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문헌ㅣ메시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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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2 ㅣ No.500

[목자의 지팡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 베네딕도 16세께서는 교황이 되신 후 2005년 12월 25일에 첫 교서를 반포하셨는데, 그 제목은 요한 1서 4장의 말씀을 그대로 딴 것으로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이다. 그리스도 신앙 전체의 요약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씀은 인간이 의식, 무의식중에 정신 속에 지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며, 여기에 대해서 스스로 어떤 대답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뿐 아니라, 나날의 삶에서 그 바탕 색깔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하나인 프로이트는 “창조주의 계획 속에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믿고 산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가 하면 현대물리학의 향방을 새로 규정하고 인간이 물질세계를 보는 눈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아인슈타인은 한 방송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창조주가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의도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 밖의 문제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이 우주가 우리의 삶에 호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운행을 총괄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이 우주가 인간에게 따뜻한 곳, 사람을 키워주고 활짝 피게 해 주는 환경으로 생각되었다.

[2]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이 두 사람의 생각 중 누구의 것이 더 진리에 부합하는가? 여기에 그야말로 객관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대답을 찾으려고 하면, 끝없는 논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결국 결론은 누군가가 했다는 말로 요약될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고, 믿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주장을 뒷받침해 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래서 이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하느님 스스로 우리에게 주신 대답, 곧 계시를 믿고, 그렇게 해서, 이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신 분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해 주실 만큼 우리를 더할 수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간단히 줄이자면, 우리는 그분이 사랑 자체시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의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고, 이 믿음과는 정반대로 나타나도, 온 우주, 이 세상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통제 하에 있고, 그래서 따뜻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인간 측의 이런 느낌, 이 믿음이 어려움과 시련을 용감히 견디어내게 하고, 삶을 희망차게 하며, 어떤 처지와 상황 속에서도 밝게 살아가게 한다. 그래서 이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 수행하는 그 역할에서도 계시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이 교서는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나타나며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를 잘 보여준다.

교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는 원리, 이론적 바탕을 제시하고, 제2부에서는 실천, 사회생활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순서를 따라 핵심 내용을 아주 간단히 살펴보자.


제1부 : 원리, 이론적 배경

[3] 1.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의 핵심이다. 하느님은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에게 어울리며 뿌듯한 보람과 참된 기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이 간단한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 요한은 이렇게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그리스도교 믿음은 어떤 <추상적 진리>를 깨달은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만나서 그분의 절대적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고 정신으로 깨달은 데서 시작되었다. 요한은 이에 관해서 말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서 전체를 아주 인상적인 말씀으로 압축해 주신다. -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28-30) -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사랑의 화신이신 스승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 사랑의 불길을 제일 많이 받아, 사랑의 도사가 된 요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랑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알려 준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상대방을 자신의 욕심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그에게 내어주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얼마나 흔히 우리는 사랑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사랑과는 정반대의 몸짓을 보였던가!

2. 언어의 문제

그야말로 한때 반짝하다 사라지는 유행가에서부터 <고전>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가곡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래와 시, 그리고 문학작품들이 이 사랑을 묘사하고 예찬해 왔던가? 또 우리의 일상 안에서는 얼마나 자주 이 말을 쓰고 있는가? 말이 일종의 그릇이라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그것을 쓰는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쓰게 되는 상황이나 상대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언어의 문제는 그래서 생긴다. 교황님께서도 이 문제를 먼저 다룰 필요를 느끼신다. 나라 사랑, 직업 사랑, 친구 사랑 등, 다양한 용례와, 오랫동안 써왔다는 사실 때문에 낡고 진부하게 되기까지 한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원래의 의미를 찾아가 보자.

