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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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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587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

 

 

줄여서 ‘사목헌장’이라고 부르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6편 가운데 ‘교회헌장’과 함께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꼽힌다. 많은 학자들은 사목헌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백미’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내년이면 폐회 50주년이 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취지와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문헌이 사목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전 공의회들과 크게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공의회 소집의 뚜렷한 동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의 경우 많은 이들이 그저 ‘과도기 교황’ 쯤으로 여겼다. 78살의 고령에 교황으로 선출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교황직에 오른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발표했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방안에 채우기 위해 창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요한 23세 교황의 공의회 소집 동기였다.

 

말하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리상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교회 안의 규율이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공의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문을 열고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방안에 들여보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던 교회가 세상에 문을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교회 자신을 급변하는 세상 속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듯이, 교회가 땅 끝까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세상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의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 동기였다.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백미’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 가지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다.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고,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며, 교회가 하는 일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4개 헌장과 9개 교령과 3개 선언으로 이뤄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다.

 

그 가운데 교회를 새롭게 이해한 대표적 문헌이 지난 호까지 살펴본 교회헌장이다. 또 ‘교령’이라고 불리는 문헌들은 교회가 하는 일을 새롭게 이해해서 내놓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목헌장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교회의 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문헌이다. 따라서 사목헌장에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가 하는 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세 가지 새로운 이해가 함께 들어 있다. 사목헌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백미’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공의회 개막 초기에는 초안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사목헌장과 같은 문헌을 발표한다는 견해가 표면화한 것은 공의회 제1회기 말인 1962년 12월이었다. 제1회기가 끝나고 난 휴식기에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효과적 존재에 관해’ 라는 제목의 짧은 초안이 마련됐다.

 

요한 23세 교황의 후임인 바오로 6세 교황은 1963년 9월 제2회기 개막 연설을 통해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 문제를 주요 과제로 다룰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사목헌장 의안이 꼴을 갖춰 공의회에서 다시 논의된 것은 1964년 9월에 시작된 제3회기 때였다. 공의회의 열세 번째 의안이라고 해서 제13의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의안은 열띤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개정안 작성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제4회기에서도 수정과 보완이 거듭되면서 공의회 폐회 전날인 1965년 12월7일에 통과돼(찬성 2309, 반대 75, 기권 7) 반포됐다. 사목헌장이 반포되기까지 과정이 그만큼 험난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사목헌장이 교회와 세상에 미칠 파장이 그만큼 크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보편공의회가 21차례 열렸고, 수많은 문헌이 반포됐지만, 사목헌장과 같은 성격을 띤 문헌은 없었다. 헌장 제목인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으로 시작하는 사목헌장은 첫머리부터 색다르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1항). 이 첫 문장은 사목헌장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준다.

 

 

사목헌장은 성과 속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는 성과 속을 구별했다. 교회는 거룩하며, 교회 밖 세속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세속은 교회와 별개이고 거룩하게 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성과 속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면 그것은 바로 신자들, 곧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은 교회의 기쁨과 희망이요, 세상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는 교회의 슬픔과 고뇌다. 한 마디로 “교회는 인류와 인류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1항). 이것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가 이러하기에, 교회는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4항)고 사목헌장은 밝힌다. 여기에 사목헌장의 또 다른 새로움이 있다.

 

이전까지, 교회는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주로 연역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먼저 교회가 믿고 선포하는 진리를 밝혔다. 다음에 현재 상황이 이 진리에 비춰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사목헌장의 방식은 다르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한다’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사목헌장은 먼저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해 이를 복음의 진리에 비춰 식별하고 판단한 다음 실천 방법을 제안한다. 사목헌장은 귀납적 방법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을 원용해 현대 세계와 대화를 시도하고 세상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한다.

 

 

그 대상을 가톨릭 신자에 국한하지 않아

 

나아가, 사목헌장은 그 대상을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른 문헌들은 일차적으로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한다. 일부 문헌들은 비가톨릭 신자나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 대상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신자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다르다.

 

사목헌장은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2항)고 언명한다.

 

사목헌장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본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머리말에 이어 서론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 제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 맺음말 등 전체 93개 항으로 이뤄져 있는 사목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전체 16편 가운데서 가장 분량이 많다.  

 

머리말(1~3항)은 헌장의 공포 목적 혹은 취지를 말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목헌장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교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축은 물론 인간, “육신과 영혼, 마음과 양심, 정신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인간”(3항)이다. 인간을 중심축에 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돼야 하기”(3항) 때문이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회를 대화의 중심축으로 제시한 후 논의를 시작한다.

