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김기창 베드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22 ㅣ No.62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1) 김기창 베드로 (상)


청각 장애를 딛고 선 천재 화가, 운보 김기창

 

 

작업 중인 운보. 출처=김기창 전작도록

 

 

나의 서재에는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운보 김기창 전작 도록이 있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책이다. 김기창(金基昶, 베드로, 1913~2001)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집이라 규모가 굉장하다. 운보의 모든 작품이 들어있다. 그림뿐만 아니라 자신이 쓴 수필을 비롯해 신문잡지에 난 기사와 평론까지 들어있다. 그 커다란 책을 펼치면 나의 귀에는 음악이 흐른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곡이다. 존 베리가 작곡한 아름다운 곡이다. 이어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흐른다. 기차는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달린다. 전작 도록은 운보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달리는 기차와 같아 영화 장면과 오버랩된다.

 

나는 김기창이 청주에 ‘운보의 집’을 열었을 때 가보았다. 운보는 예전에 프랑스 지베르니 마을에 있는 ‘모네의 집’을 갔었다. 그 집을 보고 한없이 부러워했다. 자신도 외가가 있는 청주에 집을 짓고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며 지은 집이었다. 한국 전통 가옥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손님을 맞이하던 운보의 모습이 생각난다. 동네의 어진 할아버지 같았다. 그때 방문 기념으로 운보의 그림이 담긴 접시를 한 개 받았다. 여름철 원두막 풍경이 정겹게 그려져 있는 접시로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청력을 잃은 아이

 

운보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북촌 일대에서 보냈다. 와룡동에는 글방이 있었고, 스승 이당 김은호의 집도 있었다. 돈화문과 휘문중고교, 효자동과 북악산, 세검정 그리고 돈화문 쪽으로 뻗은 길에 단성사가 있었다. 단성사에서는 저녁마다 손님을 부르기 위해 날라리 소리를 내며 북을 쳤다. 저녁 하늘에 울려 퍼지던 그 처량한 소리는 운보가 귀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운보는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을 치른 얼마 후 운동회가 있었는데 그때 몹쓸 병이 찾아왔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었다. 몇 달을 치료해 다소 병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보약으로 인삼을 달여 먹였다. 그것이 고열로 이어져 청신경이 다 타버렸다. 그 무렵 집안 사정도 급속히 나빠졌다. 외할머니의 재산은 손자의 치료비와 집안의 금광 사업 실패, 자식의 극심한 낭비로 모두 탕진됐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졌다. 개성에 있는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 치과 간호사로도 일했다.

 

운보는 학교에서 수업할 때 선생님 말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책에 있는 그림을 공책에 그리곤 했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글을 가르쳤다. 종이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그리고 그 위에 한글로 ‘새’라고 쓴 후, 다시 커다란 한문 글씨로 ‘鳥’를 썼다. 운보는 대번에 ‘鳥’자 위에 쓴 ‘새’가 날아다니는 새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서운 반복과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마침내 글을 읽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책을 많이 사다 주었다. 운보는 독서에 취미가 생기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 잡지에 동시 ‘매암이와 쓰르람이의 노래’를 투고했다. 동시는 순수하고 재밌고, 스토리가 살아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운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를 계기로 운보는 책방을 찾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다. 운보의 책상에는 교과서보다 문학책이 점점 더 높이 쌓여갔다. 세계 문학 작품을 밤새워가며 탐독했다. 운보는 한때 소설가가 되려 했다. 콩트 ‘광녀와 늙은 머슴’도 지었다.문학적 실력이 인정받아 신문사와 잡지사에서는 운보에게 미술평론과 수필을 청탁했다. 운보가 지은 책은 여러 권이다. 대표적인 책이 「서방여적(書房餘滴)」, 「나의 사랑과 예술」,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 「세계화필기행화문집」, 「침묵의 심연에서」이다. 운보는 화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미술평론가로 멀티 아티스트였다.

 

김기창 작 '널뛰기' 출처=김기창 전작도록

 

 

천재적 화가의 탄생

 

어머니는 아들을 화가로 키울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장애아들이 평생을 살아가려면 기술이 필요하므로 목공 기술을 가르쳐 목공 기술자가 되길 원했다.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대로 운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당 김은호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운보는 이당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흘렀다. 이당은 운보에게 큰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출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운보가 어느 날, 안국동 뒷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길을 걷는데 기와집 담 너머로 처녀가 치솟았다. 운보는 그 집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녀들이 널을 뛰고 있었다. 이에 영감을 얻어 널뛰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이당에게 보여주었다. 이당은 대단히 흡족해했다. 이 그림은 ‘판상도무(板上跳舞)’란 제목으로 선전에 출품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입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그림은 세브란스병원 치과 과장 부스 박사가 큰돈을 주고 사서 병원에 걸어두었다. 그런데 그만 6ㆍ25 전쟁 때 분실되고 말았다.

