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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자 이도기 바오로의 거주지와 신앙 증거터 · 순교터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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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15 ㅣ No.1029

복자 이도기 바오로의 거주지와 신앙 증거터 · 순교터 고증

 

 

국문 초록

 

복자 이도기 바오로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1786년 무렵이었으며, 지금의 충청도 청양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그 이전이었다. 이도기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거주지는 청양 수단리(현 청양군 남양면 신왕1리)였고, 그의 탄생지는 수단리 혹은 그 인접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도기 바오로는 1791년의 신해박해 이전에 수단리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대여섯 차례 이주하면서 청양, 보령, 은진, 공주 등지에 거주하는 비신자들에게 천주 신앙을 전파하였고, 천주교를 매개로 여러 사람들과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의 을묘박해 이전에 정산의 비신자 옹기점에 정착하였다. 이 옹기점은 정산의 적곡면 낙지리(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에 있었을 것이다. 1797년 7월 31일, 이도기는 낙지리 옹기점에서 체포되어 그날 밤 정산으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에 순교할 때까지 여러 차례 혹형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가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낙지리 옹기점(2회), 정산 동헌(현 정산면 서정리의 면사무소, 8∼9회), 정산 치성장터 즉 치섬장터(현 정산면 역촌리 139∼163번지, 3회), 정산옥과 옥거리(현 정산면 서정리 120번지) 등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그가 장살로 순교한 장소는 정산 옥 밖이었음이 분명하다.

 

 

1. 머리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집전 아래 거행된 미사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시복 시성을 추진해 온 ‘하느님의 종’ 순교자 ‘윤치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시복되었다. 그중에는 1797년 이래 충청도에서 진행된 정사박해(丁巳迫害)1) 때 체포되어 그 이듬해 충청도 청양의 정산(定山)에서 순교한 이도기(李道起,2) 바오로, 1743∼1798)가 있다.

 

복자 이도기의 생애는 그가 순교한 직후에 전승 내용들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를 통해 알려져 왔다. 이후 그 전기는 박해기의 신자들에 의해 전사되었으며, 1854년에는 그 한글 전사본 가운데 하나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에 그는 이 전사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바랑(Barran) 신부에게 보낸 1855년 2월 22일 자 서한에 수록하였고, 그 내용의 앞뒤로 전사본의 입수 전말과 번역 사실들을 첨부하였다.3)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의 저술 《한국천주교회사》(1874년)에 수록된 이도기의 전기는4) 바로 다블뤼 주교의 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5)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뎡산일긔》(定山日記)도 이도기 전기의 전사본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 전사본의 표지에는 “K. K. Ryen-tchyen K. K. / 239, 921 도419 / G. Blanc / Fête de Noël(성탄절) 1882”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는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주교가 1882년 성탄절에 경기도 연천의 누군가로부터 이 전사본을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앞에 설명한 다블뤼 주교의 번역본과 블랑 주교가 입수한 이 전사본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문맥은 비슷하지만 다른 점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따라서 다블뤼 주교가 입수한 전사본과 블랑 주교가 입수한 전사본은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6)

 

한편 2005년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다블뤼 주교의 서한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고 각주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전사본)7)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전사본)8) 안에 수록되어 있는 관련 내용,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수록되어 있는 관련 내용과 원문을 첨부하여 이도기의 전기 자료로 소개하였다. 2011년에는 대전교구의 청양 다락골성지에서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 《뎡산일긔》를 알기 쉽게 번역하고, 여기에 주석과 해제, 원문을 첨부하여 간행하였다.

 

본고에서는 위의 전기 자료들을 바탕으로 복자 이도기 바오로의 신앙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9) 우선 그의 탄생지와 거주지, 체포 압송로를 확인해 보려고 하였다. 다음으로 정산에서 체포된 이후 순교할 때까지의 행적과 함께 신앙 증거터, 순교터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장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하였다.10) 이러한 장소들은 이도기의 생애를 밝히는 데 중요한 요소들일 뿐만 아니라 복자 공경 운동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순례지 조성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여기에서 밝혀지는 이도기의 생애는 청양 지역의 천주교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2. 이도기의 생애와 거주지 고증

 

이도기는 1743년(영조 19) 충청도 청양(靑陽)에서 태어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비록 배운 것은 없었을지라도 생활은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가 된 뒤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재산을 사용하여 점점 가난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대여섯 차례나 이주해야만 하였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이전이었을 것이다.11) 그는 이주 과정 끝에 정산의 비신자 옹기촌에 정착하여 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가 1795년의 을묘박해(乙卯迫害) 이전이었다. 그 후 이도기는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로 같은 해 7월에 체포되어 1798년 7월 24일 정산에서 장살로 순교하였다.12)

 

그러나 이도기의 전기에는 그의 고향은 물론 그가 천주 신앙을 접한 시기와 입교 시기, 그에게 천주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 이도기가 입교시킨 신자, 그가 이주해 살다가 체포된 정산의 옹기촌 이름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일부분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아울러 청양 지역의 초기 교회사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 청양 거주지 수단리

 

