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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장우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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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6 ㅣ No.59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9) 장우성 요셉 (상)


아흔 넘어 늦깎이 신자가 된 장우성 화백

 

 

- 수환 추기경이 장우성 화백에게 세례를 주며 축성 성유로 이마에 십자 성호를 새기고 있다.

 

 

아흔이 넘은 장우성(요셉, 張遇聖, 1912~2005)은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성당까지 가기엔 거동이 불편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삼청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장우성은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장우성이 가톨릭 신자가 된 배경에는 서울대 미대 동료 교수이며 학장이었던 장발 루도비코의 권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가톨릭 신자였던 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장우성은 “마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화를 그리며 하느님과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더욱 깊이 있는 삶을 살게 돼 기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교황이 아끼던 병풍화

 

장우성이 가톨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매우 오래됐다. 그는 1949년 교황청이 주관한 ‘국제성화 미술전’에 한국 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3부작 성화를 출품했다. 많은 공을 들여 완성한 작품이었다. 출품은 장발 루도비코 학장과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3부작 중 가운데 그림은 한복 입은 성모님이 한 손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린 요한 세례자의 손을 잡은 다정한 모습이고, 왼쪽 그림은 한국의 여성 순교자 3인(강완숙 골룸바,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오른쪽 그림은 한국의 남성 순교자 3인(남종삼 요한, 김대건 안드레아, 유대철 베드로)의 모습이다.

 

‘한국의 성모와 순교 복자’를 계기로 장우성은 한국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신부는 “장우성은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한국 교회 미술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살린 작품을 선보이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고, 예술을 통해 신앙을 전한 인물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장우성은  비오 12세 교황의 팔십 세 송수축하(頌壽祝賀) 병풍화를 그렸다. 병풍화는 비단과 은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 바티칸으로 보냈다.

 

장우성은 교황의 반응이 궁금했다. 병풍화를 바티칸으로 보낸 한참 후에야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노 대주교는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왔다며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했다. 교황께서 “한국에 돌아가면 병풍화를 그려준 화가를 만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침대 옆에 펴놓고 늘 보고 있다’고 꼭 전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을 전해 들은 장우성은 무척이나 기뻤다.

 

또한, 장우성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최한 ‘성화 전람회’에 ‘성모자상’을 출품했고, 성 라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가 주최한 ‘노약자·불구자·나환자 양로원 건립기금 마련 도서화전(陶書畵展)’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장우성 작 ‘한국의 성모자와 순교복자'

 

 

포기 모르는 화가

 

장우성의 조상은 대대로 한학자였다. 집에는 한문 서적이 수천 권이나 쌓여있었다. 위로는 누이가 네 명이 있었고 장우성은 다섯 번째 맏아들로 태어났다.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무척이나 엄했다. 부친 앞에만 서면 두 다리가 벌벌 떨렸을 정도였다. 그러한 부친 앞에서 재롱 한 번 부려본 적이 없었다. 부친은 배일사상이 무척 강했다. 일제의 단발령에 저항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그런 사상을 가졌기에 자식들을 일본인이 지은 신식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집에서 한학을 가르치며 한학자가 되길 원했다.

 

장우성은 다섯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한문 공부만 했다. 그때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다 떼었다. 그런데 장우성은 한문보다는 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사군자나 노안(蘆雁)을 그린 문인화가 그렇게 좋았다. 그림이나 글씨를 보면 그대로 따라 쓰고 그렸다. 한 번은 미인도를 그렸는데 사람들은 똑같이 그린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지관이 “몇십 년 뒤에 이 집안에서 유명한 서화가가 나올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결국, 한문 공부를 병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림 공부를 허락했다.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한학은 당시 최고 한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배웠다. 그림은 당대 최고 화가인 이당 김은호에게 배웠다. 이당 화숙에는 평생 친구로 지냈던 운보 김기창이 있었다. 글씨 역시 최고 서예가인 성당 김돈희에게 배웠다.

 

그림 공부한 지 1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초입선했다. 그다음 해에는 ‘서화협회전’에서 글씨로 입선했다. ‘선전’과 ‘협전’ 두 곳에서 글씨와 그림으로 나란히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선전’에 초입선한 작품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를 그린 대작 ‘해빈소견(海濱所見)’이었다. 장우성은 갈매기를 본 적이 없었다. 갈매기를 그리기 위해 창경원 동물원을 찾아갔다. 손끝이 얼어붙는 엄동설한에 갈매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스케치했다. 장우성은 부친을 닮아 뭐든지 하나를 붙들면 포기하지 않았다.

