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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올바른 이해6: 찬미받으소서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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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9 ㅣ No.777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올바른 이해 6

 

「찬미받으소서」를 마치며

 

 

지난 다섯 차례에 걸친 연재를 통해 생태와 환경에 관한 최초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제, 그 마지막 장이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을 마음과 정신, 그리고 생활에 깊이 새기며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갈 때이다.

 

제6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모두를 생태적 회심의 장으로 초대하신다. 제5장에서 전세계인들의 관심을 요청하신 자세와 비교하면 이번 장은 더욱 분명하게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초대와 촉구의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생태계의 치유

 

문제가 감지되었을 때 많은 경우 우리 자신과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갈등, 도덕적 가치의 몰락으로 말미암은 사회문제 등이 일어났을 때 언제나 우리는 무엇이 문제이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물었다.

 

시장경제의 문제가 점차 심화될 때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대안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한동안 세계인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서, 나 자신의 변화보다 사회 체제와 구조의 변화가 늘 논쟁의 중심에 놓였던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이상과 정치적 대안이나 철학도 파멸의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탐욕과 이기심의 열차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역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며 변화되는 개개인의 삶과 사회의 변화를 강조하신다.

 

이 점은 그동안의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실현되고, 연대성 안에서 체제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제6장은 “많은 것의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202항)라는 의미있는 발언으로 시작한다. 앞의 제1-5장의 모든 내용을 통해 생태계 위기가 사회, 정치, 윤리 문제가 모두 결합된 결과임을 분명히 드러낸 뒤, 마지막 장에서 개인의 변화, 곧 신앙에 입각한 투신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고 있다.

 

인류 자신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신념, 자세, 생활양식을 이끌어낼 때 가능하다(202항 참조). 회칙은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방안을 ‘생태적 회심’이라는 주제 아래 펼쳐나간다. ‘회심’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듯,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회칙이 최종적으로 귀착하는 곳은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교황님은 온전한 응답만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여 자연과 인간세계를 포함하는 생태계 질서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길임을 천명하신다.

 

 

생태적 회심과 영성을 제시하다

 

아홉 개의 토막으로 구성된 제6장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이때 회칙에서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최근 교회 밖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영성의 의미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실천되고 증언되는 모습’으로 정의되는 영성은 회칙에서도 철저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의 관계에서 조명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회칙이 말하는 생태영성은 생태 중심적 가치관에 입각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회칙의 생태영성은, 예수님을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의 틀에서 현재의 문제를 분석하고 반성하여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전환과 선택에서 생태 문제도 해결된다는 확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생활양식의 변화와 환경교육

 

새로운 생활양식을 모색하는 회칙이 맨 먼저 지적하는 오늘날 생활양식의 문제점은 기술 · 경제 체제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빠져있는 집착적 소비주의의 태도이다.

 

은연중에 우리는 소비의 자유가 존재의 자유인 양 인식하며(203항 참조), 점차 자기중심적인 의식 안(204항 참조)에 머묾으로써 점차 커가는 탐욕이 우리를 집어삼킨 형국에 놓여있다. 소비지향적인 이러한 생활양식에 대한 집착이, 소비가 불과 소수에게만 자유로이 허락되는 상황 속에서 폭력과 상호파괴를 일으킨다고 회칙은 지적한다.

 

이에 회칙은 「진리 안의 사랑」 68항을 인용하며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을 부각한다.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를 일깨우고 지속 가능성을 이룩하려는 확고한 결심,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신이 있어야 실현된다(207항 참조). 피상적인 현실의 지평을 벗어나는 자기초월의 자세로 자기중심성과 자아도취를 거부할 때 우리는 모든 개인적 결정에서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208항 참조).

 

회칙은 환경교육의 변화 과정을 되짚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학문적 정보, 의식화, 환경 위기 예방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를 지나, 개인주의와 경제, 소비주의, 규제 없는 시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후의 환경교육은 내적으로는 우리 자신과, 연대의 차원에서는 다른 이들과, 자연의 차원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과, 영적으로는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단계의 회복을 추구한다. 이 지점에서 “신비이신 분께서는 환경윤리에 가장 깊은 의미를 주십니다.”(210항)라고 언급함으로써 환경교육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지를 밝힌다.

 

이제 회칙은 환경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씩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환경교육은 행동과 습관, 곧 물 절약, 쓰레기 분리수거, 불필요한 전등의 소등, 대중교통 이용이나 승용차 함께타기 등 매우 구체적인 일상에서 실천하는 교육이다(211항 참조). 이러한 실천이 폭력과 착취와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행동이며, 사회에 선(善)을 퍼뜨림으로써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체험을 하게 한다(212항 참조).