지금의 청양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적어도 1786년 이전이었다.13) 이는 옛 홍주목 흥구향면 월내동(月乃洞, 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거주하던 역인(驛人) 최말재(崔唜才)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 가운데 “15년 전(즉 1786년) 같은 마을에 살던 김복성(金福成 혹은 金卜星) · 복수(福守 혹은 福水) 형제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진술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14) 김복수는 일찍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게 수학한 신자였다.15) 따라서 1784년 말∼1785년 초 이존창에 의해 그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혹은 弧洞里, 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직후,16) 다시 말해 1786년 이전에 이존창과 김복성 · 김복수 형제들에 의해 청양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청양 지역의 천주교 전파는 ‘이존창 → 김복성 · 김복수 형제 → 최말재’라는 인맥을 통해 1786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1791년의 신해박해 이전까지 지금의 청양 지역에서는 김복성 형제, 최말재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실제로 1790년 12월부터 1792년 1월까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서한집인 《수기》(隨記)에는, 신해박해 과정에서 충청감영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도내의 천주교 신자 94명이 10개 고을에 걸쳐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홍주 월내동의 김복성 · 복수 형제 외에도 청양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 6명의 이름이 나온다.17)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거주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다.

 

이들과 함께 청양 지역에는 신해박해 과정에서 체포되지 않은 또 다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801년 홍주에서 유배형을 받은 이무명(복자 이태권 베드로의 부친)과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 형제가 홍주 배올(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배울)에서 태어나 1790년에 입교한 사실이 나타난다.18) 또 1794년에는 청양 저우니(Tsié-oun-i, 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출신인 황 바오로가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석방된 기록도 나온다.19)

 

〈그림 1〉 청양 일대의 천주교 신자 거주지(1915년 지도)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지금의 청양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의 거주지는 《노상추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다음의 〈표 1〉에 정리한 것과 같이 홍주목 흥구향면 월내동에는 김복성 · 김복수 형제, 최말재와 그의 아들인 최울금 · 득취 형제, 역인(驛人) 최동금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흥구향면 기부리(其夫里, 현 청양군 화성면 장계리의 저부리 · 吹笛里) · 수굴리(水掘里, 현 화성면 화강리의 물편이 · 龍崗)에는 역인 최흥성, 김봉현(아명은 岳只)20)이 살고 있었다. 또 청양현 남하면 수단리(현 청양군 남양면 신왕1리)에는 고일득과 그의 사돈인 김파남, 이흥일, 박성화, 이성원, 이원경 등이 살았으며, 고곱금의 거주지도 수단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청양의 정산현(현 청양군 정산면 일대)에는 손백손(孫白孫)이 살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볼 때 손백손의 당숙인 손희득(孫希得)도 정산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지금의 청양 지역인 홍주 월내동과 청양 수단리에는 1801년 이전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 즉 교우촌(敎友村)과 유사한 비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21) 앞에서 언급한 이무명과 이여삼(바오로) 형제가 홍주 배올에서 태어나 1790년에 입교한 사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조부인 최인주가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 홍주 다리골 즉 월내동의 경주 최씨 집성촌에 정착한 사실,22) 1801년 이후 교회 재건 운동을 도운 최신덕(마오로)과 복자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1840년의 홍주 순교자 최대종(요셉)이 홍주 다리골(월내동)에서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23) 등은 홍주 월내동에 형성되어 있던 신앙 공동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 복자 김대권(베드로)과 김화춘(야고보) 형제가 청양 수단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천주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은24) 수단리에 형성되어 있던 신앙 공동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중에서 청양 수단리와 정산에 거주하다가 체포된 신자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수단리로 이주했다는 점이다. 우선 박성화는 홍주 상전면(上田面, 현 청양군 남양면) 출신으로 홍산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수단리로 이주하였고, 홍주 상전면 출신인 이성원은 인접 마을인 수단리로 이주해 살았다. 또 이원경은 홍주 오사면(烏史面, 현 홍성군 장곡면) 출신으로 상전면을 거쳐 수단리로 이주한 것 같다.26) 그들이 이처럼 수단리로 이주한 이유, 천주교 입교와 이주 시기 등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천주교 신앙 공동체와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둘째, 청양 수단리와 정산에 거주하던 신자들은 통혼 관계와 교리 전수 관계를 매개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보령 청라면 장곡리(長谷里, 현 청라면 장산리의 장곡)에서 체포된 김성옥(金成玉)의 진술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김성옥은 이도기에게서 교리를 배운 신자였다.