 

장우성이 ‘월전(月田)’이란 아호를 쓰게 된 까닭이 있다. 하루는 부친이 장우성의 작품에 찍힌 낙관을 보고는 신통치 못하니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그러면서 ‘월전(月田)’이란 호를 내려주었다. 부친은 “달(月)은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비춰 주는 광명을 가졌고, 그 빛은 정감에 넘쳐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반갑기에 좋고, 밭(田)은 펼쳐진 넓은 들녘이며, 우리 마을 이름인 ‘絲田’(사전)에도 ‘田’이 들어있으니 달(月)과 밭(田)을 함께 쓰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장우성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했다. 달빛이 흘러내리는 뒷산 봉우리를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바라보기가 일쑤였고, 달 밝은 밤이면 비단옷을 입고 거닐거나 숲 속이나 시골 길을 혼자서 걷곤 했다. 작품도 달을 소재로 많이 그렸으며, ‘명월전신(明月前身)’이란 인장도 새겨 사용할 정도로 달을 사랑했다.

 

 

마음으로 우주를 그리는 사람

 

장우성은 ‘그림이라고 다 예술품일 수 없고, 화가라고 다 예술가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란 ‘마음으로 우주를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술은 손끝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교양과 수련을 토대로 한 정신의 표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술가란 기술공이 아니고 원숙한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양과 철학이 쌓여야 비로소 참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말이 있다. 바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이다. 장우성은 이 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뜻은 ‘그림 그리는 일은 맑고 깨끗한 정신적 바탕이 있은 후에 한다’로 「논어」에 들어있는 말이다. 장우성은 그림에서 정신이 무척 중요하다고 하며 자신의 예술철학을 밝혔다.

 

“동양화는 붓을 들기 이전에 정신의 자세가 중요하다. 물체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면을 관조하여 자기의 심상을 표현한다. 선은 함축을 지닌 점의 연장이다. 그리고 공간은 백지가 아닌 여운의 세계다. 먹빛 속에는 요약된 많은 색채가 압축되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테두리 밖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장우성은 꽃이나 새 등의 자연을 많이 그렸다. 젊었을 때는 인물화를 그렸으나 사람의 얼굴은 세월에 따라 복잡하게 변해 염증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라 자연을 많이 그렸다. 그가 즐겨 그린 새는 학, 백로, 까마귀였다. 학은 가장 좋아했던 새로, 몸이 희고 머리에 단정(丹頂)이 곱고 자리가 훤칠하여 외모가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이 장우성의 모습이 학과 닮았다고 해서 더욱 좋아했다. 장우성은 세속을 벗어난 고귀한 경지와 상서로운 기분을 표현할 때 학을 그렸다. 그리고 백로는 몸 전체가 순백이고 형태와 성격이 학과 비슷해서 좋아했다. 또한, 까마귀는 예부터 흉한 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렸다. 이유는 까마귀가 흉한 일을 경계하라고 예고하는 길조(吉鳥)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5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0) 장우성 요셉 (하)


무수한 위인 초상화 남긴 한국 화단의 거목

 

 

-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자화상.

 

 

비에 엉망이 된 그림

 

장우성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때를 든다면 ‘선전’에서 연속적으로 네 번 특선하고 추천작가가 되었을 때라고 했다. 당시 민족적 색채가 짙었던 순수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있었다. 서화협회는 고희동, 안중식, 오세창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일제는 서화협회를 흡수하기 위해 ‘선전’을 만들었다.

 

서화협회 회원들은 ‘선전’ 참가를 거부했다. 장우성도 서화협회 회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전’에 대한 민족 감정도 흐려졌다. 장우성은 '선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앞서 설명한 대로 네 번 연속 특선하고 추천 작가가 되었다. 특선은 일석, 이석, 삼석으로 구분했는데 일석은 ‘창덕궁상’, 이석은 ‘총독상’, 삼석은 ‘정무총감상’으로 불렸다. 장우성은 ‘푸른 전복(戰服)’, ‘청춘일기’, ‘화실’, ‘기(祈)’로 특선을 받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를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유난히 시국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다. 산수화를 그려도 군인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넣어야 했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 넣어야 했다. 일제는 장우성을 초대작가로 위촉하고 작품을 출품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장우성은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護國佛)이었던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를 그렸다. 작품은 무척 커서 버스에 실리지 않아 트럭에 싣고 서울로 왔다. 그런데 운반 도중에 비가 많이 내려 그림이 엉망 되었다. 도저히 전시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정을 글로 써서 출품 불가 사유를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했다. 미술대학 초대 학장으로 장발이 임명되었다. 장발의 부탁으로 장우성은 동양화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장우성은 후에 서울대를 그만두고 홍익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술학부장을 맡았다. 그 뒤로 국전 심사위원과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5·16 민족상 수상, 금관문화훈장 수상,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다.