 

그 출발점은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구체적 상황, 곧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이다. 서론(4~10항) 이 부분을 다룬다. 다음 호에서는 서론 부분을 살펴본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3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2)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사목헌장 4항).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사목헌장의 서론(4~10항)은 바로 이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공의회 교부들은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또 이 상황을 통해 읽은 시대의 징표는 무엇인가? 공의회 교부들은 이 시대가 급격한 변화의 상황, 변혁의 상황이며, 이 변화와 변혁이 인류에게 한 편으로는 희망을, 다른 편으로는 고뇌를 안겨 주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희망과 고뇌의 와중에서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계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서로 물어보며 불안에 짓눌려 있다”(4항)고 진단한다.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현대 세계의 급격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한다. 과학 발전은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방식을 지어내고 있고, 과학의 소산인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면모를 바꿔 놓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우주 정복에까지 나서고 있다. 인간 지성은 과거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예측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됐고, 생물학과 심리학과 사회학의 진보는 인간이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기술을 활용해 사회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도와준다. 역사 자체의 흐름도 개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됐을 뿐 아니라 “정적인 세계관에서 더욱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다”(5항). 이로 인해 방대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수많이 새롭게 발생한다.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복잡한 문제 야기해

 

그 대표적인 것이 사회 질서의 변화다(6항). 산업화가 확산되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은 다양한 사건들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사상과 감정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면서 많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던 고향과 익숙했던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이주해 생소한 생활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러한 산업화, 도시화, 사회화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하지만 “사회화가 언제나 적절한 인격 성숙과 진정한 인간화를 증진하지는 못하고 있다”(6항)는 것이 공의회 교부들의 관찰이다. 

 

이런 변화들은 가치관과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기존 가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젊은이들에게서 특별히 그러한데, 이로 인해 부모들과 교육자들은 갈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이전의 제도와 법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오늘의 상황에 언제나 적합하지는 않다.

 

이에 따라 행동 방식과 규범에 중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고, 이런 상황은 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예리한 식별력이 마술적이고 미신적 세계관에서 종교를 정화하고 더욱 인격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한다.

 

반면에 또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종교 생활에서 멀어지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신과 종교를 부정하거나 거기에서 이탈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인본주의의 요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무신론적 인본주의 경향이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는 사람들을 동요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7항).

 

공의회 교부들은 이런 급격한 변화가 현대 세계에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심화시킨다는 점을 주목한다(8항). 우선 인간 자체에서는 △ 실천적 지성과 이론적 사색 사이에 불균형이 일어나 혼란을 겪고 있고 △ 실용과 능률의 추구와 도덕적 양심의 요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또 △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과 개인 생활을 위한 사색과 명상의 요구 사이에서도 불균형이 자주 생기고 △ 사안을 전체적으로 보려는 전망과 국지적이고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활동 사이에서도 불균형이 일어난다. 

 

가정과 관련해서는 △ 가족 수, 경제적 문제, 사회생활에서 오는 압박 등으로 인해서 △ 세대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에서 △ 남녀 간의 관계에서 불평등이 생겨난다. 나아가 △ 종족들 사이에서 △ 사회 여러 계층 사이에서 △ 평화를 염원해서 만든 국제기구들과 국가 혹은 단체의 집단적 탐욕 사이에서도 커다란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다. 

 

이로 인해 상호 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이 발생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원인이 바로 인간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희생되는 제물 또한 인간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처럼 현대 세계의 급격한 변화 양상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다양한 불균형 및 불평등 현상을 직시하지만 이를 모두 부정적으로 여기지만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9항).

 

 

불균형, 불평등 현상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아

 

교부들은 이렇게 관찰한다. “그러면서도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날로 더욱 강화할 수 있고 또 강화하여야 한다는 인류의 확신이 커져 간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날로 더 나은 봉사를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성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그러한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는 확신도 커져 가고 있다.” 

 

이런 긍정적 전망의 근거로, 공의회 교부들은 많은 이들이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불의와 불공정, 불균형과 불평등에 대한 시정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리고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더 깊고 보편적인 열망’이 있다고 본다.

 

곧 “개인과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만족스럽고도 자유로운 삶, 현대 세계가 인간에게 그토록 풍요롭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누리는 그러한 삶을 갈망하고 있다”(9항)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은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선을 이룰 수도 있고 최악을 저지를 수도 있다.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형제애와 증오의 길이 함께 열려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비롯한 힘들이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공의회 교부들은 여기서 문제의 근본을 직시한다. “참으로 현대 세계를 괴롭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힌 더욱 근본적인 저 불균형에 직결돼 있다. 바로 인간 자체 안에서 여러 요인들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10항). 실제로 인간은 숱한 유혹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취사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이미 잘 간파한 것처럼, 인간은 선을 바라면서도 그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저지른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을 겪고 있으며, 허다한 사회 분쟁도 근원적으로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사람들은 태도는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문제의 본질 자체를 외면하면서 살고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 문제에 짓눌려서 이런 문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낸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체념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상황을 직시하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문제의 근원을 예민하게 절감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그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고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지상 생활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공의회 교부들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목헌장’을 발표한 궁극적 목적도 여기에 있다.

 

다음호부터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지 ‘사목헌장’의 본론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4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3)

 

 

사목헌장의 본론은 제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11~45항),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46~90항) 등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제1부는 다시 인간의 존엄, 인간 공동체, 인간 활동, 그리고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 임무 등 4장으로 나뉜다. 이번 호에서는 그 가운데 첫 장인 인간의 존엄(12~22항)에 대해 살펴본다.

