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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3-5: 시노달리타스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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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2 ㅣ No.754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3) 시노달리타스란 무엇인가? ①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 자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비교적 최근에 사용되기 시작한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성경과 교부들을 비롯한 거룩한 전승에 의한 것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론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출현한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는 라틴어 ‘시노두스(Synodus)’의 영어식 표현으로, 어원은 그리스어 ‘쉰(σύν: 함께)’과 ‘호도스(ὃδοϛ: 길)’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 ‘(어떤 것의) 성격, 정신’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tas가 붙어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시노드의 특성’ ‘시노드 정신’*이라고 풀이될 수 있습니다.(*이 용어가 더 적합하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입니다)

 

그 전에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공동합의성’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사용해 오다가, 이 단어가 지닌 한계와 해석의 오해를 감안하여, 2021년 주교회의에서는 라틴어 발음 그대로 ‘시노달리타스’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직 이 표현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노달리타스라는 단어의 내용입니다. 표현이 생겨난 배경 그대로 ‘시노드’라는 교회 전통 제도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원리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알고, 나아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대로 “말로는 표현하기 쉬운 개념이지만, 실천하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노달리타스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언급한 가장 중요하고도 명확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생활 방식이자 활동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분명 제도와 구조를 갖춘 가시적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교회헌장 8항)로서 그 구성원은 그에 맞는 고유한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사회의 방식대로, 사회의 논리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삶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이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의사 결정이나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모든 구성원이 공통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저마다 고유한 몫을 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4) 시노달리타스란 무엇인가? ②

 

 

앞서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어의 합성어로서 ‘함께 가다’라는 직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도 존재합니다. ‘함께(Con)’ ‘모이다(cilium)’라는 의미의 합성어인 ‘콘칠리움(Concilium)’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이 단어는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공의회’로 번역되는 단어이지요. 본래의 어원에 따르자면 두 단어 모두 ‘다른 곳에 있는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함께 하는 것’이고,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동일한 목표를 향해 문제를 연구 및 검토하고 효과적인 해결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함께하는 모든 과정’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시노드’나 ‘공의회’가 근본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교회가 “함께 가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노드’와 ‘공의회’는 어원상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실제로 초기 교회에서는 이 두 용어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점차 교회가 제도화됨에 따라 그 개념이 분리되어 ‘공의회’는 ‘의결 투표권을 행사하여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로, ‘시노드’는 ‘건의 투표권을 행사하여 의견을 나누어 자문하는 회의’로 자리 잡고, 이 구분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를 통해 법제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결권(결정의 권한)을 지니고 있는 공의회는 끊임없이 그 중요한 위치를 잃지 않은 반면, 자문의 권한만을 가지고 있는 시노드는 점차 교회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가 잊혀 왔습니다.

 

그러나 의결권의 소유 여부를 막론하고, 두 용어는 모두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특성을 잘 보여 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삶에 위기를 초래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함께 모여” 성령 안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을 선포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사도 15,1-22)에서 이미 그 근원적 형태가 나타났고, 2천 년 교회 역사의 곳곳에서 그러한 노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단순한 결정에 의해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사람들 가운데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2023년 3월 12일(가해) 사순 제3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5) 시노달리타스란 무엇인가? ③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는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보편 교회’는, 교회가 모든 시간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와 인종, 문화와 시대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개별 교회’는 하나인 교회의 ‘지역적 구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개별 교회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교구’ 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개별 교회는 보편 교회의 하급 행정 단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각 개별 교회 안에 교회 자체가 현존하고 활동하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23항은 이러한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라는 가톨릭교회의 특징적 구조와 일치적 관계에 대해, ‘개별 교회는 보편 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개별 교회들 안에 또 개별 교회들로부터”(in quibus et ex quibus) 유일하고 단일한 가톨릭교회가 존재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시노드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교리와 신앙 내용이 우리의 개별적인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를 논의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식별하는 시노드적 여정이 교회의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하느님 백성은 같은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걸어야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말입니다. 함께 걷는 교회는 태생적으로 ‘공동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가 속한 개별적인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삶이 이루어질 때,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함께하려면 ‘친교’가 필요하고 ‘참여’해야 하며, 공동체적 ‘사명’을 위해서는 함께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노드적 삶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본당, 단체 등)는 시노드적인가요? [2023년 3월 19일(가해)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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