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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19-20: 선교와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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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19 ㅣ No.749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9) 선교와 시노달리타스 (상)


보편적 형제애 위한 복음 선포 “교회 울타리 넘어 세상 밖으로”

 

 

-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로 선교사명을 다했던 성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탄생’의 한 장면. 민영화사 제공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 2018년 발간한 문헌 제목은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La sinodalità nella vita e nella missione della Chiesa)」이다. 문헌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으로 ‘사명(mission)’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신학적 성찰이나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극히 미비하다는 현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과연 교회의 삶을 선교사명과 분리하여 논의할 수 있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순례하는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며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삶이라는 차원 역시도 선교적이어야만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교회를 제대로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를 말하면서도 선교에 관심을 두지 않고 기피하는 듯한 이러한 교회 현실과 달리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내부(ad intra)를 향해 또한 교회 밖(ad extra)을 향해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을 촉발하고 있다.

 

 

선교하는 제자인 ‘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제자들에게 단 하나의 사명만을 맡겨주셨다. “아버지께서 […] 하라고 맡기신”(요한 17,4) 바로 그 일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똑같이 맡겨주셨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는 교회에 있어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는 특별한 관심과 흥미를 지닌 특이한 개인이 참여하거나 특정 단체에 할당된 의무처럼 여겨졌다. 반면 시노달리타스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본성 즉 주체성을 부여받았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행사하는 주체성은 비단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생활과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ad extra), 세상으로 나가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도 기대하시는 바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 구원을 받게”(요한 3,17)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된 모든 신자는 받은 은사와 직무가 다르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이 단 하나의 사명에 부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들끼리 함께 머물러 있기보다는 사람들을 향해 나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하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직책이 무엇이든,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선교하는 제자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이다.

 

 

우리는 선교하는 제자들

 

또한 시노달리타스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서 명확한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선교는 언제나 ‘나’라는 유능한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활동으로 표현된다. 이방인의 개종에 있어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도 바오로조차 혼자서 활동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다. 이는 교회가 선교활동을 수행할 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모습이다. 바로 세례받은 ‘우리’ 모두가 여정의 동반자이며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함께 참여하도록 불림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기에 자기 밖으로 또한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파견됐다.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는 선교에 있어 ‘나’에서 ‘우리’로 시점의 확장과 전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유한 ‘나’의 모습이 존중받고 다양성이 공존하며 하나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시는 성령의 힘으로 일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적 ‘우리’는 선교적이기에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 교회 담장을 넘어 밖으로 확장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선교적 차원의 역동성은 보편적 형제애를 지향한다고 가르친다.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는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요청에 응답하며 모든 이들을 여정의 동반자로 인정하며 대화하고 만나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리고 선교에서도 같은 모습을 이루기를 촉구한다. 타종교의 신자들과 세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경청하고 대화하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한다.

 

 

복음, 교회와 세상의 기쁜 소식

 

가라지의 씨앗이 아닌 복음의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결코 교회의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시대는 세속주의의 현상과 상대주의에 잠식된 채 보편적 가치가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 주관성, 과학 문물과 기술의 발전에 바탕을 두고 변화하는 시대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세계관에 대한 전통적 이념과 종교적 관념과 규범 등을 쓸모없거나 시대에 뒤떨어져 도태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이러한 시대 현실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선교는 자칫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게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선포해야 하는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복음’이라고 불리지 않고 세상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세상의 상황과 현실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실제로 복음은 구체적인 상황, 그리고 고유한 문화와 사회 안에서 육화되어 이해될 때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된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이를 듣는 이들의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주어야 비로소 생명을 주는 구원과 해방의 말씀이 된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복음의 빛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사회에 헌신하며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17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대전교구 한산본당 주임)]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20) 선교와 시노달리타스 (하)


적극 다가서며 초대하는 형제애로 복음의 열매 풍성하게 맺자

 

 

몽골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 4일 울란바토르 ‘자비의 집’ 축복에 앞서 한 어린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CNS

 

 

