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회중석의 긴 등받이 의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6 ㅣ No.287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회중석의 긴 등받이 의자

 

 

성 이냐시오 성당(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사진 : 김광현.

 

 

바실리카 양식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이래 교회 건축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이렇게 말하면 과장이 아닐까 하고 의아해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회중석에 놓인 긴 등받이 의자였다.

 

회중석(nave)은 배를 뜻하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순례 여정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회중은 누구인가? 회중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공적인 전례를 위해 마련되는 회중석은 당연히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평신도에 대한 교회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예배는 영혼과 소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모든 감각과 함께 드리는 제사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창세 17,3). “들어가 몸을 굽혀 경배드리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시편 95,6).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말씀드렸다”(에즈 9,5).

 

이렇게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니 긴 의자가 열을 이루며 놓인 회중석이 어찌 조금이라도 제단이라는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는가?

 

 

긴 의자 없이 서고 무릎을 꿇었다

 

정교회의 성 시몬 수도원(아크할리, 조지아).

 

 

초기 교회에서는 미사를 거행하는 동안 사제나 평신도는 고정된 의자가 없이 대부분 서있었고, 성당의 맨바닥에 무릎을 꿇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회중이 어떻게 편안하게 미사를 드릴 수 있을지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신자들은 약간 걸어 다닐 수는 있어도 앉지는 못했다. 중세 후기인 14세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벽을 따라 돌의자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런 의자는 아프거나 연로한 신자들이 사용했다. 15세기에 이르러 성당의 수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등받이가 없는 벤치나 의자를 부분적으로 놓았다.

 

개신교의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당에 고정된 긴 의자를 두지 않았다. 개신교에서는 긴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으므로 반드시 긴 의자를 두어야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16세기에는 미사의 중심으로 강론을 강조하게 되었고, 강론을 집중해서 들으려고 회중석에 높은 등받이와 장궤틀이 있는 긴 나무 의자를 두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회중이 앉는 등받이가 있는 긴 의자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상 가장 과감하고 중요한 변화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전례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방정교회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처럼 신자들이 앉는 의자가 없다.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 신자들은 두 시간가량 걸리는 전례 내내 회중석에 서있어야 한다(다만 한국의 정교회는 지역적 배려에 따라 의자를 배치한다). 예배 중에는 여기저기 걸어다니거나 제대를 등지고 서있으면 안 된다. 아픈 사람만 회중석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다.

 

정교회에서는 긴 의자가 제대를 수동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성당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전통적인 느낌을 해친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정교회에서는 성당에 긴 의자를 놓아 성당이 교실이나 강의실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하느님에 ‘관한’ 의식인 전례가 하느님‘의’ 의식이 아니게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전례는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전례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올리는 공적인 예배다. 전례는 사제는 제단에서, 평신도는 회중석에서 모두 자기의 역할을 가지고 하느님께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사제에게는 사제가 따라야 할 규칙이 있듯이, 평신도에게도 평신도로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주교좌성당 안에는 주교가 앉는 ‘카테드라(cathedra)’라는 의자가 있다. 이 의자는 주교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례 사제는 ‘세딜리아(sedilia)’라는 자리에 앉는다. 마찬가지로 평신도는 회중석에 앉는다. 회중석(會衆席)의 ‘석’은 등받이가 달린 고정식 긴 의자를 말하는데, 영어로 ‘pews’라고 한다. 이 의자에는 장궤틀이 붙어있다. 전통적으로 성당의 내부공간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제대를 향해 한 방향으로 놓이면서 중랑(中廊)을 이룬다.

 

 

긴 의자는 전례를 몸으로 표현하는 자리

 

평신도는 이 의자에서 앉거나 일어서며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뉘우치고 성가를 부른다. 또 이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거나 십자성호를 긋거나 두 손바닥을 모으거나 조용히 침묵하기도 한다. 평신도에게 이 자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몸으로 표현하는 곳이며, 성당의 공간과 전례와 신앙 공동체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끼는 자리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입장하거나 퇴장할 때에는 모두 일어선다. 사제나 부제가 복음을 읽을 때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므로 모두 일어서서 듣는다. 선다는 것은 존경과 영예를 드리는 것이고, 하느님 앞에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기호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거나 영성체 뒤 우리에게 오신 주님과 침묵 중에 대화하며 기도하고 조용히 기다릴 때는 앉는다. 편히 쉬려고 앉는 것이 아니다.