 

인간은 존엄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세상 만물의 중심이요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존엄한 진짜 이유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됐기 때문이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기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져 만물을 다스리고 하느님을 찬양한다”(12항). 나아가 인간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돼 본성상 “사회적 존재”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전한다(창세 1,31).

 

그런데 현실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뜨리곤 한다. 그것은 “인간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해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 제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13항) 때문이라고 공의회 교부들은 본다. 인간이 역사의 시초에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데, 이 원죄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자신 안에서 분열돼 있는 것은 이 원죄의 결과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분열된 인간 모습을 살핀 후 인간의 여러 특징을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한다. 먼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룬다”(14항). 이것은 인간이 육체나 육체적 생활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자기 육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요구하고,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요구”(14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한낱 육체로만 이뤄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은 육신성, 곧 물질세계를 초월한다.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인간의 내면, 곧 마음속에서다.

 

 

인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만 온전히 밝혀져

 

인간은 또한 “자기 지성으로 만물을 초월한다”(15항).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나약해지기는 했지만, 인간 지성은 현상 세계를 넘어 ‘실재’, 곧 하느님을 참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단언한다.

 

도덕적 양심은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이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천명한다.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른다.···이렇게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다”(16항).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인 양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은 또한 자유로운 존재다. 인간의 자유는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악이라도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방종’과는 다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방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유의지로 창조주를 찾아 그분을 따르며 충만한 완전성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참 자유가 원죄로 말미암아 손상됐다. 이렇게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17항)고 헌장은 밝힌다.

 

그런데 인간의 신비는 죽음 앞에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죽음 앞에서 절정을 이룬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하지만 교회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 앞에서 죽음이 그 위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인간이 자기 죄로 잃어버린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원자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에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이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하고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거두신 것이다”(18항).

 

실제로 인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만 온전히 밝혀진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한결 같은 가르침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첫 인간 아담과 대비되는 새 아담이다. 첫 아담은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범함으로써 우리 안의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흐리게 했지만, 새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는 이지러졌던 그 모습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얻어 주셨고, “우리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22항). 물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도 수많은 환난 속에서 악을 거슬러 싸우고 죽음까지도 겪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라고 공의회 교부들은 단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인간의 신비이고, 여기에 인간의 존엄함이 있다.

 

 

신앙인들 자신도 무신론에 어느 정도 책임 있어

 

인간의 존엄을 다루는 제1장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무신론에 관한 대목(19~21항)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불림을 받은 존재라는 데 있지만, 무신론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현대 무신론의 다양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놀라운 통찰을 제시한다.

 

무신론은 원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에서 생겨나며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19항)는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19항).

 

그렇다면 이런 무신론에 대해 교회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나.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무신론의 문제들을 진지하고 깊이 있게 검토해야 한다고 교부들은 제시한다. 이와 관련, 교회가 확실하게 내세워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절대 배치되지 않으며, 둘째, 종말론적 희망 곧 내세의 희망이 현세 임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지상임무 완수에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신론에 대한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해야 한다”(21항)고 사목헌장은 적시한다. 무신론자들만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혹시 교회 공동체가 그 가르침이나 삶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참 모습을 가리거나 흐리게 하기 때문은 아닌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제시한다. “교회가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아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이다”(21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5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4)

 

 

인간 공동체에 관한 사목헌장 제1부 2장(23~32항)은 공동체적 존재인 인간의 소명이 지닌  공동체적 특징을 언급하면서 이 소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원칙과 실천적 노력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스도교 계시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가족을 이룬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셨다”(24항).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웃을 형제처럼 대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실제로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첫째가는 계명이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22) 하고 기도하신다. 이 기도는 모든 사람이 형제애로 서로 일치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상기시킨다.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이 가르침은 바로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징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 서로 맺는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개인의 성장과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성장은 긴밀해 결부돼 있다. 그래서 헌장은 이렇게 밝힌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상호 의무, 형제적 대화 등으로 되도록 자신의 모든 재능을 키우고 자기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25항). 

 

하지만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선이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곧잘 경험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 오만과 이기주의가 사회 영역까지 부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줄기찬 노력과 은총의 도움 없이는 이를 이겨낼 수 없다”(25항)고 헌장은 지적한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 서로 맺는 관계 속에서 성장

 

그러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공의회 교부들은 추구해야 할 원칙 또는 실천해야 할 노력으로 △ 공동선의 증진 △ 인간 존중 △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 책임과 참여 등을 꼽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공동선의 증진(26항) : 공동선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를 말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표현이다. 다른 식으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인격적 성숙과 완성을 이루어가는 데는 내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주변의 여러 조건들이 이를 뒷받침해줘야 가능하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함께 하는 공동체 전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개인이든 공동체든 모두가 자기완성을 이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생활의 여러 조건들 전체를 가리켜 ‘공동선’이라고 한다.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요구되는 것들이 있다. 1) 권리 주장 못지않게 의무 이행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정당한 요구와 열망을 존중해야 한다. 2) 사회 질서와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도록 해야 한다.