 

그 후에 운보는 ‘고담(古談)’이란 작품을 그려 선전에서 특선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고담’은 할머니가 어린아이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이다. 계속해서 선전에 출품해 특선을 네 번이나 연이어 받아 추천작가가 되었다. 언젠가 어머니 친구인 나혜석이 운보의 그림을 보고 “기창군의 그림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넋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선전에 두 번 입선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허약한 몸으로 출산한 후에 갖가지 병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부인 우향 박래현을 꼽았다. 어머니는 운보가 선전에 처음으로 출품하기 전에 ‘雲圃(운포)’라는 두 글자를 써주며 호로 사용하라고 했다. 운보는 그 호를 쓴 작품으로 입선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 호를 썼으나 ‘雲圃’는 획이 많고 답답해 보였다. 해방 직후에 해방된 기쁨을 나름대로 나타내기 위해 ‘圃’의 울타리를 벗겨내고 ‘甫’로 고쳐 ‘雲甫(운보)’로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운보는 극심한 충격과 걱정에 사로잡혔다.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식구들은 아침저녁을 멀건 죽으로 때웠고, 점심은 굶었다. 굶주림이 계속되자 식구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부었다. 생활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스승인 이당이 이를 알고 소품을 열 장만 빨리 그려오라고 했다. 그날 밤 등잔불을 켜놓고 물로 굶주림을 달래가며 밤을 꼬박 새워 열 점을 그렸다. 이당은 그 그림들을 화실 벽에 붙여 놓고는 친구들을 불러 팔아주었다. 또한, 어머니가 일했던 세브란스병원 치과 부스 박사 내외가 서양인들에게 운보의 그림을 팔아주었다. 그 방식도 멋있었다. 강원도 원산 명사십리에는 서양인들이 많이 찾는 별장이 있었다. 해당화가 만발한 여름에 서양인들은 그곳을 많이 찾았다. 바로 그곳에서 소품전을 열어준 것이다. 작품은 많이 팔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19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2) 김기창 베드로 (하)


조선 풍속에 따라 그린 ‘예수의 일대기’ 서른 점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작업 중인 운보와 아내 우향. 출처=김기창 전작도록.

 

 

남편에게 말을 가르친 아내

 

운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운보의 눈과 귀가 되어 인생길을 함께 걸은 동반자였다. 아내를 잃고는 무척 괴로워했다. 우향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운보가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운보는 그 여인의 멋과 아름다움에 놀랐다. 우향 역시 놀랐다. 우향은 운보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 앞에는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 마냥 시커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그것에 부딪쳤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커먼 바윗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또 놀란 이유는 운보를 칠십 대 노대가로 알고 인사하러 왔는데, 젊고 패기가 가득한 미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존경과 이해와 사랑으로 뒤범벅되었다. 운보는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자신을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여성과 비교해보니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우향은 용기 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운보를 택했다. 운보는 그러한 우향에게 평생 고마워했다. 불우한 자신을 구원해주었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이었다.

 

우향은 전혀 말을 하지 못하는 운보에게 말을 가르쳤다. 혹독할 정도로 발성 연습을 시켰다. 1년 동안 노력한 끝에 어느 정도 말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글을 가르쳤는데 아내는 말을 가르친 것이다. 우향이 미국에 딸과 함께 있었을 때, 운보는 딸로부터 급히 미국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서둘러 미국에 도착한 운보에게 딸이 말했다. “아빠, 엄마 모습 보시고 놀라지 마세요.” 운보는 아내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으면 딸이 저런 소리까지 하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우향이 아니었다. 뼈만 앙상한 웬 낯선 노파가 누워있던 것이었다. “아! 아! 이게 웬일이오.”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와 병원에 입원시켰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갖가지 병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기창 작 '최후의 만찬'. 출처=김기창 전작도록.

 

 

예수의 생애가 화폭 속으로

 

피난 생활 할 때였다. 운보는 극심한 생활고에 쪼들렸다. 당시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어떤 화가가 함께 초상화를 그리자고 해 운보도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에 아내와 친분이 있던 사람의 도움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그림을 판 돈으로 아내의 옛집이 있는 군산 구암동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신이 난 운보는 그곳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종교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놀라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꼬박 1년 동안 ‘예수의 일대기’ 서른 점을 제작한 것이다. ‘예수의 일대기’는 조선 풍속에 따라 그렸다. 예수님도 갓 쓴 조선 양반으로 그렸고, 성모님도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조선 여인으로 그렸다.