 

(1801년 4월 23일) 장교 이옥동(李玉東)이 보령 청라면 장곡리의 사학죄인 김성옥을 잡아서 돌아왔다. 김성옥은 진술하기를 “애초에 정산의 장폐죄인 이도기에게 사학을 배웠는데, 이도기가 곧 사학의 교주로 이흥일 · 고곱금이 이도기에게 사학을 배웠다. 이성운(李成云)은 곧 (홍산의) 김원석(金元石) · 박천수(朴天守)와 함께 김복성에게 사학을 배웠다. 손백손은 그 종숙인 손희득에게 사학을 배웠다. 박성화는 그의 매부인 최대백에게 사학을 배웠다. 이원경은 누구에게 (사학을) 배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학의 괴수인 이도기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고, 또 손희득의 매부가 되므로 필시 손희득 · 이도기가 가르쳤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일득은 김파남의 딸이 며느리가 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 한다.”고 하였다. 고곱금은 아직 잡아들이지 못했고, 김성옥 · 고일득은 우선 도로 가두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곤장 10도를 치면서 깊이 캐물었지만 굳게 버티면서 자복하지 않았다.27)

 

위의 인용문을 바탕으로 〈표 1〉에 정리한 내용을 보면, 우선 수단리 김파남의 딸은 수단리 고일득의 며느리였고, 수단리 이원경은 이도기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으며, 정산 거주자로 추정되는 손희득의 매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손희득은 정산 손백손의 당숙이었다. 다음으로 교리 전수 관계를 보면, 이도기는 수단리의 이흥일 · 이원경과 수단리 거주자로 추정되는 고곱금, 수단리와 인접한 보령 장곡리의 김성옥에게 교리를 전한 것으로 나타난다.28)

 

셋째, 청양 수단리의 이성원은 홍주 월내동의 김복성에게 교리를 배웠고, 김복성의 형제인 김복수와 함께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석방된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29) 이는 월내동의 신앙 공동체와 수단리의 신앙 공동체가 일찍부터 교류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김복성 · 복수 형제가 1786년 이전에 입교하였고, 1786년 무렵에는 최말재 등 이웃에게 교리를 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미루어본다면, 월내동의 천주 신앙이 김복성 · 복수 형제에 의해 인접해 있던 수단리 이성원 등에게 전해졌으며, 그 시기는 1786년에서 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도기는 어떤 이유에서든 청양 수단리와 깊이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수단리에 거주하면서 혹은 수단리에 태어나 살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이흥일, 수단리(?)의 고곱금, 보령 장곡리의 김성옥에게 교리를 전수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수단리의 이원경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뒤 그와 사돈 관계를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홍주 상전면 출신으로 수단리로 이주해 살던 박성화가 1801년 2월에 체포된 뒤 “다만 이도기가 천주학 때문에 정산 옥중에서 죽은 사실을 이전에 들었을 뿐이다.”30)라고 진술한 점도 이도기의 수단리 거주 사실에 대한 방증 자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도기와 수단리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가 ‘1798년에 정산 옥중에서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수단리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추정한다면, 청양 수단리(신왕1리)는 이도기의 거주지인 동시에 그의 고향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적어도 그는 수단리 혹은 인접 마을에서 태어나 김복성 · 복수 형제가 천주 교리를 이웃에게 전하던 1786년 무렵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2) 정산 거주지 옹기촌과 체포 압송로

 

이도기는 수단리에서 살다가 전교를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는 동안 홍주의 이세채(李世采), 은진의 이상원(李尙元), 공주의 김선룡(金善龍)에게 천주 신앙을 전하였다.31) 물론 수단리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 이들에게 천주 교리를 전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이도기는 1795년의 을묘박해 이전에 정산의 비신자 옹기촌(혹은 이도기가 옹기점을 운영했던 옹기촌)32)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다. 이도기의 정산 이주 배경으로는 그의 먼 사돈이 되는 손희득과 손희득의 조카인 손백손의 역할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도기가 이주해 살았던 정산의 비신자 옹기촌이 지금의 어느 마을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존의 조사 기록에는 이도기의 전기 자료에 근거하여 그가 거주했던 정산의 옹기촌은 물론 경유지, 정산 관아까지의 체포 압송로를 추적한 내용이 나온다. 그 결과 이도기의 거주지 옹기촌, 경유지 주막(혹은 숯막), 목적지인 정산 관아로 이어지는 이도기의 압송로를, 첫째 ‘백곡리 → 역촌리 주막 → 정산 관아’, 둘째 ‘마치리 → 용두리 주막 → 정산 관아’, 셋째 ‘내초리⋅와촌리 → 덕성리(물안이고개) 주막 → 정산 관아’ 중에서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였다.33)

 

그러나 백곡리 · 마치리 · 내초리 등에 있었다는 옹기점은 지명 유래상으로 볼 때 천주교 박해시기부터 존재했던 마을 즉 이도기의 거주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전기 기록에는 포졸들이 1797년 7월 31일(음력 윤6월 8일)에 이도기를 그의 집에서 체포한 뒤, 그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숲으로 가서 문초와 형벌을 가하는 동안 ‘저녁이 되었고’(혹은 날이 이미 저물었고), 이어 함께 체포된 신자들과 함께 정산 관아로 압송하기 시작하여 한 주막(혹은 숯막)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다시 길을 떠나 ‘밤사이에’(혹은 날이 이미 어두워) 정산 관아 마을에 도착한 것으로 나온다.34) 이처럼 ‘저녁이 되었고’ 혹은 ‘밤사이에’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이도기의 거주지였던 옹기촌은 물론 압송로에 있었던 주막(혹은 숯막)과 정산 관아 사이는 제법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정산 관아에서 2km 이내에 있는 역촌리 · 용두리 · 덕성리 주막을 압송 과정에 지났던 경유지로 보기는 어렵다.

