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3-5: 역사 · 시대적 배경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26 ㅣ No.1461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 역사 · 시대적 배경 ①


시민전쟁 포로가 된 프란치스코, 기사를 꿈꾸다

 

 

- 아시시 성의 망루 로카 마죠레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와 움브리아 평원.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간략하게 비트리의 야고보의 증언을 나누었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그 당시의 역사-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아시시

 

아시시는 아직도 전형적인 중세 도시로 제시된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중부 내륙에 위치한 움브리아 계곡 위에 솟아올라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비교적 작은 지역으로서 그 넓이가 8456㎢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은 또한 이탈리아 반도의 중앙 아펜닌노 지역에 위치하며 산들과 언덕들 그리고 삼림으로 우거진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의 약 6%만이 평원일 뿐이다. 아시시는 해발 424m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평원 중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지만, 그 위로는 해발 1294m의 수바시오 산이 솟아올라 있다. 이 산은 둥근 지붕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삼림으로 가득 차 있다. 아시시는 오늘날도 많은 인구가 있지는 않지만 12~13세기에는 훨씬 더 작은 도시였다.

 

 

역사적 배경

 

중세기의 세계는 양대 권력을 주위로 전개되었다. 한 편에는 신성한 로마의 황제가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교황이 있었다. 이 대단한 인물들은 양편에서 버티고 서 있었는데,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황제와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년) 교황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시대는 거룩함과 속됨의 두 진영에 의해 지배되었던 세상이었지만 이 둘은 서로를 대항해 싸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일이 종종 있을 만큼 이 두 진영 사이의 구별점은 아주 미묘했다. 정권과 종교는 똑같이 권력을 휘두르곤 하였다. 이 시기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 시대였는데, 성지는 당시 신앙과 정치적인 야망이 둘 다 활발하게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봉건 영주들은 아직도 많은 도시에서 정치적인 배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아시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 성곽은 12세기에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로카 마죠레(Rocca Maggiore)라 불리던 봉건 성곽은 오늘날도 그 도시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귀족층은 아직도 지방 업무들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쯤에 가서는 새로운 계급, 즉 중간 계급이 사회에서 부상하게 되는데, 이 계급은 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아시시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귀족들이었던 ‘마요레스(majores)’ 혹은 ‘보니 호미네스(boni homines-선한 사람들)’들과 상인들이었던 ‘미노레스(minores)’ 혹은 ‘호미네스 포풀리(homines populi-대중)’의 구분이 분명하였다. 후자의 사람들인 미노레스들은 경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당시 귀족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구시대의 봉건 체제를 뒤엎고 ‘코무네(Commune-자치 행정부)’라고 불리었던 좀 더 민주적 형태의 정부로 바꾸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프란치스코는 사업상 프랑스를 자주 왕래하던 부유한 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실 피에트로는 프로방스 지방 출신인 부인 피카(Pica)가 프란치스코를 낳던 때에도 여행 중이었다. 피에트로는 자신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아기가 산 루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조반니(Giovanni, 요한)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에트로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작은 프랑스 사람)’로 바꾸었다.

 

산 루피노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아시시 위쪽 어느 귀족 집안에서 약 11년 후인 1193년(혹은 1194년)에 또 다른 여자아이 클라라가 태어난다. 그의 부모는 파바로네 디 오페르두치오(Favarone di Offreduccio)와 오르톨라나(Ortolana)였다. 클라라는 마요레스 계급에 속했고, 프란치스코는 미노레스 계급에 속했다.

 

 

시대적 배경

 

아시시 내에서의 긴장은 대략 1198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선출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대단한 정치가로 인정받고자 했고, 세상적인 일에서조차도 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였다. 그해 봄, 황제의 이름으로 로카 성을 관리하던 우르슬리겐(Urslingen)의 콘라드 백작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스플레토에 있는 공작령을 양도하기 위해 스플레토로 떠났다. 이때, 아시시의 시민들은 그가 없는 틈을 타 로카 성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 당시 프란치스코는 16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아시시가 자유로운 자치 행정부로서 독립을 얻어내고자 했던 이 사건에 참여했을 것이다. 시민과 귀족 사이의 시민전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클라라의 가족은 아시시보다 더 크고 강한 이웃 도시인 페루지아로 피신했다가 아마도 1203년경 아시시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바로 그해가 아시시의 마요레스와 미노레스 간의 평화조약이 맺어진 해이다.