 

이를 위해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문화의 중심을 이룹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보여주는 법을 처음 배웁니다”(213항).

 

또한 책임 있는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감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교육,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과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육도 강조한다(214항 참조).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생태적 회심

 

회칙은 그 핵심이자 제6장의 중심내용인 ‘생태적 회심’을 천명한다. “환경 위기는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 따라서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217항).

 

회칙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에서 피조물과 맺는 건전한 관계가 인간의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어떤 해를 끼쳐왔는지를 깨닫고 마음을 바꾸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심은 개인적 차원에서 하느님 앞으로 돌아서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회심으로 귀결된다. 우리에게 만연한 소비주의적 태도와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문제들은 공동체의 협력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심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에 대한 감사와 모든 피조물 간의 보편적 친교를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방식을 제안하는 가운데 검소함과 절제, 겸손 등의 덕목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신앙에서 나오는 관상적 관점에서 시작될 때 쉬워질 것이며,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를 맺어주시는 유대를 세상과 우리 안에서 관찰하는 관상이 더욱 큰 창의력과 열정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의 지평에서 모든 것을 반성할 것을 촉구하는 회칙에서 식사 전후의 기도와,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의 실천이 제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회칙은 두 가지의 기도를 제안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와 함께 드리는 기도인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복음이 제시하는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도록 청하는 기도인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이다.

 

 

대장정을 마치며

 

‘파리 기후변화 협약’을 앞둔 2015년 5월 24일 성령강림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서명하신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우리나라 교회뿐 아니라 전세계 교회와 나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던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과 세상이 무엇을 어떻게 반성하고 지향해야 하는지를 밝힌 점에서 인류사적 의의를 갖기 때문이었다.

 

반포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수많은 토론회와 세미나, 교육 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 관련 학계의 세미나에서도 회칙을 중심주제로 다루었다. 그 가운데는 회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회칙을 무책임하게 인용하는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독서 가이드’의 형태로 회칙을 철저히 이해하고 생활의 반성을 구체적으로 이끌어내는 외국의 활동에 비해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러나 회칙을 사목문서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각 나라가 놓인 현실을 회칙에 따라 분석하고 행동지침을 이끌어내는 아시아 각국의 반응에서 이 회칙의 진정한 효력을 거듭 확인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여섯 차례 연재한 것은 회칙의 확고한 기반,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 논리적 전개 과정을 꼼꼼히 정리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회칙이 교회 안에서 우리의 회심과 생태환경 운동을 올바르게 이끄는 지침서로 활용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겨울부터 시작하여 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파리 기후변화 협약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규제효과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회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교회 안팎에서 그 열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나 생태환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찬미받으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방식과 영성의 지침서로서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희망이며 믿음이다.

 

다양한 학문과 활동과 소통하며, 세상에 대한 광란의 질주를 어떤 지평에서 왜 멈추어야 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선회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한 회칙의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높이 드러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나라의 주교회의 문헌이 인용되었지만 한국 주교회의 문헌은 없었다는 비판이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외국어 번역 작업을 소홀히 한 이유도 있겠지만, 철학적 신학적 성찰을 치밀하게 전개하여 이론을 구축하고 그 위에서 활동하려 하지 않았던 우리의 접근방식도 반성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은 성경과 성전이라는 두 개의 축이 뻗어온 신학적 성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전개되는 거대한 강물이다. 그런 한에서, 국지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신학이나 신앙을 연관시킬 때 반드시 철저한 검증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철저함의 부족이 교회의 여러 사회활동에 대한 신자들로부터의 불편함의 호소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우리가 신앙하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내용이 온 우주와 인간의 존재 가치, 관계성 이해에 풍부한 영감과 힘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이나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에 비해 조금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학과 여러 학문들의 소통에 어떤 자세로 다가서며 협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이다.

 

더 나아가 회칙은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창조와 구원, 종말 신앙과 영성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무엇보다도 회칙은 하느님을 관상하는 일이 신비적 체험의 일시적 순간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일, 모든 존재 안에서 우리 존재의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확인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일이 관상이다. 또한 이러한 관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회심이자, 하느님 나라를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나와 이웃, 사회와 자연의 모든 관계를 하느님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창조의 시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 영성이 관상의 열매임을 회칙은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 회칙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 기도는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나 머리와 마음으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온 존재와 삶으로 바치는 회심의 기도이며, 투신의 기도, 의탁의 기도, 관상의 기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가족, 인류 공동체와 생태적 형제자매를 위해 겸손과 절제와 검소함을 선택하는 기도를, 소비주의의 유혹을 거부하고 나눔과 섬김과 찬미의 기도를 실천하는 약속을 다짐해 본다.

 

* 유흥식 라자로 주교 - 대전교구장, 현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6월호, 유흥식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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