 

옛 정산현 지역에 있던 옹기점이 지금까지 마을 이름으로 전해져오는 곳은 단지 두 곳뿐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오래 전에 옹기촌으로 형성되어 마을 이름이 ‘점말’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이도기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그중 하나는 옛 정산현 적곡면 낙지리(현 장평면 낙지리)의 점촌(645번 국도 인접 마을)이요,35) 다른 하나는 옛 정산현 대박면 송학리(현 정산면 송학리)의 점골(일명 과목동, 아래솔치 안쪽마을)이다.36) 2014년 12월 30일에 답사한 결과 이 두 마을 가운데서 이도기가 포졸들에게 끌려가 ‘첫 문초와 형벌을 당했다는 동쪽 숲’은 찾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도기가 정산 관아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경유했다는 주막이 있던 장소도, 경유지마다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정확히 어느 주막을 말하는 것인지 단언하기 어려웠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1872년 지방도 중 〈정산현 지도〉에는, 앞의 낙지리 점촌이 속한 적곡면이 정산 관아에서 20리 거리, 뒤의 송학리 점골이 속한 대박면이 정산 관아에서 10리 거리로 나타난다. 또 낙지리 점촌은 1976년 지도에도 마을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전기 기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정산 관아에서 ‘제법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 옹기촌’이라는 거리 개념에서 본다면, 〈그림 2〉에 ‘정산 거주지 추정도-1’로 표시한 것과 같이 낙지리의 점촌이 이도기가 거주하다가 체포된 옹기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7) 그렇다면 이도기는 ‘적곡면(현 장평면) 낙지리 점촌→주막(혹은 숯막 : 미상)→정산 관아’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정산 관아로 압송되었을 것이다.38)

 

 

3. 이도기의 신앙 증거터와 순교터 고증

 

1) 신앙 증거와 순교 과정

 

이도기 바오로는 정산으로 압송되기 전에 이미 낙지리 점촌의 집에서 한 차례,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동쪽의 숲으로 끌려가 다시 한 차례 신앙을 증거하였다. 특히 동쪽 숲에서는 포졸들이 “누가 너를 가르쳤느냐? 네 동료들은 누구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저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제 동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정산 관아에 도착한 뒤 그곳 동헌으로 끌려가 정산 현감 앞에서 세 번째 문초를 받았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때 함께 체포된 신자 한 명만이 그와 함께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39)

 

이도기는 세 번째로 신앙을 증거한 뒤 이틀을 옥에 갇혔다가 1797년 8월 2일(음력 윤6월 10일) 다시 현감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천주교 신자들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가 아니며,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혼의 영광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읍에서 10리(혹은 5∼6리) 떨어져 있는 장터로 끌려가 회술레[回示, 조리돌림]를 당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날은 5일장40) 즉 음력 5일과 10일에 열리던 장날이었다.41)

 

다음 장날인 8월 7일(음력 윤6월 15일)에도 이도기와 동료 신자는 다시 한 번 장터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의 동료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으나, 이도기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후 이도기는 홀로 같은 해 가을과 성탄절에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1798년 새해가 된 후 이도기는 다시 한 번 정산 현감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나리께서 정산 고을을 다 주신다해도 저는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굳은 신심을 드러냈다. 그런 다음 4월에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5월에는 도망할 기회를 주었으나 이를 유혹으로 여겨 거절하고, 옥으로 찾아온 아내와 교우들에게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같은 5월에 다시 한 차례 형벌을 받은 그는 옥에 갇혀 신앙을 증거하였고, 이틀(혹은 수일) 후 현감 앞에서 다시 신앙을 증거하고 투옥되었다.

 

1798년 7월 15일(음력 6월 3일) 이도기는 옥으로 찾아온 아내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이 7월 22일(음력 6월 10일) 이후에는 ‘먹을 일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 현감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이튿날 옥으로 찾아온 아내와 교우들 앞에서 순교 원의를 다짐하였다. 그리고 7월 22일(음력 6월 10일) 장날에는 다시 장터로 끌려가 모진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다. 1797년 장터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지 약 1년 만이었다. 《정산일기》에는 이 날의 형벌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형틀에 동이고, (목에) 쓰인 칼을 앞에서 뒤로 미니 뒤의 빈틈이 있거늘, 곤장으로 그 틈을 끼우고 힘써 돌리니 목구멍이 긴히 막혀 호흡을 통치 못하는지라. 두 발을 큰 돌에 매고 머리털을 풀어 뒤에 매고, 관졸이 둘은 좌우에 서고 둘은 그 뒤에서 칼머리를 붙들고 결박한 새끼를 붙들고 진목능장(珍木稜杖 : 위에는 소리 나는 쇠를 박고, 아래에는 끝이 뾰족한 쇠를 박은 나무 몽둥이)으로 칠 때, 장(길이)이 두 자가 넘고 태(모양)는 세모진지라. 칠 때 엄형하니 예사 형장이 아니라 …. 또 일차를 치니 당일에 삼차를 맞은지라. 무릎 아래 난 다리뼈가 부러지고 부서져 골수가 흘러 떨어지는지라. 결박한 것을 푼 후에 땅에 엎어져 주검 같더라.

