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강론자료

2023-04-23.....부활 제3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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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3-04-22 ㅣ No.2379

                                                                 부활 제3주일 (가해)

사도행전 2,14. 22-33              1베드로 1,17-21                  루카 24,13-35

2023. 4. 23.

주제 : 내가 이해하는 부활은?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앙의 중심의 내용인 부활을 어떻게 알아듣는 사람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궁금해서 물을 이웃에게 부활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받아들인 부활에 관한 신앙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람이 알아야 면장이라도 한다는 묘한 표현도 있습니다만, 신앙에 관련된 것도 정확하게 알아야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 뒤 맞이하는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증거하는 날이라고 강조하지만, 실제로 부활을 기념하고 말하는 날의 앞과 뒤, 몇 차례를 빼고서는 주일마다 부활에 관한 내용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復活)’이라는 사건은 하도 기본적인 것이라서, 우리가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안다고 말하는 의도일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수난 성금요일부터 계산한 세 번째 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설명한다거나 여러 가지 표현을 담아서 설명하려고 해도, 부활에 관한 내용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듣는 일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부활을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일로 대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 부활은 내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체험할 일은 아니기에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2023, 현실에 사는 우리보다 부활에 관한 말씀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표징이나 기적들도 훨씬 많이 체험했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던 두 사람이, 여자들이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일찌기 찾아갔던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그날 저녁 시간에 엠마오에 들어서기 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사건이었습니다. 그 두 제자는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면서 어떤 말을 주고받았겠습니까?

 

클레오파스와 그 동료가 길을 가던 현장에 우리는 없었기에,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모른다고 말하기가 쉽지만, 루카복음사가가 전하는 내용을 읽으면 그 내용을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걸어가면서도,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도,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예수님에게 핀잔(못마땅하게 여겨 맞대놓고 꾸짖음)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그 놀라운 일을 알지 못한다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드러낸 감정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하여 성경을 설명하셨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예수님에 관한 기록인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부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부활을 말로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믿고 따를 것을 말하고,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는 자세로 삽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면 다 알았을 놀라운 일을 몰랐던 예수님의 행동과 그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면서도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는 이 두 가지의 사실에 불협화음은 없을까요?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이었는데도, 그 일이 무엇이냐고 되물은 예수님을 보면서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신앙의 자세는 그래서 어렵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머리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고 해도, 믿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 내용을 드러내는 일을 우선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올바르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엠마오에 도착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한 장소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미사, 예수님의 몸을 우리가 현실에서 나누면서 생명의 빵을 우리가 현실에서 나누는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예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다시 만났고, 자기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깨달았고, 한밤중이었는데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에 수없이 반복되지만, 우리가 그 내용을 매 순간 깨닫는 일은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일을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를 만난 일보다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베드로사도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한 이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산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할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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