 

인간 존중(27항)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 이웃의 생활을 고려해 그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을 보살펴야 하고 △ 우리 양심에 호소하는, 굶주리는 이들은 도와줘야 한다. 또 △ 낙태와 살인, 안락사, 자살 등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행위 △ 지체 상해, 고문 등 인간 신체에 폭력을 행하는 행위 △ 인신매매, 매매춘, 불법 감금 같은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 △ 노동자를 이윤 추구의 도구로 취급하는 행위 등을 근절해야 한다. 이런 행위들은 인간 문명을 부패시킬 뿐 아니라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기 때문이다.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28항) : 헌장은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들과 더 쉽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과 호의가 진리와 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공의회 교부들은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오류와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류는 언제나 배격해야 하지만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은 “인간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정의(29항) : 사람에 따라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지적· 도덕적 역량이 다르기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성적 영혼을 갖추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돼 같은 본성과 같은 기원을 지니고 있으므로, 또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동일한 신적 소명과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의 근본적 평등은 더욱더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헌장은 강조한다. 따라서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극복되고 제거돼야 한다. 

 

나아가 인간들 사이에 정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등한 인간 존엄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나친 불평등을 줄이고 더욱 인간답고 공평한 생활 조건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고 헌장은 밝힌다.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30항) : 인간 공동체의 발전과 형제애 증진을 위해 반드시 노력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개인주의 윤리를 극복하는 일이다. 무관심이나 게으름에서 기인하는 개인주의 윤리뿐 아니라 △ 사회의 요청에 대한 외면 △ 법률이나 규정 혹은 사회생활의 규범에 대한 무시 △ 세금을 비롯한 여타 사회적 의무의 회피 등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개인주의 윤리를 극복하려면 “모든 사람이 사회적 연대 책임을 현대인의 주요 의무로 여기고 이를 존중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교부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 사회로 긴밀히 결부될수록 인간의 임무는 더욱더 전 세계로 확대돼 간다.

 

책임과 참여(31항) : 각 개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발전에 대해 책임 의식을 지니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과 이웃에 헌신하는 자기 소명에 부응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이 부여돼야 한다”고 헌장은 지적한다. 인간의 자유는 극도의 빈곤 상태에서는 무기력해지기 십상이며, 반대로 지나친 풍요 속에서는 가치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자기 역할을 책임 있게 받아들여 참여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의욕을 북돋워 줘야 한다. 이는 특별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인간 소명의 이런 “공동체적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성취되고 완성됐다”(32항)고 사목헌장은 제시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역사에 동참하셨을 뿐 아니라 그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주시어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형제적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이 형제적 친교와 유대는 끊임없이 증진되고 완성돼야 한다. 이 일은 우리의 노력뿐 아니라 은총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6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5)

 

 

인간의 소명과 교회의 임무를 다루는 사목헌장 제1부는 먼저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 살피고(제1장), 이어서 공동체적 인간이 지닌 소명과 이 소명 실현에 필요한 원칙과 실천적 노력을 고찰하고 있다(제2장). ‘전 세계의 인간 활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제3장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의 가치와 규범을 살피면서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입각해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이번 호에서는 이 3장(33~39항)을 알아본다.  

 

인간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고자 분투해 왔다. 특히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 예전에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인류는 목도하고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하늘의 힘에 기대했던 많은 복을 오늘날에는 이미 자신의 노력으로 마련하게 됐다”(33항)고 헌장은 밝힌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이런 인간적 활동과 노력에 관한 깊은 물음도 제기되고 있다. 핵무기 개발과 사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활동과 노력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한 결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인간의 노력과 활동이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근본적 물음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3장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교회 계시의 빛에 입각해 밝힌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인간의 노력,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되지 않아

 

공의회 교부들은 우선,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해온 인간의 노력은 하느님 계획에 부합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만물을 다스려 하느님의 이름이 온 땅에 빛나게 해야 하는 소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사회를 위한 거대한 집단적 노력뿐 아니라 개인의 모든 일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활동을 펼치고 자기 형제들의 이익을 돌보며 △ 개인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성취하는 데 이바지한다. 

 

여기서 한 가지가 확실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인간의 활동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자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의 결실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세계 건설을 외면하게 하거나 동료 인간들의 행복을 소홀히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활동을 하도록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 활동이 지향하는 것은 그 활동이 맺는 결실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시켜 나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오히려 어떤 존재이냐에 따라 가치를 지닌다”(35항). 그러하기에, 더 큰 정의와 더 넓은 형제애 그리고 더 인간다운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는 노력은 과학 기술 자체의 발전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기술 발전은 인간 진보에 물질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지만 결코 그 자체만으로 인간 진보를 실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또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한다. 기술 발전을 주도해온 과학적이고 이성적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이고 도덕규범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종교적 가치 혹은 신앙과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36항). 이와 관련, 교부들은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과거의 정신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중세와 근세에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적 탐구를 단죄한 사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현세 사물의 자율성’을 빙자해서 인간이 창조주의 뜻을 거슬러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회 교부들은 단호하게 천명한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다”(36항).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발전 혹은 진보란 이름으로 가치 질서가 뒤집히고 선과 악이 뒤섞여 유혹에 빠지고 타락에 떨어진 사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암흑의 세력에 대한 힘든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해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뿐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역사도 이 투쟁의 연속이다. 이 투쟁에서 인간은 선을 고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지적한다.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라”(12,2)고 당부하는데, 이 말은 암흑의 세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곧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안배된 인간 활동을 죄의 도구로 변질시키는 저 허영과 악의에 찬 정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37항)이다.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는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 불러일으켜야

