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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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68: 순교자 성월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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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29 ㅣ No.751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8) 순교자 성월 가운데서


순교 이야기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신앙 증거 원동력 돼야

 

 

- 2018년 9월 미리내성지에서 열린 수원교구 순교자현양대회에서 성 김대건 신부 유해를 가마에 싣고 행렬하고 있는 참가자들. 오늘날 순교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으며, 욕망과 물질의 유혹 등에도 꿋꿋하게 신앙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절박한 상황들

 

그리 특별한 일 없이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다. 사제로서 뭔지 모를 미안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주변을 돌아보면, 심각한 병에 고통받는 사람, 절망적인 환경과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일들이 아니어서, 어떤 절박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것들만 실감하는 것일까. 국제 뉴스를 보며 가끔 생각한다.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지금 어떤 마음과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진이라는 자연재해를 겪은 모로코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매일의 삶 속에서 생명의 위협과 위기의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자기의 생을 꾸려갈까. 일시적 망각과 본능적 적응이 인간 삶의 본질일까.

 

모든 시대, 모든 세대가 비슷한 상황과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것은 아니다. 엄혹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시대도 있고, 순탄하고 평범한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운 좋은 세대도 있다. 상황과 운명은 시대와 세대마다 다르고 때때로 불공평하다. 같은 시대와 세대라 해도 환경과 공간적 상황에 따라 다른 운명을 살아간다. 자신의 시대를, 자기 세대를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오늘의 상황과 풍경은 어떤 것일까. 이 시대를 젊은 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과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순교, 자기희생, 비폭력 저항

 

무엇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일은 고귀하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부모의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중한 가치와 이념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역사 안에는 적지 않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해도 실제 삶 안에서 생명을 내어놓는 자기희생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현세 삶의 기쁨과 물질의 쾌락을 맛본 현대인들이 생명을 내어놓는 자기희생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지난 시절 독립이라는 가치, 민주화라는 이념을 위해 자기희생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 역사에서 자주 목격했다. 하지만 모든 이념이 사라지고 오직 이기적 욕망과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진 오늘의 세상에서 자기희생의 미덕을 찾기란 점점 어렵다.

 

순교는 신앙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다. 순교는 숱한 신앙의 행위들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행위로 추앙받는다. 순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닮는 일이다. 순교는 가장 순결한 신앙 증거이며 신앙 고백이다. 순교는 신앙을 위협하는 시대와 상황에 대한 항거이다. 생명을 내어놓는 순교는 생명을 빼앗으려는 억압적 체제와 환경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다.

 

신앙은 모든 시대와 세대에서 고백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신앙이 처한 상황과 환경은 시대와 세대와 공간과 지역에 따라 다르다. 순교는 엄혹한 시대, 절박한 상황에서 발생한 신앙 고백이며, 위협과 공포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그 시대의 신앙적 응대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신앙에 대한 외적 박해와 위협보다는 내적 유혹과 타락의 위험이 많은 이 시대의 신앙 고백은 어떤 모습일까. 이 시대적 상황에 응대하는 신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 시대에 신앙을 사는 모습, 신앙을 지키는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순교 이야기의 왜곡과 진정한 순교 정신과 영성

 

교회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순교는 분명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신앙 행위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와 초기 한국천주교의 역사가 그것을 웅변한다. 하지만 순교라는 이 압도적 신앙 행위 앞에서 어떤 성찰 기능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어떤 시대의 교회가 순교의 진정한 신앙적·신학적 의미와 참다운 순교 정신을 배우고 살아내기보다는 순교 이야기를 지나치게 호교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분명 있다. 신앙 선조들의 순교 이야기가 당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죄의식을 유발하게 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로완 윌리엄스 「과거의 의미」)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어두운 시대에 순교와 동정(童貞)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왜곡된 금욕주의를 파생시키기도 했고, 육체와 여성과 성에 대한 뒤틀린 이해를 낳기도 했다.

 

오늘날도 순교 이야기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왜곡된다. 순교 이야기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소비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9월은 한국교회가 정한 순교자 성월이다. 순교 정신을 되살리고 순교 영성을 살아내기 위해 교회는 다양한 방법과 형식으로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순교 정신과 영성을 함양하려는 교회의 시도들 안에는 가끔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의 위험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지 조성은 세속의 테마 공원 형식을 닮아간다. 순교 정신과 영성을 되새기게 하는 방식으로 성지화 작업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순교자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는 경우도 많다. 신앙인들 역시 성지 순례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기억하며 순례에 나서기보다는 유명 유적지에 꼭짓점 찍듯이 성취적 목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순례가 아니라 관광의 형식인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순교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을 증거하고 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시대에 신앙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상기하게 하고 신앙을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게 하는 힘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순교 이야기가 일시적인 감정 고양(高揚)과 일종의 영웅적 미담을 고개 끄덕끄덕하며 듣고 흘려버리는 것 같은 소비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순교 이야기는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신앙은 증거되고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다. 오늘날 순교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으며, 욕망과 물질의 유혹과 타락의 위험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순교는 박해 시대의 신앙 고백 행위다. 이 시대의 신앙 고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거듭 말하지만, 시대와 세대를 넘어, 신앙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고백되고 증거되어야 한다. 교회와 신앙인은 말(선포)과 삶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일상의 신앙은 그 사람의 신념(시선, 관점, 입장)과 자세와 태도,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순교 정신과 영성을 살아내고 있는가?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24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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