 

- 장우성 작 '이충무공 영정', 아산 현충사 소장.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영정

 

장우성은 우리나라 위인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가장 힘들게 그린 작품은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과 행주산성 충장사의 권율 장군 영정이었다. 충무공 영정은 충무공기념사업회의 회장이 의뢰했다.

 

당시 현충사에는 청전 이상범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낡았으며, 크기도 작았다. 충무공이 손에 지휘봉을 쥐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퇴색해서 얼룩덜룩했다. 그래서 충무공 영정을 새롭게 장우성에게 의뢰한 것이다. 장우성은 쾌히 승낙하고 충무공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충무공전서」와 「징비록」을 읽기 시작했다. 육당 최남선을 만나 충무공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온양 현충사에 내려가 충무공 후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오랜 시간 작업 끝에 충무공 영정이 완성되었다.

 

또한, 장우성은 낙성대 안국사의 강감찬 장군, 경주 남산 통일전의 김유신 장군, 중국 산동성 법화원의 장보고 장군, 포은 정몽주, 의병장 사명대사,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 문익점, 다산 정약용, 3·1 운동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수많은 인물의 영정을 그렸다.

 

장우성이 그린 대형작품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의 ‘집현전 학사도’, 고려대학교 도서관 벽화 ‘군록도(群鹿圖)’, 국회의사당의 ‘백두산 천지도’가 있다. ‘백두산 천지도’에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당시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국회 사무총장이 장우성에게 국회의사당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 국회 벽면의 크기는 길이 7m, 높이 2m였다. 장우성은 통일을 대비한 전민족적인 국회의사당의 이미지를 그려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백두산 천지 그림이었다.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백두산을 등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백두산 흑백사진도 구했다. 그리고 남북회담 때 평양을 다녀온 사람이 갖고 있던 백두산 천지 천연색 사진도 보았다. 그림이 워낙 커서 홍익대 강의실 한 개를 통째로 빌어 제작했다. 꼬박 다섯 달 동안 작품을 완성했다.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백두산 천지도’는 장우성의 평생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회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임이 틀림없다. 세상에 이렇게 맑고 티 없고 큰 그림이 또 있을까. 천부(天賦)의 재(才)와 노심각고(勞心刻苦)의 산물이며 작가 월전의 정진과 노력, 청순불염(淸純不染)의 인품과 예술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고 찬탄했다.

 

장우성은 한국 화단을 위해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을 세우고 장우성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에 정원이 있는 월전미술관(寒碧園)을 건립했다. ‘한벽원’이란 이름은 “대나무같이 맑고 차며, 물빛처럼 투명하고 푸르다(竹色淸寒 水光澄碧)”라는 시구에서 가져왔다.

 

장우성은 자신의 얼이 담긴 작품들과 애장품 등 총 1532점을 고향 이천에 기부했다. 이천시는 이러한 장우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봉산 자락에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건립했다.

 

- 월전 장우성은 2005년 2월 28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이 장 화백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며 장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미사는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미사에서 유족들은 장우성의 유언에 따라 소장했던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귀한 인장 한 점을 봉헌했다.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이날 미사는 아들 장학구(도미니코), 딸 정란(베로니카), 성란(소피아), 혜란(크리스티나) 등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딸 장정란(가톨릭대 교수)은 “유명한 인장 수집가이기도 했던 아버님은 정약현과 약전·약용·약종, 그들의 아버지인 정재원 등 정씨 일가의 인장 다수를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정약종의 인장은 단 하나뿐으로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순교자의 위상과 유품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아시고 교회에 봉헌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라고 밝혔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 형이며 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이다. 초대 조선 천주교회장을 지냈고 가톨릭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 복자로 추대되었다.

 

이렇듯 장우성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큰 가치가 담긴 인장을 교회에 봉헌한 것이었다.

 

“월전은 언제 보나 그의 ‘집현전 학사도’에 나오는 단아한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시서화를 겸비한 전통적인 작가는 월전이 유일이고 월전으로서 아마 마지막이 될 것이다.”(김원룡)

 

“월전 장우성은 화단의 백학이요, 텍스트적인 존재다.”(김동리)

 

참고자료 : ▲ 장우성. 월전 회고 80년사. 호암미술관. 1994. ▲ 장우성. 月田 張遇聖. 지식산업사. 1981. ▲ 장우성. 畵脈人脈. 중앙일보사. 1982. ▲ 장우성. 月田隨想. 열화당. 2011. ▲ 가톨릭신문 2004.9.19., 2005.3.13., 2009.5.24.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1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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