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연중 15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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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7-16 ㅣ No.200

연중 15 주일 ( 나해 )

        아모스 7,12-15      에페소 1,3-14      마르코 6,7-13

    2000. 7. 16.

주제 :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보이는 어리석은 행동

무더운 여름입니다.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쉽게 변할 수 있는 계절입니다. 이런 때 어떻게 살아야 삶에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겠는지 옳은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내 밥 먹고 살아가는 우리가 듣기 싫은 소리 가운데, '식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찮은 벌레라고 했으니 좋지 않은 것이고, 그 벌레라는 대상이 바로 '자신'을 가리킬 때에는 더 많이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가리켜 그렇게 부르는 말이 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것을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이용하면서 막상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다른 생명체에 도움되는 이렇다할 만한 것을 남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끔씩은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인상을 찡그리게 하는 모습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도 그것은 개인이 유지해온 삶의 결실이지만, 그렇게 자신만 만족하고 사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허락 없이 그저 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행복이나 삶의 평안함도 저절로 굴러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뒷면에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가꾸는지 걱정하시는 분, 하느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반은 사랑으로 반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복음에 나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제자들이 과연 홀로 설 수 있는지 시험하는 무대를 마련합니다. 세상을 삭막하게 하는 '악령'을 제압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주고, 제자들이 가져야 할 물질의 최소한의 조건을 채운다음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조건을 채워주는 것은 좋은데, 예수님이 허락하신 것은 '지팡이 한가지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일하는 사람'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광야가 많습니다.  그곳을 통과할 때 뱀이나 전갈에 대한 위험에서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은 바로 이 지팡이가 맡은 것입니다. 그런 보장을 받고 떠난 제자들의 마음은 몰라도, 예수님 앞을 떠났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삶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무시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이 모여서 엄청난 것을 이루고 결국에는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커다란 힘이 되어 우리에게 결과로 되돌아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산에서 출발한 빗물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7월을 지내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초창기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발 아래를 살펴보고, 걸음을 내디뎌야 아무런 문제도 만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에 논두렁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묵은 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고 돌인 줄 디뎠다가 신발을 잃어버린 일도 있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쉽게 보고 빨리 판단했기에 생기는 오류이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훨씬 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 삶에 반복되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도 사람의 욕심이 앞서면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예언자 '아마지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위상을 세우고 밥 벌어먹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아마지야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던 예언자 아모스의 등장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되게 큰소리칩니다. '네가 활동하는 곳 베델은 네가 전하는 하느님보다 더 높은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인간제도인 왕(王)이 하느님보다 더 놓은 위치에 올라갔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일입니다. 그때부터 3천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말을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큰소리치는 사람은 뭔가 확실하지 않은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붙잡아매고 버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사도의 말에서, 농부요 목동이었던 아모스가 북쪽 왕국 이스라엘에서 선포하는 말에는 큰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 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라놓아서 이득을 볼 수 있는 힘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런 어부지리를 취하는 사람은 아마도 정상적인 삶의 자세를 갖지는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오늘 하루만 농민들을 생각하는 날은 아닙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물이 없어 쩔쩔매던 사람이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이제는 양수기로 물을 퍼내야 하는 걱정과 고민을 겹쳐서 하는 사람들이 농민입니다. 요즘에는 하늘이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을 할만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탓은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일들의 결과에 따라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내가 만들어내지 않은 일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 세상살이이지만, 아무런 보상없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선물을 받는 사람으로서 행동할 일은 정해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는 좋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억을 남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억을 남겨줄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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