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5: 관상적 시각으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 얼굴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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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01 ㅣ No.1491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5) 관상적 시각으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 얼굴을 찾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하느님의 모상, 즉 그분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관상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늘로부터 옥좌가 내려오는 환시를 보고 있다. 조토, ‘프란치스코의 환시’, 프레스코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사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물질적 가난에 대해서 상당한 강조점을 두었지만, 그들이 극단적인 가난을 살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대한 주도권을 지니고 계시다는 믿음을 온전히 고백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가난은 우리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수단이나 인간의 공로를 쌓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과 사랑에 특별한 감사를 드리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의 가난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모든 선물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자 하는 전적인 겸손과 감사의 마음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물질적 가난은 우리를 상호 보완과 의존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는 가난으로 이끌어주는 것일 때 참된 의미의 가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하지만 그분의 전능하심은 그분의 무한한 선에서 나오는 것이지 세상의 절대 군주들이 힘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권력이나 권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분을 완전한 선으로 받아들였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더 깊이 응시해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은 고통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선으로써, 세상을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참된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십자고상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응시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면 그 누구라도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하느님’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십자가상 예수님 제사의 재현인 미사 성제(감사제)를 자세히 바라보게 되면, 하느님께서 제사의 성격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감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미사 성제를 통해 우리가 드리는 제사 음식을 받아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사 음식인 당신 몸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가난이고 하느님의 선이며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구원, 즉 완성에 이를 수 있다.

 

 

7.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관상적 시각으로 세상을 봄

 

요즘처럼 서로 간의 끈끈한 정은 사라져가고 경쟁적인 긴장 속에서 외면과 결과와 효과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하느님 얼굴을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하느님 모상, 즉 하느님과 하나 되고,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그분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의지마저 찾아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살았던 시대 상황보다도 더 복잡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이 새롭게 겪는 불안과 혼란이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상황보다도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기에 지금 우리의 이런 각박하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조금 더 인내심 있게 시간을 내고 하느님의 선을 기다리는 거지로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는 40일간의 사순 시기를 한 해에 여러 번 지냈다고 하는데, 어떤 해에는 일 년에 다섯 번의 사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그가 얼마나 주님과 만남에 심취했고 그 만남을 중요시했는지를 잘 암시해주는 사실이다.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여기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 주도권을 넘겨드리는 일이다. 요즘은 더욱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하느님께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드리면서 그분의 선을 세상과 모든 사람을 통해 보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때다.

 

성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인류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세 권의 책을 써 주셨다고 말한다. 첫째는 ‘창조의 책’, 둘째는 ‘성서’, 셋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인 ‘생명의 책’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얼을 담고 있기에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그분의 마음과 뜻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기울어지려는 경향이 인간 내면의 하느님 모상의 눈으로써 창조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능력을 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야말로 당신의 계시를 담은 책을 인간에게 주신다.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인간에 의해 쓰인 성서에 대해서는 하느님을 계시해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달리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조금 특별하게 나누고 싶은 것은 바로 보나벤투라가 언급한 ‘생명의 책’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모든 열쇠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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