 

극도의 숭배와 탄원과 참회를 간절하고 겸손하게 나타낼 때는 무릎을 꿇는다. 방어하지 않고 열린 상태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흠숭하고 탄원하는 가장 뚜렷한 가톨릭 신자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초기 교부들은 무릎 꿇기가 기도와 예배와 같다고 여겼다. 회중석의 긴 의자에 붙은 장궤틀은 이러한 자세를 위한 것이다. 요즘에는 미사 때 무릎 꿇는 부분이 대부분 서는 자세로 바뀌었지만,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경배 자세는 무릎 꿇기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면서 움직이기에 불편한 등받이가 있는 긴 나무 의자 대신 받침방석이 있는 편안한 의자를 극장처럼 배열하는 것은 참으로 전례와 공간의 관계를 무시한 것이다. 공간을 융통성 있게 사용하겠다고 쌓아둘 수 있는 이동식 의자를 성당 안에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집을 기능과 효율로 바라보겠다는 것인데, 이런 의자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드높이기가 쉽지 않다.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 “신자들의 자리는 신자들이 거룩한 전례에 몸과 마음으로 올바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정성껏 마련해야 한다. 신자들의 자리에는 원칙으로 장궤틀 또는 의자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311항)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같은 지침서의 같은 항에는 “그러나 어느 특정인을 위한 지정석은 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덧붙어 있다. 왜 이렇게 언급했을까? 그것은 교회가 모두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충분히 둘 수 없어서 16세기 말부터 교회의 허락을 받거나 비용을 내면 특정한 자리를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교회에 물질적인 도움을 준 이와 그의 가족에게는 성당 안의 강론대에 가까운 곳에 의자를 할당하고 칸막이를 쳤다. 이것을 ‘pew box’(박스 칸막이의 회중석)라고 한다. 이 칸막이를 친 의자는 돈을 받고 빌려주기도 했다. 성당 안의 자리를 특권화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교회의 역사가 회중석에 반영되어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 이냐시오 성당(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사진 : 김광현.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올바른 회중석의 모습일까? 뵘이 설계한 성 이냐시오 성당의 긴 의자는 이에 대한 성실한 대답이다. 등받이 판 대신에 굵직한 나무로 길게 가로지른다. 등받이가 없는 소박한 긴 의자와 같은 느낌이다. 두툼하게 만든 엉덩받이에 의자의 옆면도 판으로 막지 않고 오히려 바깥으로 마구리를 길게 빼내어서 소박한 수도원의 의자처럼 보인다. 장궤틀도 마찬가지다.

 

가로지른 나무도 성가책이나 기도서를 놓을 수 있는 최소의 폭으로 잘려져 있다. 그 밑에는 가방을 걸 수 있게 나무못이 박혀있다. 그렇게 만든 의자를 배열한 결과, 뒤에서 보면 의자의 옆면이 중랑을 가로막지 않고 시선이 곧바로 제대를 향하게 된다. 게다가 회중석이 낮게 느껴져서 마치 천막처럼 가볍게 표현한 천장을 향해 마음이 드높여진다.

 

자, 이런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면적을 아끼겠다고 이 의자에서 장궤틀을 없애보라.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별생각 없이 등받이를 판으로 만들고 의자 옆면도 판으로 막아보라. 의자가 성당 바닥의 주인처럼 보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리를 더 만들겠다고 중랑을 좁혀 보라. 제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을 것이다. 긴 의자는 바닥을 점유한다고 아예 한 사람씩 앉는 의자로 다 바꾸어 보라. 그러면 그 순간 하느님의 집은 단숨에 회합장으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성당에서 회중석의 긴 의자는 이처럼 중요하다.

 

* 김광현 안드레아 - 건축가. 서울대교구 반포본당 교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전주교구 천호성지 내 천호부활성당과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 성바오로딸수도회 사도의 모후 집 등을 설계하였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김광현 안드레아]



6,37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