 

사목헌장은 여기서 암흑의 세력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릇된 자기 사랑과 오만 때문에 날마다 위험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정화하고 완성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37항)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파스카 신비 곧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 활동을 새롭게 하셨다.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역사를 새롭게 재창조하셨다. 어떻게?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알려 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완성하고 세계를 개혁하는 근본 법칙이 바로 “사랑의 새 계명”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자가와 부활로 보여주신 사랑의 새 계명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일깨운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보편 형제애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이 사랑은 중대한 일만이 아니라 먼저 일상의 생활환경에서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이 사랑을 실천할 열망을 불러일으키시고 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고 북돋워주신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밝힌다. 이 희망을 보증하는 것이 신앙의 성사인 성체성사다. “성체성사는 형제적 친교의 만찬이며, 천상 잔치를 미리 맛보는 선취(先取)이다”(38항). 

 

공의회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새 하늘 새 땅’과 현세 생활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다. 첫째,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고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39항). 곧 천국의 영광을 그리는 것이 현세 생활의 도피나 무관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며, 그 반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돼야 하지만, 현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39항). 이로써 공의회 교부들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이 그리스도 왕국 건설이라는 그리스도인 본연의 사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는 제1부의 마지막 4장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에 대해 살펴본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7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6)

 

 

이번 호에서는 사목헌장 제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의 마지막 장인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40~45항)에 대해 살펴본다. 교부들은 이 장에서 교회헌장에서 표명한 교회 관을 간략히 언급한 다음, 교회와 세상의 상호 교류와 도움의 관계를 △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 △ 교회가 인류 사회에 주고자 하는 도움 △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인간 활동에 주고자하는 도움 △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받는 도움이라는 네 측면에서 제시한다.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기원한다. 곧 성부의 사랑에서 비롯하고, 역사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됐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인 공동체다. 이 교회가 추구하고 선포하는 구원은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성취되기에,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다. 하지만 교회는 이미 이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동시에 이 지상 국가들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류 가족과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돼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존재한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설파한다. 

 

교회의 이런 특성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원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인간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줄 뿐 아니라 그 생명의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치유하고 향상시키며 인간 활동에 더욱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인류 가족과 그 역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로서 교회는 또한 세상으로부터, 개인이나 인간 사회의 활동으로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실제로 받아 왔다.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41항) 

 

인간의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밝혀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에, 교회는 인간에게 그 고유한 실존의 의미, 곧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밝혀 준다.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하느님만이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더 인간답게 된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어떠한 인간의 법률도 교회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적절하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고 천명한다. 이 복음은 △ 하느님의 자유를 알리고 선포하며 △ 죄에서 나오는 온갖 예속을 배척하고 △ 양심의 존엄과 양심의 자유로운 결정을 존중하고 △ 인간의 모든 재능을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배가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의 사랑에 맡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율성을 결코 없애지 않으시며, 오히려 회복하고 강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증진하는 현대의 움직임을 존중하며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복음 정신에 젖어들어, 온갖 그릇된 자율에서 보호돼야 한다”고 헌장은 강조한다. 하느님 법의 규제에서 벗어날 때에 비로소 인간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보존되기는커녕 오히려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교회가 인류 사회에 주고자 하는 도움(42항)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적 사명을 고유한 목적으로 하는 교회는 특정한 문화 또는 특정한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오히려 인류 사회의 참다운 일치와 발전을 위해 가장 긴밀한 유대가 돼줄 수 있다. 또 이런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 간의 온갖 갈등을 극복하라고 교회는 그 자녀인 신자들에게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 

 

나아가 교회는 인류 사회와 그 안의 다양한 단체들에서 발견되는 참된 것, 좋은 것, 옳은 것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그 단체들이 교회에 속하고 또 교회 사명에 부합하는 한 기꺼이 도와주고 촉진한다.

 

 

교회가 신자들을 통해 주고자 하는 도움(43항)

 

이와 관련, 교부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한다. 우선, 교회가 선포하고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가 현세와 무관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종교 생활을 단순히 예배 행위와 도덕적 의무 이행으로만 여겨, 현세 활동이 종교 활동과 다르다는 듯이 현세 활동에만 몰두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렇게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교부들은 지적한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직업적 사회적 활동과 다른 한 편으로 종교 생활을 서로 부당하게 대립시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인간적 · 가정적 · 직업적 · 학문적 · 기술적 노력을 종교적 가치와 결부시켜 활력 있게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세속의 직무와 활동은 평신도들의 고유한 몫이다.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의 고유한 법칙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그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현세의 시민 생활에 하느님의 법을 새겨 세상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젖어들게 해야 하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돼야 한다. 반면에 사목자들은 그리스도 메시지 선포를 통해 평신도들의 현세 활동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줘야 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와 함께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는 하느님의 성령께 불충하게 살았던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라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 잘못을 자인하고, 복음 전파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이를 단호히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부들은 “교회의 자녀” 혹은 “교회의 지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을 권고한다.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받는 도움(44항)

 

세상의 누룩으로 세상 발전에 도움을 주는 교회는 반대로 인류 역사와 발전에서 또한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언명한다. “교회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표징으로서 가시적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 사회 생활의 발전으로 교회도 역시 부요해질 수 있고 또 부요해지고 있다.” 