시노달리타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고백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교회의 구성적 차원이다. 이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루려는 것이다. 개념적이고 관념적으로 교회에 대한 신학을 재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삶과 사명’이라는 구체적인 실제 안에서 완성해 가는 교회의 본성이다. 그래서 시노달리타스는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modus vivendi et operandi)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일치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한 교회를 건설하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가리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따라 선교하는 교회이자 ‘나가는’ 교회라고 말한다. 바로 야전병원이 되는 교회,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교회, 문이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 오늘날의 사람들, 특별히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가는 교회이다. 시노드적 회심을 통해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교회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가는 교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실에서 벗어나 시노달리타스의 회심을 위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기 위해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나가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24항을 통해 ‘나가는’ 교회가 다섯 가지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고, 기뻐한다. 선교하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나가는 교회는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고 멀어진 이들을 찾고 버림받은 이들을 초대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렇게 내디딘 첫걸음은 이제 거리를 좁히고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의 삶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기나긴 길이라 할지라도 기다리고 인내하며 발을 맞추어 ‘함께 간다.’ 그리고 말씀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현되고 새 생명이 ‘열매 맺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함께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기뻐한다.’

 

이처럼 나가는 교회는 기다리기보다 담대함으로 먼저 첫걸음을 내디뎌 그 여정에 전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걷도록 초대하고, 함께하며 복음의 열매를 맺어가고 그 열매로 함께 기쁨을 나눈다. 서로 만나고, 환대하고 지지하고, 연대적 참여를 이루고, 거룩한 순례에 동행하며, 함께 걸으며 ‘이웃의 거룩한 위대함을 볼 줄 알고,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줄 아는’ 신비적이고 관상적 형제애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처럼 시노달리타스가 지향하는 친교를 이루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는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는’ 연대와 형제애의 공동체이다.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땅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다. 구체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마음에 감동을 주고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진실한 충동에 따라 나가려는 항구한 자세와 의식을 지닌, 선교하는 제자들의 교회다.

 

 

자신에게서 나가는 선교적 회심

 

자기 자신에게서 나가는 것은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를 참아주며 우리와 함께 기나긴 여정을 동행하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교회 고유의 소명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의 온갖 형태를 버리고, 세상과 다른 이들과의 만남에 자신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앙의 열정으로 예수님이 찾던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의 마음과 복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사랑에 빠진 나르시시즘적인 교회가 ‘회개’하여 사람들 가운데에 있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올바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곧 ‘양들의 냄새를 풍기는’ 교회로 새로 나는 것이다. 양들의 냄새가 진하게 밸 정도로 함께하며 걷고 머물고 살아가는 교회다운 삶과 행동의 방식은, 이론적 도식으로 침체한 상태와 “‘우리는 늘 이렇게 해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안일한 사목적 태도”로 현상을 유지하여 복음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퇴행적 향수를 극복하게 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교회는 영적 세속성의 함정에 숨겨진 위험을 피하며 현재의 도전에 직면할 수 있고, 또한 버려지고 잊히고 폐품처럼 취급당한 변두리에 성령께서 뿌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징표를 발견할 수 있다.

 

 

‘나가는 교회’를 건설하는 ‘나가는 제자’들의 방식

 

선교하는 교회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선교하는 제자들이 되었을 때 실현이 가능한 공동체다.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이러한 모습들은, 집단이자 공동체로서 교회의 모습에만 해당하지 않고 그에 앞서 먼저 개별 교회 구성원 각자에게 적용된다. ‘우리’라는 교회의 이름 안에서 익명과 무명으로 숨어 있지 않고 ‘나 자신’을 용감하게 드러내며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화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한에 있어,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복음화의 방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법률과 규범을 맹목적으로 지키고 따르거나 또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아이디어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있지 않다. 주관적으로 전통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따르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열 세 가지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1) 어머니의 마음으로 환대하고 2)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3)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4)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5) 서로를 참아주는 인내심을 지니고 6) 예수님처럼 온화한 눈빛을 지니고 7) 어머니의 마음으로 문을 활짝 열어두고 8) 어린이의 소리를 경청하고 9) 고아와 같이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10)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고 11)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과 언어 그리고 접근 방식을 배우고 12) 도움을 요청할 때 언제든지 기꺼이 응답하고 달려가고 13) 이 모든 것이 거저 받은 은총이기에 거저 주는 것임을 기억한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23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대전교구 한산본당 주임)]

 

※ 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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