 

장터의 형벌 후 다시 투옥된 이도기는 7월 24일(음력 6월 12일) 저녁 정산 현감의 명에 따라 옥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런 다음 연속되는 포졸들의 모진 매질 가운데 옥 밖에서 순교하였으니,42)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순교한 뒤에도 포졸들은 그의 시신에 추형(追刑)을 가했는데, 전기 기록에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이미 죽은 시체를 난타하고, 한 관졸이 또 쓰인 칼 위에 올라 발로 구르니 칼머리 가슴에 닿아 살이 뚫어지고, 뼈가 부러져 피 흘러 시내가 되고, 그 얼굴은 다 으스러져 보기 어려운지라.”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현감의 명에 따라 낙지리 점촌 사람들이 옮겨가 소렴(小殮, 혹은 안장)했는데, 7∼8일 후 그의 순교 소식을 듣고 온 100리 밖의 신자가 시신을 옮겨가 자신의 집(혹은 어느 신자 집) 뒤에 안장했다고 한다.

 

2) 정산의 신앙 증거터와 순교터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도기 바오로가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대략 다섯 군데였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장소와 증거 회수는, 첫째 낙지리 점촌의 집 한 차례, 둘째 그 동쪽의 숲 한 차례, 셋째 정산 동헌 8∼9차례, 넷째 1797년 8월 2일(음 윤6월 10일)과 7일(음 윤6월 15일), 1798년 7월 22일(음 6월 10일) 등 정산 장터 세 차례, 다섯째 정산 옥과 옥거리 등이다. 이중에서도 정산 옥은 비록 신앙 증거 내용과 회수가 기록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도기가 1797년 7월 31일(음력 윤6월 8일)부터 다음해 7월 24일(6월 12일)까지 1년 동안 고통의 옥살이를 견디어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정산 장터는 이도기가 가장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장소로 묘사되고 있으며, 정산 옥 밖의 한 장소는 그의 순교터가 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도기의 신앙 증거터인 옛 정산 동헌은 지금의 정산면사무소 자리(현 정산면 서정리 496-1번지)에 있었다. 앞의 〈그림 3〉과 〈그림 4〉에 기록한 것처럼 규장각 소장의 1872년 정산현 지도에는 옛 정산 관아 중에서 동헌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으며, 대정 4년(1915)에 측도된 지도43)에는 현재의 정산면사무소 즉 옛 동헌의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청양군지》와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옛 정산현의 옥은 다음의 〈그림 5〉에 표시한 것과 같이 지금의 서정리 120번지(전, 763㎡ 230.8평)에 있었다.44) 그리고 120번지 일대 즉 그 남쪽의 서정리 123-1(도)에서 동쪽의 118-1(도)에 이르는 길(현 서정3길), 122-1번지(대)에서 118번지(대)에 이르는 골목길(현 서정5길)을 모두 옥거리로 불렀다고 한다.45) 물론 이도기가 약 1년 동안 고통의 옥살이를 겪으면서 신앙을 지켰던 옥사는 서정리 120번지 안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 현옥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옥 밖에 있었을 이도기의 순교터 또한 서정리 120번지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서정리 120번지를 이도기의 신앙 증거터요 순교터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신앙 증거터인 장터는 앞의 〈그림 3〉(규장각 소장의 1872년 정산현 지도)에 읍에서 5리 떨어진 곳 즉 치성천 서쪽이요 읍내천(서정천) 남쪽, 정산에서 공주로 가는 도로(현 36번 국도인 칠갑산로) 동쪽에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치성시(致城市, 현 정산면 역촌리)였음이 분명하다. 본래 치섬장터46)로 불리던 이 치성장터는 〈그림 4〉(1915년 지도)에도 치성천 남쪽에 ‘장터[場垈]’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서정리 9층 석탑에서 남동쪽 방향에 있다. 따라서 전승에 따른 장터의 위치와 1872년 지도상의 위치, 1915년 지도상의 위치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치성(섬)장터의 현재 위치는 정산면 역촌리 139번지(답)에서 144번지(답)를 거쳐 163번지(답)에 이르는 장소가 될 것이다.

 

 

4. 맺음말

 

지금의 청양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적어도 1786년 이전이었고, 그중에서도 홍주 월내동(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과 청양 수단리(현 남양면 신왕1리)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도기 바오로는 1786년 무렵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1791년의 신해박해 이전(추정)에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비신자들에게 천주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도기는 청양 수단리의 이흥일과 이원경, 그리고 수단리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곱금, 수단리와 인접한 장곡리의 김성옥에게 천주 신앙을 전하였고, 수단리의 이원경과는 사돈 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청양 수단리는 이도기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적어도 그는 수단리 혹은 인접 마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후에도 이도기는 홍주 · 은진 · 공주의 비신자들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였고, 대여섯 차례 이주한 끝에 정산의 비신자 옹기촌에 정착하였다. 1795년의 을묘박해 이전이었다.