 

특히 급속한 변화와 변동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다양한 제도와 전분 분야에 정통하고 그 깊은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신자이든 비신자이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구조에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구조를 더 깊이 깨닫고 더 잘 표현하고 현대에 더 쉽게 적응시키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고 헌장은 밝힌다. 나아가 교회는 교회를 반대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의 반대 그 자체에서도 많은 이익을 얻었고 또 얻을 수 있다고 교부들은 공언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께서 인류 역사의 중심이시고 시작이시며 마침이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면서 ‘인간의 소명과 교회’에 관한 제1부를 마친다. “주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목적이시고 역사와 문명이 열망하는 초점이시며 인류의 중심이시고, 모든 마음의 기쁨이시며 그 갈망의 충족이시다”(45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8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7)

 

 

사목헌장 제2부는 현대의 여러 긴급한 문제들을 △ 혼인과 가정 △ 인간 문화 △ 경제-사회생활 △ 정치 공동체 생활 △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 등 5개 주제로 나눠 고찰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사목헌장 제2부 1장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47~52항)을 살펴본다. 사목헌장이 이 주제를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은 이루어지는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는 개인의 행복은 물론 일반 사회의 안녕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안녕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선 공의회 교부들은 혼인과 가정이라는 인간 사회의 근간이 되는 제도가 흔들리고 있음을 주목한다. △ 만연하는 중혼과 이혼, 자유연애가 혼인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고 이기주의와 향락주의, 부당한 출산 거부가 부부 사랑을 더럽히고 있으며 △ 경제, 사회 심리, 정치 등 현대의 여러 생활 조건이 가정에 적지 않은 혼란을 미치고 있고 △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혼인과 가정의 존엄한 가치와 힘을 흐리게 하지만, 이 모든 혼란과 어려움은 또한 혼인과 가정의 제도가 지닌 진정한 특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고 교부들은 밝힌다(47항).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거룩함(48항)

 

혼인과 가정은 거룩하다. 이 제도는 인간이 임의로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부가 인격적 합의로 맺은 혼인의 계약은 철회될 수 없고, 인간의 임의에 좌우될 수 없다. 부부의 결합은 “두 인격의 상호 증여로서 자녀의 행복과 더불어 부부의 완전한 신의를 요구하며 그들의 풀릴 수 없는 일치를 촉구한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언명한다. 

 

교부들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특별히 그리스도인 부부가 ‘성사’의 끈으로 맺어졌음을 강조한다. 혼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부부와 함께 하신다. 교회를 사랑하시어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부가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영원한 신의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인 부부가 혼인성사를 통해 “이를테면 축성된다”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성직자나 수도자만 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부부 또한 혼인성사를 통해 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부부는 축성된 삶에 부합하는 생활로써 자신과 부부 서로의 성화(聖化))는 물론 가정 전체의 성화를 위해 힘써야 하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부부 사랑과 많은 자녀 출산과 일치와 신의로 또 모든 가족과 사랑의 협력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주어야 한다.”

 

 

부부 사랑(49항)

 

부부 사랑은 가장 인간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강요된 것이 아닌 한 인간의 자발적인 감정에서 우러나와 다른 인간을 지향하기에 인간 전체의 행복을 다 포괄한다. 참다운 부부 사랑은 부부가 자유로이 서로를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이를 다정한 마음과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이끌어 준다.

 

이 사랑은 또 너그러운 실천으로 자라고 완전해진다. 혼인을 통해 부부가 친밀하고 정결하게 서로 결합하는 행위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행위로,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 

 

혼인과 가정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따라, 공의회 교부들은 상호 신의로 보장되고 특히 성사로 거룩하게 된 부부 사랑의 단일성을 분명히 한다. 이 부부 사랑의 단일성은 어떠한 간음이나 이혼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 소명을 항구하게 수행하려면 뛰어난 덕행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부는 은총의 도움으로 이 소명을 올바로 수행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기도로 간구해야 한다고 교부들은 권고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또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참다운 부부 사랑과 자녀 교육을 통해 혼인과 가정의 존엄을 위한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쇄신에 기여할 때, 교회가 표방하는 진정한 부부 사랑이 더 높이 평가되고 그에 대한 더 건전한 여론이 형성될 것이라며 그리스도인 부부의 분발을 격려한다.