사랑 가운데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두드러진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몸과 정신이 뗄 수 없이 연결되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거의 피할 수 없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사랑은 모든 사랑을 제일 잘 요약하고 대변해 준다. 거기에 비하면 다른 사랑은 희미해지고 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랑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것들을 두고 말만 같이 사용할 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3. 에로스와 아가페 - 차이와 같음

사랑을 지칭하는 희랍어 단어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셋이 있는데, 신약성서는 희랍 사람들이 별로 쓰지 않던 아가페를 제일 즐겨 쓴다. 이처럼 에로스를 피하고 아가페를 압도적으로 많이 쓰는 경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이전과는 크게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계몽기에서부터 시작되어 근래에 올수록 더욱 날카로워진 그리스도교 비판가들은 이런 경향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본다. 니체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교가 에로스에게 독약을 먹였고, 그래서 에로스는 완전히 죽지는 않고 차츰 악덕으로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니체는 개인의 견해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대단히 널리 확산되어 있는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는 점을 교황님은 인정하신다. 교회는 그 많은 계명들과 금령들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이것을 쓰거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았던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신적인 어떤 것을 미리 조금 맛보게 해주는 이 기쁨을 우리가 막 체험하려 할 때, 교회가 <안돼!> 하는 팻말을 번쩍 들어올렸던 것은 아닌가?

4. 정말 그런가? 그리스도교가 실제로 에로스를 망쳐 버리는가?

그리스도교 이전의 세계로 잠시 가 보자. 그리스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로스를 술을 잔뜩 마셨을 때처럼, 일종의 ‘취기’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신적 광기’로서 이성을 압도하고, 인간을 그 유한한 삶으로부터 낚아채어, 신적인 회오리 속으로 데려가서는, 지고의 행복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힘들은 그 앞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비르질리우스(c.70-c.19)는 읊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굴복한다.” 여러 종교에서 이런 자세는 생산성 숭배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거룩한’ 창녀(남) 제도가 많은 신전에서 성행되었다.

구약성서는 이런 식의 종교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것을 유일신 신앙에 대한 강력한 유혹으로, 종교성의 심한 왜곡 현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에로스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에로스가 왜곡될 때, 그것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지니는 참된 존엄성을 파괴하고 비인간화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 않는 한, 에로스는 육과 영으로 구성된 인간이 활짝 피어나고 균형 잡힌 인격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사랑하는 것은 영만도 아니고, 육만도 아니다. 영으로 된 사람 전체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하고 다른 쪽을 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허상이요 착각일 뿐이다. 여기서 교황님은 재미있는 일화를 인용하신다. 쾌락주의자 가쌍디가 데카르트에게 농담조로 “오, 영이여!” 하고 부르니, 데카르트는 그에게 “오, 육이여!”하고 응수했다는 것이다.

인간을 육과 영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둘 모두를 좋은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에로스와 아가페가 모두 축복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모습을 따서 만드신 인간이 그렇다면, 그 원형이신 하느님의 사랑 자체도 에로스와 아가페 두 요소를 함께 지니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교황님은 하느님을 한꺼번에 에로스와 아가페라고 불렀던 위-디오니시오를 상기시키며 “하느님의 사랑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에로스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만, 그 사랑은 동시에 또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하다.”고 천명하신다.

하지만, 에로스가 한 순간의 쾌락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삶에서 참 기쁨의 정점을 미리 맛보는 기회가 되게 하며, 인간이 갈망하는 지복을 미리 체험하는 계기가 되 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제와 훈련 그리고 정화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5. 에로스를 과거와 현재에 어떻게 보고 있는가?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가지가 분명하게 떠오른다. 먼저, 사랑과 신적인 것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있다. 사랑은 일상적 삶보다 훨씬 위대하고 전혀 다른 어떤 무한, 영원을 힐끗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냥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정화와 성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절제와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에로스가 독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하고 그 본연의 위대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육체와 영혼이 속 깊이에서부터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참된 자기가 된다. 이 일치가 이루어질 때, 에로스의 도전은 정말로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순수 정신이 되고 싶어 하고, 육체는 자기의 동물적 본성에만 속하는 것으로 여겨 그것을 물리쳐 버린다면, 정신과 육체가 모두 그 존엄성을 잃고 말 것이다.

6. 에로스와 아가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나? 완전히 다른가?