 

1797년 7월 31일, 이도기는 집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그날 밤사이에(혹은 날이 어두워진 뒤) 정산 관아 마을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그의 거주지는 정산 관아에서 제법 떨어져 있고, 오래된 옹기촌으로 지금도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적곡면 낙지리의 점촌(현 장평면 낙지리)이나 대박면 송학리의 점골(현 정산면 송학리)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의 〈정산현 지도〉에는 낙지리 점촌이 정산 관아에서 20리 거리, 송학리 점골이 정산 관아에서 10리 거리로 나타나는데, 거리 개념상 낙지리의 점촌이 이도기가 거주하던 옹기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는 ‘적곡면(현 장평면) 낙지리 점촌 → 주막(혹은 숯막 : 미상) → 정산 관아’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정산 관아로 압송되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1년 뒤인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 정산 옥 밖으로 끌려 나가 매질 아래 순교할 때까지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한결같이 용덕을 잃지 않고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가 신앙을 증거한 장소와 증거 회수는, 첫째 낙지리 점촌의 집 한 차례, 둘째 그 동쪽의 숲 한 차례, 셋째 정산 동헌 8∼9차례, 넷째 정산 장터 세 차례, 다섯째 정산 옥과 옥거리 등이었다. 이중에서도 정산 옥은 비록 신앙 증거 내용과 회수가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가 1년 동안의 옥살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정산 장터는 그가 가장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장소였다.

 

이도기의 신앙 증거터인 옛 정산 동헌은 지금의 정산면사무소 자리(서정리 496-1번지)에 있었다. 다음으로 옛 정산현의 옥은 지금의 서정리 120번지(면적 : 763㎡ 230.8평)에 있었다. 아울러 옥터의 면적을 볼 때, 그가 1년 동안 신앙을 지켰던 옥사는 물론 옥 밖에 있었을 순교터 또한 이곳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정리 120번지는 이도기의 신앙 증거터인 동시에 순교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전기 기록에 ‘장터’로 나오는 장소도 이도기의 또 다른 신앙 증거터가 된다. 이 신앙 증거터는 1872년의 〈정산현 지도〉에 읍에서 5리 떨어진 곳으로 나오는 치성시 즉 치성장터로, 1915년 지도에는 장터[場垈]로만 표기되어 있다. 이 치성장터(일명 치섬장터)는 치성천 서쪽이요 읍내천(서정천) 남쪽, 정산에서 공주로 가는 도로(36번 국도) 동쪽에 있었는데, 현재의 정산면 역촌리 139번지(답)에서 144번지(답)를 거쳐 163번지(답)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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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이도기 바오로의 믿음살이〉, 《복자 이도기 바오로 순교 220주년 세미나》,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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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사박해는 정사년(1797) 윤6월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공주에 부임한 한용화(韓用和)가 도내의 모든 수령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한 명령에 따라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시작되었고, 다음해 7월 한용화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태영(李泰永)과 김이영(金履永)에게로 이어졌으며, 무오 · 기미년(1798∼1799년)에 가장 심하였다(이만채 편, 《벽위편》, 권4, 戊己兩年湖西治邪 ; 황사영, 〈백서〉, 6행).

 

2) 이도기의 한자 성명은 《사학징의》에 나오는 것을 따랐다(권1, 正法罪人秩, 各道罪人作配秩). 반면에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는 그 한자가 ‘李道己’로 표기되어 있다(《노상추일기》 권3, 신유 2월 19일).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1801년 1월부터 7월까지 홍주 영장을 지낸 인물이다.

 

3)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577, pp. 1137∼1147 ; 《다블뤼 문서 II : 다블뤼 주교의 공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64∼180쪽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5, 190∼227쪽. 이하 후자의 자료는 《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으로 약칭함.

 

4)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400∼410쪽.

 

5)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 과정〉, 《교회사연구》 3집, 1981, 122 · 136쪽.

 

6) 김정환, 〈정산일기 해제〉, 내포교회사연구소 역주, 《정산일기》, 청양 다락골성지, 2011, 32쪽. 전사본 표지에 쓰여진 ‘239, 921 도419’는 전사본의 도서 분류 번호로, 모리스 쿠랑은 이 전사본을 보고 그 서지 사항을 1894년에 출판된 《한국서지》에 수록하였다(같은 글, 33쪽).

 

7)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8)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9) 이도기의 신앙 생애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김정환, 〈이도기 바오로의 믿음살이〉, 《복자 이도기 바오로 순교 220주년 세미나》,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9, 23∼42쪽 참조.

 

10) 2008년에 이미 이도기의 체포 압송로 및 신앙 증거터, 순교터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일이 있었다(윤인규, 〈이도기 바오로 체포로 및 순교지〉, 조사일 : 2008년 6월 4일, 버드내 본당 카페). 윤인규 신부는 위의 내용이 2009년에 조사 완료되었다고 한다(2014년 11월 13일 전화 확인).

