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2015-1105.....연중 제3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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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11-04 ㅣ No.1903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홀수 해

로마서 14, 7-12          루카 15, 1-10

2015. 11. 5. 이태원

주제 :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삽니다. 이렇게 말할 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일 것이고, 가족이나 공동체 혹은 국가의 순서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감각의 세상에서 통용될 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특별한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좋고도 훌륭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정말로 세상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서 한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그것을 최고의 목적이라고 일컫겠지만, 분명히 그보다 더 나은 힘과 의미를 주는 목표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들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그 특별한 대상을 바로 주님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바오로사도가 부르는 이 주님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차원을 넘는 대상입니다. 바로 만물의 주재자요, 심판자라는 소리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도 그렇게 표현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사실 그 대상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세상에 묶여있는 한계가 있는 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무슨 힘이 있어서 무한하신 분을 위해서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니까, 말로 하지 못할 없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논리상으로 아주 큰 허점이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리상의 허점을 어떻게 해석하면, 그런 오류가 드러나지 않고, 우리가 올바로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하기는 쉬워도 대답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것에서도 마찬가지 태도일 것입니다.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으면, 아흔아홉 마리는 그냥 내버려두고 잃었다가 찾은 한 마리를 삶의 중심에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해서 길을 잃었다가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양이라면 바로 우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같은 일은 은전 아홉 닢을 놔두고 한 닢을 잃었다가 다시 찾아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쁨을 요청하는 자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논리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판단기준은 다릅니다.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주시라고 청할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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