에로스를 올라가는 사랑, 소유적 사랑이라 하고, 아가페를 내려가는 사랑, 헌신적 사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에로스가 처음 단계에서 주로 탐욕적이고 상승적이며, 상대방에게 감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큰 희망에서 출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정이 진행되면서 차츰 자신을 잊고 상대방의 행복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며,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상대방을 위한 존재가 되려는 쪽으로 발전해 간다. 이런 식으로 아가페의 요소가 거기에 끼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에로스는 점점 빈약해지고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게 된다.

또 인간은 늘 내주기만 하는 사랑, 하강적 사랑만으로는 못 사는 법이다. 주려는 사람은 받을 줄도 알고 실제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물이 용솟음쳐 나오는 샘이 될 수가 있다.(요한 7,37-38) 하지만 그런 샘이 되려면, 그 자신이 먼저 본 샘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물을 길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뿜어내신(요한 19,34 참조) 주님의 옆구리가 바로 그 본샘이다.


제2부 : 카리타스 -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펼치는 사랑의 실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요한의 이 말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그 믿음을 실천하려 할 때, 가장 깊이 새겨야 할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통해서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리에 따라 교회는 옛날부터 크고 작은 규모의 자선사업을 펼쳐왔다.

26항. 사랑과 정의 : 그런데 19세기부터 교회의 자선사업을 두고 비판이 있어왔고, 그것이 마르크시즘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했다. 한 마디로,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행위가 아니라 정의라는 것이다. 자선행위는 부자들로 하여금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무감을 무디게 하고 나아가 그 양심을 위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자선행위를 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협력할 일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건설함으로써 모두가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해야 하며, 자선활동에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허구성이 많이 들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가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가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의 말씀대로, 정의에 입각해서 운영되지 않는 국가란 도둑들의 소굴일 뿐이다. 그래서 교회도 현세 질서가 정의에 입각한 것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또 계속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자선은 가장 정의로운 사회에서도 언제나 필요하다. 사랑의 봉사가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정의로운 사회란 있을 수 없다. 위로와 도움을 요청하는 고통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구체적인 사랑의 활동이 필요한 물질적 빈곤 상황은 언제나 있다. 국가가 그 모든 일을 다 맡아 하려 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무적인 일로 전락하고 말 것이고, 결과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 인격을 갖춘 존재에게 정말로 필요한 그것을 제공해 주지는 못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염려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도맡아 하려드는 국가를 원하지 않고, 개인과 단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펼치는 여러 모양의 구제활동을 후원하고 도와주는 국가를 원한다. 교회는 바로 그 단체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31항. 교회의 자선활동이 지니는 특성 : 그런데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겪는 온갖 모양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뛰어드는 단체들이 대단히 많고 다양하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자께서 인간의 본성 속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오랜 동안 그리스도교가 펼쳐 온 자선활동의 결과인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자선활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30-37)처럼, 그리스도교 자선은 당장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이, 헐벗은 이, 병자, 재소자 등을 돌보는 일 등이 그것이다. <카리타스>(교구, 국가, 국제)를 위시해서 교회가 설립 운영하고 있는 여러 기관을 통해서도 이 일을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고, 사람은 언제나 기술적으로 적절한 도움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인간성, 인간미 있는 도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도움, 따뜻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

나. 그리스도교 자선은 정당이나 이념과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이념적으로 바꾸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 안정이나 어떤 거창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면 언제나 필요로 하는 사랑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일이다.

다. 그리스도교 자선은 또 종교적으로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사랑은 대가가 없어야 한다. 무슨 목적이나 의도가 깔리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맺으며

[5]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의 왕국은 사랑의 왕국이다. 그 왕국의 시민은 사랑의 도사들이다. 이 사랑의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형태는 에로스다. 이 거대한 힘이 본래의 방향을 잘 찾아가면, 그것은 아가페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가족, 이웃,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나아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사랑의 물결은 점점 더 확산된다. 당연히, 교회는 자선활동을 자신의 본질적 사명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태양이 그 빛과 열기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먹여 살리듯, 어느 시대에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분을 아버지로 받드는 신앙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 삶을 밝고 따뜻하게 해야 한다.

[쌍백합 제13호, 2006년 여름호,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천주교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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