 

11) 이도기가 고향을 떠난 이유를 1791년의 신해박해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조광, 〈한 ‘민중 영웅’의 믿음살이 : 정산일기〉, 《경향잡지》, 1994. 9, 55쪽). 그러나 다음에 추정한 것과 같이 이도기는 1786년 무렵에 입교하는데, 입교 뒤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했다면 일찍부터 고향 인근에 그 이름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박해로 청양에서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다음의 각주 17번을 참조), 그는 박해 이전에 전교를 위해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12) 《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 191∼221쪽 ; 《정산일기》, 7∼28쪽. 후자의 기록에는 이도기가 정산에 정착한 뒤 ‘옹기점을 운영’한 것으로 나온다(같은 책, 7쪽).

 

13) 김성태, 〈청양 지역의 복음 전파와 다락골〉, 《제1회 청양 다락골성지 학술 세미나》, 2011, 8∼9쪽.

 

14)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8일, “崔唜才招內曰 矣身十五年前 爲同里金卜成卜守之所敎 以不知文字之故 口誦學習 而不過三月而止之” ; 김성태, 위의 글, 8쪽. 김복성은 한때 보령현의 역졸을 지냈다(《사학징의》 권1, 來關秩, 1801년 2월 25일). 한편 최말재는 신유박해 때 능주(綾州)에 도배된 것으로 나타난다(《사학징의》 권1, 各道罪人作配秩, 184쪽).

 

15) 《일성록》, 순조 을해(1815) 6월 19일. 김복수는 훗날 경상도 영양으로 이주했으며, 1815년의 을해박해 때 그 지역에서 체포되어 대구 중영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순교하였다(《순조실록》 권18, 15년 6월 18일 ; 《일성록》, 순조 을해 10월 21일).

 

16) 여사울의 신앙 공동체 형성에 대해서는,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 사회와 천주교》, 디자인 흐름, 2007, 52 · 62∼72쪽을 참조.

 

17) 박종악, 《수기》,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1791년 12월 11일 별지. 1791년 청양에서 체포된 신자 6명의 이름은 김광적(金光迪), 이광록(李光祿), 손사득(孫巳得), 오호선(吳好孫), 정수돌(鄭水乭), 현명철(玄明哲)이다.

 

18)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50, pp. 209~212 ;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pp. 155~156.

 

19) 《한국천주교회사》 상, 370쪽.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전사본)에는 황 바오로의 고향이 청양 ‘ouni’로 표기되어 있으며(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53),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원본(tome premier, p. 66)에는 청양 ‘Tsié-oun-i’로 나온다. 아마도 달레 신부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의 전사본이 아니라 원본을 보고 이렇게 표기했던 것 같고, 따라서 전사본의 ‘ouni’는 ‘Tsié-oun-i’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한편 《한국천주교회사》 역본(상, 370쪽)에서는 이를 청양 ‘제운’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저우니’의 잘못이다. 훗날 공주⋅금사리 본당의 연말 보고서에도 저우니(Tjie ouni 혹은 Tjie ou ny) 공소가 나온다(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1902∼1903년, 공주 파스키에 신부 ; 1903∼1904년, 홍산 공베르 신부). 황 바오로는 1813년 보령에서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20) 홍주 수굴리의 김봉현은 1815년 경상도 청송에서 체포된 김악지(金岳只 혹은 阿只)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일성록》. 순조 을해 6월 19일, 10월 18일). 한편 복자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1839)의 동생 김화춘(金若古排, 야고보, ?∼1816)은 청양 수단리에서 태어나 천주교에 입교한 뒤 보령 청라동(현 청라면 나원리)으로 이주했다가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해 살았는데(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39 ; 《일성록》, 순조 을해 6월 19일, 10월 18일, 병자 11월 8일), 김화춘의 이주 과정과 김악지의 이주 과정이 동일한 것으로 볼 때,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1) 차기진, 〈조선 후기 홍주 지역의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논총 ‘한국 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52쪽.

 

22) 최상종, 〈최양업 신부의 이력서〉 및 〈최우정의 이력서〉, 배티 사적지 편,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천주교 청주교구, 1997, 32⋅65쪽 ; 내포교회사연구소, 《청양 다락골 자료집》, 다락골성지, 2009, 53∼65쪽.

 

23)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14⋅232⋅502∼503.

 

24)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82 및 앞의 각주 19번 참조.

 

25)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6일∼7월 12일 ; 방상근, 〈18세기 말 내포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시론〉, 《한국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다자인흐름, 2010, 277∼278쪽 ; 김성태, 앞의 글, 7쪽.

 

26)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6⋅19일. 박성화는 1801년에 홍주 사람으로 창평(昌平)에 유배되었다고도 한다(《사학징의》 권1, 각도작배죄인질, 184쪽). 그러나 청양 수단리에 살다가 체포된 것이 분명하다.

