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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순결 - 순결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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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952

[행복을 찾아서 – 순결] 순결한 영혼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정갈한 밥상과 누구도 누워 보지 않은 깨끗한 침구는 마음마저 새롭게 한다. 방금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밭을 처음 걷는 기분,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 책을 펼칠 때의 정서다. 의학적으로 ‘청결함’이란 오염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심리적으로 ‘깨끗함’이란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할 때의 느낌을 말한다.

 

 

순결을 좋아하는 인간

 

사람은 모두 순결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주를 팔면서도 깨끗함을 강조하고, 과일을 팔면서도 햇과일임을 광고한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공장에서 여러 사람과 기계의 손을 탄 소주, 비료와 농약을 여러 번 받았을 과일이다. 풀잎 끝에 떨어지는 ‘이슬’과 묘하게 오버랩을 시킨다고 해서 소주가 순결할 리 없다. ‘처음처럼’ 마신다지만, 이내 처음과 달리 인사불성이 되어버린다.

 

순결의 의미는 간단하다. 혼인하기 전 성관계를 한 번도 맺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흔히 마음의 순결이나 때묻지 않은 영혼을 뜻하는 순결(Innocence)을 떠올리지만, 원래는 좀 더 노골적이다. 본질적으로 순결(Chastity)은 정조를 말한다. 결혼한 부부 사이 말고는 어떤 성관계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고 어울리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순결함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자신의 배우자가 순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만큼이나 강렬하다. 그 두 가지 모순이 만들어 내는 갈등은 관계를 종종 파탄으로 이끌게 된다.

 

 

성녀 콤플렉스

 

육감적인 이성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고귀하고 순결한 배우자를 기대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소망에 대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돈나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깊은 정욕을 품으면서 동시에 순결한 이성을 바라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실현 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빠진 남성은 바라지 않는 여성과 사랑을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여성을 바란다.”

 

프로이트는 남성을 지칭했지만, 사실 남녀 모두 똑같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는 양가적인 태도로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소망하는 무의식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인류학

 

인간은 아주 독특한 혼인 제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일부일처제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는 아주 독특하다. 오랫동안 같이 살고, 같이 키우며, 같이 늙어 간다.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제대로 키울 수 없다. 서로에게 충실한 배우자를 원하는 마음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순결한 대상을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십대 후반이면 대부분 혼인했다. 사춘기가 조금 지나면 짝을 만났는데, 따라서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혼인 이후에 다른 짝을 만나는 것은 결혼의 횡문화적 규칙, 곧 상호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혼인 이후에도 다른 이성과 만남을 허용하는 문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시대에 따라 순결의 본질적 가치가 바뀔 리는 없지만, 순결함이 가지는 의미는 바뀌었다. 순결을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이야 뭐라 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연 상대의 육체적 정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스스로 건강하게 만드는 일일까?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순결의 비극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타인의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왜 너는 성녀가 아니냐고, 왜 성자처럼 살지 않았냐고 나무라고 혼내는 것 말이다. 본인도 몹시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마돈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깊이 상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대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이러한 집착은 이내 의심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지난날을 캐내려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부정의 증거를 찾아 헤맨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상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간신히 짝을 찾았건만, 행복해야 할 삶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적 열등감과 억압된 성욕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투사된다. 순결하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동시에 마음속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증거를 찾아 헤맨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이아고는 말한다. “그러나 아내를 의심하며, 동시에 그 아내를 숭배하는 남자는 얼마나 불행한지요. 그는 의심스러운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돈나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이다. 유년기의 가장 완벽한 여성은 바로 어머니였지만, 사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의 아내였다. 최초의 여성에게 느낀 깊은 배신감은 성인기의 사랑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물론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아. 내가 그의(또는 그녀의) 첫사랑이 아니었다니.’ 상심은 우울로, 우울은 분노로, 분노는 복수로 이어진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집착하는 사람이 가끔 스스로 문란한 삶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순결의 의미

 

시대가 바뀌었으니 순결 같은 것은 철 지난 도덕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순결은 언제나 옳은 가치다.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다거나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로 대충 넘어가기는 곤란하다. 깨끗함과 순수함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시대가 지났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정조로서의 순결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애써 감추고 싶은 신경증적 방어에 불과하다. 순결을 강조하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순결하지 않은 자에게 돌을 들어 내리치라고 하던가? 순결하지 않은 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살금살금 뒤를 캐어 보라고 하던가?

 

의심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잘 믿는다. 그러니 잘 속기도 한다. 행복한 과거도 많겠지만,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슬픈 과거도 많을 것이다. 반면에 늘 의심하고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랑해 본 적도, 사랑받아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둘 가운데 누가 더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일까?

 

순결은 과연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적으로 가진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것이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적으로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행동이든 마음이든 그 순결함의 방향이 향하는 곳을 보는 것이다. 곧 내적 열등감과 관음증적 소망에서 비롯한 결벽증적 결과인지 또는 따뜻한 사랑과 온전함을 향한 건강한 의도의 결과인지 보는 것이다.

 

상대를 위한 마음에서 소담스럽게 차려진 정갈한 식탁과 포근한 잠자리를 위해 햇빛에 말리고 정성스럽게 빨아 정돈한 이부자리가 있다. 반대로 오염과 더러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겉만 깨끗하게 차려진 식탁과 결벽증적 의심과 불안에 휩싸여 소독과 세탁을 여러 번 한 침구가 있다. 과연 어떤 식탁에서 먹고, 어떤 침실에서 잠이 들고 싶은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할 듯하다.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무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7월호, 글 박한선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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