 

운보는 성화를 그릴 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운보는 그 빛 아래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어두운 동굴이 아닌 찬란한 햇빛이 들어오는 자기 방이었다. 운보는 ‘예수의 일대기’를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그때 예수님 꿈을 꾼 것이었다. 운보는 네 복음서를 펼쳐놓고 고심하면서 ‘예수의 일대기’ 밑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화구, 붓, 물감이 없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 이러한 사정을 알고는 일본에서 미술 재료 일체를 구해주었다. ‘예수의 일대기’는 주제별로 그렸다. 수태고지부터 탄생, 복음 선포,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서른 점으로 완성한 것이다.

 

특히 ‘수태고지’, ‘아기 예수 이집트로 피난’, ‘물 위를 걷다’ 등의 몇 작품은 미술평론가들이 극찬했다. ‘수태고지’는 보티첼리와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서양화가들이 한 번씩은 그렸다. 운보는 그들이 그린 근엄하고 놀란 표정의 성모님과는 달리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아기 예수 이집트로 피난’은 이집트로 급히 떠나는 성가족의 쓸쓸한 모습을 삭막한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다. 나귀에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태우고 뒤돌아보는 요셉의 표정을 불안하게 그렸다.

 

‘물 위를 걷다’는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처럼 그렸다. 집어삼킬 듯한 파도, 물에 잠긴 배와 제자들의 불안한 모습,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두 손으로 건져주는 모습은 운보가 조선 회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수의 일대기’는 서울에서 전시되었다. 전시장은 성황을 이루었다.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들도 올라와 구경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재림하셨다”고 기뻐했다.

 

운보는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라는 작품도 그렸다. 아담한 성당이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수녀가 흰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는 종탑을 올려다본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그림은 운보의 막내딸과 관련이 있다. 아내가 막내딸을 임신했을 때, 운보가 꿈을 꾸었는데 막내딸이 수녀가 되는 꿈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수녀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이 이 작품이다. 막내딸 김영(아나윔) 수녀는 그림의 수녀가 자신과 꼭 닮았다고 했다. 김 수녀는 인도의 데레사 수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입회했고, 종신서원을 하여 수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증해 현재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운보는 일흔 살이 되던 해에 성라자로마을 성당에서 이경재 신부의 주선으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운보는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붙들고 감리교 교회에 다녔다. 그러다가 이당 김은호 화숙에 들어가면서 스승과 함께 장로교 안국교회에 다녔다. 운보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막내딸이 수녀가 된 것이었다. 막내딸은 수녀가 되기 전에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세례 후 김기창 화백과 김수환 추기경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별이 된 바보산수의 개척자

 

운보는 우리나라 위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가 그린 대표적인 초상화는 세종대왕 영정이다. 그 영정은 지금도 1만 원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을지문덕, 김정호, 조헌, 신숭겸의 영정을 그렸다. 이들 영정은 국가가 공인한 표준영정이 되었다. 그런데 세종대왕 영정에 대해 시비가 많았다. 대왕의 얼굴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운보는 “수백 년 혹은 1000여 년 전의 인물을 실감 나게 화폭에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화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청주에 운보 기념관이 건립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청주에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의 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하며 반대했다.

 

운보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본 강점기에 활동한 사람으로 그 행위가 일본에 도움을 준 것이라면 달리 변명하지 않겠다”고 하며 “용기 있고 떳떳하게 나아가지 못한 점은 사죄한다”고 했다. 덧붙여서 “사상적인 친일로 무장했다거나 일제의 정책에 적극 가담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운보의 집’에 소장하고 있던 작품 60여 점이 도난을 당했다. 그날 집을 지키던 진돗개는 뒷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전에는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 100여 마리가 하루아침에 몰살당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운보는 후소회 창립 기념 전시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투병했다. 어느덧 미수(米壽)를 맞았다. 운보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운보 바보예술 88년’ 전시회에 참석했다. 옥색 모시 한복에 흰 고무신 그리고 빨간 양말 차림이었다. 아직도 예술혼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에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운보 김기창 베드로는 그렇게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實存像)’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시인 구상)

 

“남들이 소음을 들을 제 운보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노산 이은상)

 

참고자료 : ▲ 김기창. 沈默의 세계에서(오늘의 산문선집15). 민음사. 1976.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발간위원회. 雲甫 金基昶 (Ⅰ,Ⅱ,Ⅲ,Ⅳ,Ⅴ). 도서출판 API. 1994. ▲ 오광수. 김기창·박래현(재원미술작가론15). 재원. 2003. ▲ 가톨릭신문(2001.2.4.) 고 김기창 화백의 예술과 삶. ▲ 동아일보(2006.1.23.) 2001년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 ▲ 오마이뉴스(2005.4.19.) ‘친일화가가 그린 만원권 세종대왕 바꿔야’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26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19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