 

1202년 페루지아로 피난을 갔던 아시시의 귀족들은 아시시의 시민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Collestrada)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아시시의 군인들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도 1년간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게도 부자인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생활을 통해 그의 건강은 매우 약해졌고, 1204년에는 거의 1년간을 병상에서 지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몸의 기운을 얻게 되자, 더 높은 이상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기사단에 들 수 있는 나이였다. 사실 그 당시 새롭게 생겨난 길을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오는 음유시인들은 기사도 정신을 노래하곤 하였다.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 명성과 더불어서 기사도의 낭만은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프란치스코도 예외가 아니었다. 1204년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목적으로 남부 이탈리아 풀리에(Puglie)로 출정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브린네의 월터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모험에 찬 출정은 단명이었다. 그다음 날, 스플레토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밤이 지나자(전기 작가들은 어떤 환시와 꿈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겠다) 그는 아시시로 되돌아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26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 역사 · 시대적 배경 


산 다미아노 십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말을 걸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린 프레스코 작품.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소장.

 

 

전쟁에 나가던 도중 집으로 도망쳐 온 꼴이 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의 이상은 산산이 부수어졌고, 그의 미래는 흐릿해졌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난감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려고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자신의 포목 가게를 도와 일을 하게 하면서 돈 버는 일에 집중하게 하였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는 프란치스코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게 해줄 손쉬운 방법이었을지는 몰라도, 프란치스코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답답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장사에 집중하기보다는 가게 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자기 성찰의 삶 중에 나환우를 만나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첫 번째 전쟁에 나가기 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다. 사실 첫 번째 전쟁 참전 전의 그의 삶은 자유분방하고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호화롭게 연회를 열며 보낸 날이 많았는데, 매번 그의 친구들은 그를 그들 축제의 왕으로 추대하곤 하였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아시시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쏘다니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러 나가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프란치스코는 이런 야단스러운 축제와 친구들과 어울림이 지겨워지기도 했고, 삶의 의미가 무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시시 변두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초기 전기작가들은 ‘회개’의 시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시기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1204년 말부터 1206년 1월까지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일종의 자기 성찰을 위한 집중 시기였다.

 

프란치스코는 한 이름 모를 친구와 함께 한적한 장소에 가기도 했고, 혼자서 동굴에 들어가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갔을 땐, 그는 완전히 멍한 모습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때로는 아시시 밑에 있는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가곤 하였는데, 거기에는 나환우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이렇게 아시시 아래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갔다가 어느 나환우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실제로 여러 전기가 전하는 바로는 프란치스코는 나환우를 무척이나 싫어하였다고 한다. 초기 전기 작가들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얼마나 꺼리었던지 거의 2마일 밖에서도 나환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때에도 그는 비록 그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에 의해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는 말에서 내려와 그 사람에게로 가서 돈을 쥐여주고는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틀어서 이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하였는데,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 기억을 떠올릴 정도였다.(유언 첫머리)

 

 

쓰러져가는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 매료

 

1205년 말에 가서는 또 다른 만남이 그를 전적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 만남은 아시시 아래쪽에 있는 쓰러져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 다미아노 성당은 한 가난하고 늙은 사제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사제는 너무 가난해서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십자가(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 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도 없을 정도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 매료되었다. 이 십자가는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성 클라라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천사들과 성인들이 둘러싸여 부활하시는 모습이 훨씬 더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눈은 크게 뜨여 있고, 비록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는 있지만, 그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십자가가 바로 프란치스코에게 말을 건넨 십자가이다.

