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경자료

[구약] 구약 여행39: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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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6 ㅣ No.317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9)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온 세상 역사 이끄시는 분은 주 하느님



지도를 잠시 보십시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입니다(기원전 6세기). 엄청납니다. 왼쪽 구석에 유다가 보이십니까? 고목에 붙은 매미라는 표현이 생각납니다. 소위 제2이사야는 이런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을 읽을 때에 보았던 것처럼, 아모츠의 아들인 이사야라는 예언자가 살았던 것은 기원전 8세기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40장 이후 부분은 그 이사야 예언자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고했던 대로 과연 유다 왕국은 멸망의 길을 갔고,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에제키엘이 활동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 후 시간이 좀더 흘러, 이제 유배가 끝날 때가 다가옵니다. 이 시기에 작성된 이사야 예언서 제2부, 곧 이사 40─55장의 저자를 편의상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어디까지나 편의상 부르는 명칭입니다. 실제로는 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를 시작하는 첫 구절이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입니다. 그가 선포하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해서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2).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어 나라가 멸망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어도, 이제 그 징벌의 기간이 모두 끝나고 유배에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국제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이듯,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바빌론도 어느덧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던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 바빌론은 내정이 불안해져서 임금이 계속 교체되었고, 마지막 임금인 나보니두스는 종교적 이유로 마르둑의 사제들과 충돌했습니다. 세력을 갖고 있던 사제들이 임금과 같은 편이 되지 않았으니 나라가 평온할 수가 없습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바빌론에 쳐들어왔을 때, 나보니두스를 반대했던 사제들은 키루스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해방자로 여겨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빌론은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무너졌습니다.

이제 패권을 잡은 것은 페르시아입니다. 정복 민족들을 다스리는 방식에 있어서 페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종교적으로도 페르시아인들은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또 저 넓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페르시아는 무리한 힘으로 정복 민족들을 내리누르기보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숨통을 터주면서 그들을 자신 아래 매여 있게만 했습니다.

이러한 전환기를 맞아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선포한 첫 번째 ‘위로’였습니다. 예전에 멸망을 선포하도록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를 부르셨던 하느님은(이사 6장 참조), 이제 해방을 알리라고 다시 예언자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심판을 선고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구원을 알려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예언자 자신도 도대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희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8). 바빌론도, 페르시아도 모두 덧없는 풀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제2이사야가 크게 강조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창조입니다.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이사 40,26). 그래서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온 세상 구석구석에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하느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이사 40,25).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실제로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느님은 뜻밖에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키루스는 이교인입니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키루스가 이전에 바빌론이 멸망시킨 민족들을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이 각각 자신들의 성전을 복구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세처럼, 기드온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구원자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설명이 창조 신앙이고 주님 외에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입니다. 이전까지는, 다른 신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다른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시하지 않았었습니다. 제2이사야에 와서는, 다른 신들이란 없고 우상이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부각됩니다. 바빌론이라는, 페르시아라는 강대국들을 보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 주 하느님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분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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