그 결론으로 결국 인생은 허무라는 것입니다. 되돌아보니 그저 얻은 것이라고는 쓴맛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은 그저 즐기라는 표현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2,24)

둘째 부분(3,1-6,12)에서 코헬렛은 인간의 현실이 늘 한계성에 직면해 있으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는 이제 그러한 운명의 신비 속에서 번민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림자처럼 보내야 하는 허무하고 한정된 생애에서 그에게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리오? 인간이 죽은 다음 태양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려 주리오?”(6,12; 참조: 7,14; 8,7; 9,12 등) 코헬렛은 고심합니다. ‘나를 둘러싼 이 실존의 부조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자살과 향락 사이를 오가는 충동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하여 참인간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셋째 부분(7,1-12,7)에서 코헬렛은 현실적이면서도 냉철한 사고(思考)의 소유자로 나타납니다. 인생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좋은 것이고 그래서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즐거움을 찬미하게 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태양 아래에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애 동안 노고 속에서 그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8,15; 참조: 3,13; 5,17; 9,9)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6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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