 

 

혼인의 풍성한 열매(50항)

 

혼인과 부부 사랑은 본질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하느님의 뛰어난 선물’인 인간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의무는 부부의 고유한 사명이다. 이와 관련, 부부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의 협력자이며 또한 그 사랑의 해석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부부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에 있어서 △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되며 △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바로 그 양심을 언제나 따라야 하고 △ 그 법을 복음의 빛으로 참되게 해석해 주는 교도권에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적극적인 책임감을 갖고 출산의 의무와 자녀 교육의 임무를 이행함으로써 부부는 창조주께 영광을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덕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혼인이 전적으로 출산만을 위한 것은 아니기에 자녀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혼인의 결격 사유가 될 수 없으며 돼서도 안 된다. “간절히 바라는 자녀가 없더라도 혼인은 온 생애의 공동생활과 친교로서 그 가치와 불가해소성도 보존된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언명한다.

 

 

부부 사랑과 인간 생명의 존중(51항)

 

부부 사랑의 열매인 자녀는 또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라는 놀라운 생명의 선물을 잘 보존하라는 직무를 부모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생명은 임신 순간부터 가장 큰 배려로 보호받아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흉악한 죄악”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산아 조절을 할 때에 “하느님의 법을 해석하는 교도권이 배척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 곧 수술, 약물, 피임 기구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혼인과 가정을 위한 모든 사람의 의무(52항)

 

거룩함, 부부 사랑, 자녀 출산과 교육을 혼인과 가정의 특성으로 제시한 공의회 교부들은 가정을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학교”로 보면서 이 학교를 위한 모든 사람들의 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학교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으려면 △ 다정한 마음의 친교 △ 부부의 화합 △ 자녀 교육에 대한 부부의 성실한 협력이 있어야 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자녀 교육에는 아버지의 적극적 참여가 대단히 유익하다고 본다.

 

그러면서 특히 어린 자녀들은 집안에서 어머니가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의 정당한 사회 진출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어머니의 역할을 보호해야 한다고 밝힌다. 

 

국가는 혼인 가치의 증진과 가정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신성한 임무로 여겨야 하며, 그래서 부모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하고 가정의 행복을 잃은 어린이들에게는 적절한 보호와 도움을 줘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기 생활의 증언으로 또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을 통해 혼인과 가정의 가치를 증진해야 한다. 여러 학문, 특히 생물학, 의학, 사회학, 심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은 정당한 출산 조절의 여러 조건들을 도와주고 더 완전히 밝혀내도록 노력함으로써 혼인과 가정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 

 

사목자들 또한 부부들이 부부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소명을 다하도록 여러 사목적 수단을 통해 도움을 주고, 특별히 어려움을 겪는 부부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줄 임무가 있다.

 

또 가정 단체들은 특별히 젊은이들과 신혼부부들이 혼인과 가정생활을 올바로 해나갈 수 있도록 이론으로나 생활로써 지도하고 도와줘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9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8)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가 없다. 고통 앞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가슴에 달고 있던 세월호 노란 리본을 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권고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답변이었다. 교황의 이 말은 이 지면에서 살펴보고 있는 ‘사목헌장’의 첫머리를 떠올리게 한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이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1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책에서, 글을 통해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교황 방한 4박5일이 길게 여운에 남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사목헌장’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와 관련, 이번 호에서는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53~62항)에 대해 살펴본다. ‘문화’라는 말을 우리는 아주 흔하게 사용하지만, 문화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내리기는 쉽지 않다. 헌장은 우선 일반적 의미의 문화에 대해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다양한 자질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모든 것(수단)”(53항)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지식과 노동을 비롯해 가정과 사회의 관습과 제도, 인간의 정신적 경험과 갈망을 표현하는 작품들까지도 포함된다. 그런데 문화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문화를 형성해온 인간 존재가 역사적 사회적 존재인 것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 문화는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종교에 따라 다원성을 띨 수밖에 없다. 

 

공의회 교부들은 문화에 대한 이런 일반적 고찰에 이어 현대 세계의 문화 상황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음을 주목하면서 그로 인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적시한다(54~56항). 제반 학문의 진보, 과학 기술의 발달, 통신 및 교통수단의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 등으로 생활양식과 관습이 갈수록 동일해지며, 새로운 형태의 문화 곧 대중문화가 창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행동 양식과 새로운 여가 활용 방법이 생겨나고 △민족 간, 사회 집단 간 교류 증대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보화(寶貨)가 더 널리 알려지고 더욱 보편적인 인간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상황은 인간에게 새로운 책임 또는 임무를 부과하고 있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 문제를 네 가지 관점에서 적시한다. 첫째, 어떻게 하면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의 유산을 충실히 살라면서 과학 기술의 진보에서 생겨난 새로운 문화의 활력과 확대를 촉진할 수 있을까. 둘째, 개별 학문의 급속한 분화를 어떻게 학문의 종합이라는 차원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또 학문적 객관성과 합리성을 명상과 경탄이라는 영적 정신적 능력을 보존할 필요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셋째, 모든 사람이 문화의 혜택에 참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넷째, 문화의 정당한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순전히 현세적인 인본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신앙이 문화 발전의 중요성 오히려 증대시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공의회 교부들은 먼저 올바른 문화 발전의 원리에 대해 고찰한다(57~59항). 편의상 번호를 매기자면, 첫째 원리는 신앙이 문화 발전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키며, 현대 문화는 부정적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복음화를 위한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의 나그네살이를 한다고 해서 현세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원래 계획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과학 기술 자체를 진리 발견의 최고 척도인 것처럼 여길 때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고 인간이 자만에 빠지게 될 위험성도 있지만, 진리에 대한 충실성,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 노력, 국제적 연대 의식, 책임 의식 같은 가치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준비하게 하는 긍정적 요인이 된다. 

