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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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26 ㅣ No.264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21)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에서 제작된 유리화, 조선을 향해 떠나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서명, 1902년.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은 서울 중림동약현성당과 서울 명동대성당에 이어 건축된 고딕풍의 서양식 성당으로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또 다른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대구 계산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소개의 글에서 함께 밝혔듯이 “Henri-Gesta fils Toulouse, France”라는 서명이 남아 있어 프랑스 툴루즈의 앙리 제스타가 제작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본당사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경유해 1902년 10월 13일 저녁 대구에 들어온 것으로 밝혀져 있다. 아울러 작품 설치 2년 뒤인 1904년 8월 말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로베르 신부의 편지를 살펴보면 “남한 일대를 휩쓴 강한 태풍으로 성가대석의 스테인드글라스 하나가 떨어져 나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대구 계산주교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성 안드레아’, 1902년.

 

 

계산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성가대석의 장미창 1개와 제대 뒤편에 4개, 1층 신자석 양옆으로 각각 6개씩, 그리고 양옆 출입문 쪽의 반원형 창과 원형 창에 설치되었다. 계산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성인 도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제대 뒤편 중앙에 계산대성당의 수호성인인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좌측부터 기명(記名)이 있는 창으로 동양 지역의 선교에 공헌이 컸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과 예수 성심상, 성모 마리아상, 성 요셉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상하로 긴 아치창으로 상단과 하단에 백합을 비롯한 식물 문양 장식과 함께 전신상으로 표현되었다. 이 밖에 신자석 창에 있는 사도상들은 반신상으로 표현되었고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으로 장식된 테두리 안에 놓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창 중에 우리나라 순교 성인을 주제로 한 창들은 1991~1993년 보수 복원 당시 새롭게 디자인해 설치된 것들이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시 대규모로 산업화된 공방이었던 프랑스 툴루즈의 앙리 루이 빅토르 제스타 공방(Atelier d‘Henri Louis Victor Gesta)에서 제작되었다. 앙리 루이 빅토르 제스타 공방은 19세기 프랑스에서 운영되었던 대형 공방으로 프랑스 남서쪽의 피작(Figeac)에 있는 푀르 공방(Atelier Feur)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했던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이다. 특히 루이 빅토르 제스타 공방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로서 프랑스는 물론 중국 베이징 등 아시아 지역의 성당을 위한 작품까지 제작하였음을 관련 연구 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장인 앙리 제스타의 공방에서 제작한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제스타 공방의 작업이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서울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이어 우리나라에 초기 스테인드글라스의 수용 경로와 당시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필자에게는 현재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유입 경로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과 서울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남아 있는 동일한 서명 Gesta. 그러나 참으로 얄궂게도 명동대성당의 서명에는 작품이 제작된 정확한 지역의 표기가 생략되어 있고 서명이 모두 대문자인 GESTA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제스타 공방의 서명 양식 중에 이와 동일한 사례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아 명확한 증거(?)를 댈 수 없는 상황이다. 툴루즈의 관공서들과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의 자료들까지 열심히 찾아보았음에도 나올 듯 나올 듯 나오지 않고 있는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주문 과정과 정확한 제작처 등 관련 기록들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지…. 수년간 스테인드글라스 연구자인 필자의 애를 태우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스테인드글라스의 수용 과정마저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아쉬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그간 찾아 헤매던 기록들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대구 계산주교좌성당 제대 뒤편의 스테인드글라스, 1902년.

 

[평화신문, 2016년 6월 26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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