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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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유령 -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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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6 ㅣ No.58

[영화칼럼] 영화 ‘유령’ - 2023년 감독 이해영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사순 시기를 맞이한 신앙인들은 새로이 실천할 거리들을 살핍니다. 그러나 사순 시기는 무언가를 새롭게 실천하는 시기보다는 신앙인답지 못했던 지난 모습을 다지는 시기로 삼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던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순 시기가 겨울의 끝자락에 시작되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며, 겨울을 다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새겨지는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영화 <바람의 소리(2009)>로 이미 영화화된 소설 <풍성>을 각색한 영화 <유령>은 1933년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영화는 극중 항일조직 ‘흑색단’이 조선총독부에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을 받아 외딴 호텔에 갇히게 된 다섯 명의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립니다.

 

용의자 중 한 사람이자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인 준지(설경구 분)는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특별히 남몰래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어머니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데 앞장선 아버지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때를 준지가 회상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를 향해 ‘사라진 조선에 미련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답을 들려줍니다. 이는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등장하는 말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곤궁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지조’를 비유합니다. 준지의 어머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한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항일운동을 옳은 길이라고 여겼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처럼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어머니를 비롯한 항일운동가들의 결기를, 준지는 자신에게 차별을 가하는 이들의 태도보다 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편 또 다른 용의자로서 통신과의 암호문 기록을 담당하며 흑색단의 유령으로 활동하는 차경(이하늬 분)은 작전 중 목숨을 잃은 동료 난영(이솜 분)을 향한 부채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 부채감은 목숨을 건 항일운동을 펼치는 차경의 심지를 흔듭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난영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차경이지만, 자신이 난영의 뒤를 고스란히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차경을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차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겨우내 침엽수와 같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난영을 떠오르게 하는 그 인물로 하여금 차경은 그간 지닌 부채감과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됩니다. 극중 차경을 비롯한 흑색단원들의 목숨을 건 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지만, 그 요원함을 차경과 동료들은 희망으로 바꾸어 보는 법을 터득합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겨울의 깊은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며, 우리네 실존을 수없이 뒤흔들려드는 세파 앞에서도 꿋꿋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서울주보 7면,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행당동성당 보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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