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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7-10: 성경에서의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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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2 ㅣ No.756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7) 성경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구약 ①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노드’라는 교회 고유의 제도가 그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보편 교회 차원에서의 ‘세계 주교 시노드’가 제정된 지 50주년이 되던 때의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노드’라는 단어 안에 이미 모두 담겨 있다.”

 

이처럼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 자체는 우리에게 생소한 신조어이지만 그 기원과 특징은 이미 성경에서부터 잘 드러납니다. 먼저 구약을 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 백성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사회적 흐름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공동체’로 이해됩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친교의 표지 아래 그분과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증언”(창세 1,26-28 참조)합니다. 또한 개인의 구원만을 지향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하셨던 하느님의 원의에 따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본래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함께 가는 공동체’로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 이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시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불러 모으시고(신명 4,10 참조),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바로 이 백성 공동체는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셨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모인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여기에서 이 ‘불러 모으셨다’는 데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카할’인데, 이 단어는 훗날 희랍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로 번역돼 ‘교회’라는 말로 전승됩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시종일관 당신의 백성을 공동체로 부르셨기에, 교회는 ‘함께 가는 공동체’가 그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3년 4월 2일(가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8) 성경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구약 ②

 

 

구약의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 구원 행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인데, 시노달리타스와 관련된 중요한 용어는 모두 이 탈출 사건과 깊이 관련됩니다. 칠십인역 성경은 탈출기 이름을 ‘탈출의 길’이라는 뜻의 ‘엑소도스(ἔξοδος)’라고 붙였고, 이로써 백성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이 선명히 드러났으며, 이 길은 분명 백성이 ‘함께’ 가는 ‘길’이기에 훗날 ‘시노도스=시노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하느님을 따르는 백성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시노드 여정의 동반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여정의 동반자에는 남자들만이 아니라(탈출 24,7-8 참조),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외국인들도(여호 8,33.35 참조) 포함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시노드적 삶에도 이처럼 차별이 없어야 함을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함께’ 광야를 지나는 그 백성의 지도력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모든 갈등은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라 해결되었습니다. 이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살아가던 존재 방식은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탈출 18,13-27>과 <민수 11,16-17>이 대표적입니다. 모세가 온 백성을 위해 짊어지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탄원하자 하느님께서는 백성 가운데 다른 유능한 사람들 또는 원로들을 세워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어’ 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의 짐을 덜어 주십니다. 이것은 지도자인 모세뿐만 아니라 다른 하느님 백성들 또한 ‘능동적이며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몫을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약속한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어 ‘당신의 뜻에 충실하면서 길을 따라 걸으라는 요구’를 일깨우셨습니다. 여기에 예언자는 하느님 백성 내부의 의견 교환, 일치, 의사 결정 등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백성의 생활 방식이자 활동 방식인 시노달리타스는 이미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23년 4월 16일(가해)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9) 성경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신약 ①

 

 

구약 성경에서 드러난 시노달리타스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으로서 당신의 케리그마1)를 통하여, 그리고 당신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은총으로 ‘온 인류’ 를 일치 안에 끌어안고자 하시는 사랑의 친교이심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면서, 결코 혼자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순례자이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예수님께 배웠고, 그 길에서 삶과 행동의 방식을 복음적으로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불러 모으신 이 사람들이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각자 당신께 오고, 제각각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구원을 향해 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활동하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새 계명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받아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혼자 고립된 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을 향해, 타인과 함께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로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살아 있는 표상을, 우리는 루카 복음서 저자가 묘사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루카 24,13-35)에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새 계명의 기준에 따라 하느님과, 또한 이웃들과 친교를 이루고 살도록 초대받은 교회 구성원 모두는, 역사 안에서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이 받은 선물에 합당하게 걸어가는 시노드적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2023년 4월 23일(가해) 부활 제3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10) 성경에서의 시노달리타스 : 신약 ②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로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교회는 말씀과 성찬의 나눔을 통해 시노드적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하느님 백성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공동체적으로 식별하도록 부름받았던 초대 교회의 몇몇 중요한 순간들을 증언합니다. 특히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부활하신 주님 현존의 빛을 통하여 자신의 소명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노드적 사건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교회 안에서 거행된 시노드들의 원형적 모습으로 해석됩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의 직접 목격 증인으로서의 고유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연설을 듣고 온 회중이 잠잠해졌고, 다른 사도들의 증언도 모두가 ‘귀 여겨 들었습니다’. 또한 이 공동체에는 사도들만이 아니라 원로들도 있었는데, 이들 또한 중요한 역할들을 맡았음이 드러납니다. 즉, 사도들은 사도들대로, 원로들을 원로들대로 각기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교회 공동체의 일에 온전히 수동적인 태도로 사도들과 원로들에게만 의존하거나 방관했던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각자의 역할과 기여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그 과정에서는 모든 이가 다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공동체의 문제에 있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식별하기 위해서 ‘모두가 함께’ 모였고, 그래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결정”(사도 15,22) 하였으며, 결국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는 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공동체는, 권위에 있어 일종의 질서와 고유성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교회 공동체 전체가 교회의 삶에 관련된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길을 가는 데에 있어 어느 한 사람이 혼자 모든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그러나 “분화된” 책임을 지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노드적 교회의 표상을 보여 줍니다. [2023년 4월 30일(가해)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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