 

27) 《노상추 일기》, 1801년 4월 23일, “將校李玉東 捉致保寧靑蘿面長谷里邪學罪人金成玉而還現 成玉招辭 則當初學邪於定山杖斃罪人李道己 道己卽其敎主也 李興一高䯩金學邪於道己 李成云則金元石朴天守學邪金福成 孫白孫學邪於其從叔希得 朴成化則學邪於其矣妹夫崔大白 李元京則不能的知其所學處 而邪魁道己之女爲其子婦 又爲孫希得之妹夫 必出於孫李兩漢所敎云 高日得與金巴男女爲子婦 而未知的實與否云 高䯩金姑未捉來 金成玉高日得姑爲還囚 其餘並決棍十度 窮問抵牢不服” 김성옥의 진술에 나온 김원석 · 박천수는 4월 24일 홍산에서 체포되었으나, 고곱금은 체포되지 않았다.

 

28) 《노상추 일기》, 1801년 4월 23일. 청양의 이원경과 보령의 김성옥이 이도기로부터 교리를 배운 사실은 다른 기록에도 나온다(《사학징의》 권1, 각도죄인작배질, 186쪽).

 

29)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9일, 3월 7일.

 

30)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9일, “只聞昔年李道己 以天主學 死於定山獄中.”

 

31) 《사학징의》 권1, 각도죄인작배질, 184∼187쪽.

 

32) 앞의 각주 11번 참조.

 

33) 윤인규, 〈이도기 바오로 체포로 및 순교지〉 참조. 

 

34) 《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 195쪽. 《정산일기》에는 주막이 아니라 숯막으로 나온다(같은

책, 10쪽).

 

35) 현지 조사 결과(2014년 12월 30일), 이 점촌은 마을 주민들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에 옹기점이 운영되었던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6) 한글학회 편,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 하), 한글학회, 378⋅396쪽. 현지에서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결과(2014년 12월 30일), 점골의 옹기점이 그렇게 오래 전에 형성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편 정산 지역에는 점촌과 점골 외에도 사기점 · 자기점 · 놋점 · 갓점 마을에 ‘점말’ 이름이 남아 있다.

 

37) 물론 송학리(아래솔치)의 점골(과목동)도 이도기가 이주해 살았던 옹기점 마을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882년 이래 충청도 지역을 순방한 두세(C. Doucet, 丁加彌, 가밀로) 신부의 1886년 기록에 보면 ‘솔치 공소’(신자수 17명)가 나오며, 1890년 이래 양촌 본당(현 합덕 본당의 전신) 주임으로 재임하던 퀴를리에(L. Curlier, 南一良, 레오) 신부의 1892년 기록에는 ‘솔치 공소의 신자들의 거의 이주해 버렸다.’고 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1886년, 두세 및 1892년 퀴를리에). 그러나 이들 신자가 당시로부터 100년 전에 솔치에 거주했던 신자들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38) 다만, 〈그림 2〉에 ‘정산 거주지 추정도-2’로 표시한 송학리의 점골도 이도기의 거주지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만일 이곳이 그의 거주지였다면 ‘송학리 점골→주막(혹은 숯막 : 미상)→정산 관아’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압송되었을 것이다.

 

39) 이도기의 신앙 증거와 순교 과정은 《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197∼221쪽)과 《정산일기》(10∼27쪽)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40) 이후의 전기 기록에서 볼 때 다블뤼 주교의 전기 기록에 나오는 10일장은 잘못임이 분명하다(《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 197쪽).

 

41) 《여지도서》 14, 충청도 보유. 정산 : 장시.

 

42) 《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 219쪽 ; 《정산일기》, 26∼27쪽. 다블뤼 주교는 훗날 《조선 순교사 비망기》(전사본)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전사본)을 작성하면서 이도기의 순교 장소를 ‘치성장터’로 보았다(《124위 시복 자료집 제1집》, 223⋅225쪽. 그러나 청양 수단리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된 박성화의 진술에 ‘이도기가 청양 옥중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이도기의 순교터는 치성장터보다는 정산 옥 밖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3) 종로도서관의 한국 근대 지도 자료(http://jongnolib.koreanhistory.or.kr/)에서 제공하는 위의 지도는 대정 4년에 측도되고, 대정 5년에 제판되어 대정 8년(1919)에 발행한 지도이다.

 

44) 청양문화원(http://cheongyang.cult21.or.kr)-청양의 문화-지명(《청양군지》, 1995) ; 한글학회 편, 앞의 책, 395쪽.

 

45) 윤인규, 〈이도기 바오로 체포로 및 순교지〉 참조. 이 조사 기록에는 서정리 120번지의 옛 옥터는 물론 옥거리 주변의 지번과 면적이 모두 지도와 도표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서정리 120번지가 本옥터, 119번지(대)가 東옥터, 119-2번지(대)가 南옥터로 설명되어 있다.

 

46) 치섬장터[箕島場垈]는 이 지역의 지형이 치성천과 공주로 가는 도로 때문에 치[箕] 모양의 섬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이곳의 본딧말이었던 것 같다. 이후 치섬장터는 치성시, 기도장대(箕島場垈), 치성장대(致城場垈) 혹은 광생리 동쪽에 있다고 해서 광생리 동장대라고도 하였다.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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