 

 

아버지의 포목과 말 팔아 헌금 마련

 

전기 작가들은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그 오래된 교회를 “나의 교회”라고 하면서 프란치스코에게 그 교회를 수리하라는 부탁을 했다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젊은 사람의 예리한 눈에 쓰러져가던 그 성당이 긴급한 보수가 필요하다고 보였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의 보수를 위해 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포목을 꺼내 가지고는 폴리뇨의 시장에서 가서 그 포목을 죄다 팔았고 말까지도 팔아버렸다. 그는 여기서 번 돈을 들고 열정에 넘쳐 돌아와 그 성당의 사제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사제는 피에트로가 자기 아들이 근간에 저지른 이런 기이한 행동에 대해 개입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헌금을 신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헌금을 받는 대신 그 사제는 프란치스코의 열정을 진심으로 여겨 프란치스코에게 자신의 조력자인 ‘봉헌자’(oblate)로서 자신과 함께 참회의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9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 역사 · 시대적 배경


가진 것 모두 버리고 가장 가난한 ‘미노레스’가 되다

 

 

- 포르치운쿨라 성당 내부.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버지와 갈등을 드러나게 되었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하는 장사와 가문의 명성을 망칠 거라는 걸 확신하였다.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 수리를 위해 벽돌을 구걸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을뿐더러 거지들과 어울리면서까지 거지들에게 돈을 물 쓰듯 주어버리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카 부인은 프란치스코에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에트로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아버지 앞에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절연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가족의 재산에 대해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봉헌된 사람이었기에 직접적으로 주교의 권위 아래 있었다. 시의 집정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에트로는 아시시의 주교인 귀도(Guido)에게로 갔다.

 

프란치스코는 이제 이 어려움을 받아들였다. 재판은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에서 가까운 주교관 앞에서 열렸다. 귀도는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던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순명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피에트로는 당황한 채로 집에 돌아갔고,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얼마 동안 아시시를 떠나 살았다. 가는 길에 프란치스코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강도들에게 자신이 ‘위대한 왕의 사자’라고 말하였다. 그 강도들은 그를 어느 가난한 멍청이 정도로 생각하여 그를 눈구덩이에 던져 넣고는 떠났는데,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산 베레콘도(San Verecondo)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주방 봉사를 하며 지냈고, 그 후에는 굽비오에 있는 페데리코 스판달룽가(Federico Spandalunga)라는 친구의 집에서 일하였다. 그런 다음 그 근처의 한 나환우 공동체에 머물면서 나환우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1206년 여름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로 되돌아가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시시 시내로 들어가 벽돌과 음식물 찌꺼기를 구걸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는 그런 음식물 찌꺼기를 먹는 것이 역겨웠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그런 험난한 길을 배워 가야 했다. 그는 아시시에서의 진짜 ‘미노레스(minores-하층민)’가 상인들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외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부자 청년이었을 때에도 그는 가난한 거지들의 삶의 양식을 이해하고자 원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더욱더 강하게 체험하게 되면서 가난한 이와 동일화하고자 하는 원의는 더욱 커졌다. 그가 로마에 있는 사도들의 무덤으로 순례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어떤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그 거지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온종일 있었다.

 

 

산 다미아노 성당과 포르치운쿨라 수리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면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부드러운 프로방스 지방 방언으로 나지막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열정적으로 힘차게 일하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농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하였지만, 그가 젊은이다운 활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을 볼 때에는 아마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도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장차 젊고 우아한 여성들이 하느님을 섬기러 올 거룩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전기작가들은 이 말이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인들’(Povere Dame di San Damiano - 초기의 ‘가난한 클라라의 자매들’을 이렇게 불렀다)과 관련하여 한 예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짧은 시간 동안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성당들, 즉 성 베드로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즉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을 수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후에 이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운동(프란치스칸 운동)이 태동한 자리가 되었다. 이 성당은 아시시 아래쪽에 있는 움브리아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 성당을 숲 속에서 발견하였다. 이 성당은 수바시오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속해 있던 것이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곳의 수사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 작고 초라한 성당을 사용하게 해주리라 생각하고 자그맣고 초라한 이 성당의 수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부터 그 성당을 사용할 허락을 얻게 되었다. 바로 얼마 후, 그가 이 성당을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중 하나”라고 자기 형제들에게 소개할 만큼 그에게는 이 성당이 매우 사랑스러운 곳이 되었다. 1226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그는 그곳에서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

 

 

은수자의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논란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는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중에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나 지갑도 없이 사도들을 맨발로 설교하러 파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순회자 혹은 순례자가 되어, 그들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설교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기뻤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였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은수자의 허리띠를 벗어버리고, 타우(T) 모양으로 된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띠를 매고 맨발로 나갔다. 그는 회개하는 은수자의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장차 프란치스칸 운동을 도래케 한 이상이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16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2,0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