 

둘째 원리는 복음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다. 교회 또한 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모든 시대 모든 백성에게 파견됐기에 어떤 특정 문화에 배타적으로 얽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고 전달하기 위해 그 시대와 환경의 다양한 문화적 소산을 활용한다. 요컨대 교회는 고유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보편 사명을 의식하고 있기에 “여러 형태의 문화와 교류할 수 있으며 또 그 교류로 교회도 여러 문화도 풍요로워진다”(58항)는 것이다. 

 

셋째 원리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59항)는 원칙이 지켜지는 한, 문화는 그 정당한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도덕 질서와 공익을 지키는 한, 인간은 자유로이 진리를 탐구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전파하며, 예술을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공적 사건들도 진실대로 더 잘 알려져야 한다고 헌장은 지적한다. 이와 관련, “문화가 제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권력이나 경제 세력에 강제로 예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59항)는 교부들의 당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문화 혜택 받을 권리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헌장은 이런 원리적 측면을 고찰한 후 문화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긴박한 임무에 관해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다룬다(60~62항). 첫째는 문화 혜택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가 인정받도록 하고 또 이것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인간 존엄에 부합하는 인간적 시민적 문화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가 어디에서나 인정되고 실현되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당연한 의무라고 교부들은 강조한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문화에 대한 권리를 자각하고 자기를 계발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 할 의무도 지고 있음을 깨닫도록 힘껏 노력해야 한다”(60항)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헌장은 특히 농어민과 노동자, 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촉구하고 있다. 

 

둘째는 전인 교육이다. 학문과 예술 지식의 분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반면에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개인 능력은 줄어들고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분야에 대한 기술이나 재능뿐 아니라 “지성과 의지와 양심과 형제애의 고상한 가치를 지닌 전인격의 균형을 유지할 의무”(61항)가 있다. 한마디로 전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전인 교육은 무엇보다 먼저 가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뿐 아니라 전인 교육을 위한 다양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여가를 선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고유한 문화 행사나 집단 활동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에 젖어들도록 협력해야 한다”(61항)고 교부들은 당부한다. 

 

셋째는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다. 과학과 학문 분야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최근의 연구와 발전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교육과의 조화에 어려움을 안겨준다. 하지만 어려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이 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동시대 사람들과 매우 친밀하게 살며 문화를 통해 표현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감각을 완전히 파악하도록 노력하고 △새로운 학문과 이론, 그리고 신발명의 지식을 그리스도교 도덕과 교리교육에 결부시켜, 신자들의 신앙 실천과 도덕 정신이 과학 기술 및 날마다 진보하는 지식과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사물을 온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평가하고 해석”(62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신학교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이들이 다른 학문 분야의 뛰어난 이들과 함께 힘을 합쳐 협력하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면서, 평신도들도 적절한 신학 교육을 받고 또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더욱 깊이 발전시키기를 희망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0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9)

 

 

사목헌장의 2부 제3장은 사회생활의 한 분야인 경제생활에 관해 다룬다(63~72항). 헌장은 우선 현대 세계에서 경제생활의 주요 특징과 그 영향을 관찰하고(63항), 경제 발전의 복음적 원리를 성찰한다(64~66항). 그리고는 현대의 경제 사회 생활 전반에 적용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67~72항). 이번 호부터는 2~3회에 걸쳐 이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본다.

 

교회가 경제 사회 생활에 관심을 표명하고 가르침을 제시하는 이유는 경제 사회 생활이 바로 인간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사회나 국가의 경제 사회 생활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그 사회나 국가에서 사는 인간의 삶 자체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 사회 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그 온전한 소명, 사회 전체의 선익이 존중되고 증진돼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63항).

 

헌장은 우선 현대 경제생활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관찰한다. 그것은 △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커지고 있고 △ 시민과 집단과 민족 간의 관계와 상호 의존성이 더욱 긴밀하고 강력해지고 있으며 △ 정치권력이 경제생활에 더욱 빈번하게 개입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특징은 사회생활의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함께 생산 방법을 비롯해 재화와 서비스의 교류가 진일보함으로써 경제는 인류 가족의 요구를 더 잘 채워줄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 됐다고 헌장은 진단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 요인도 커지고 있음을 헌장은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경제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경제에 예속되고 경제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의 거의 전부가 경제 만능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경제 발전이 합리적이고 인간답게 조정되면 사회적 불평등을 오히려 줄일 수 있음에도 이러한 경제 만능주의가 득세하고 지배하면서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악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거대한 군중은 생활필수품조차 없어서 허덕이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저개발 지역에서조차 호화롭게 살면서 재화를 낭비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치와 빈곤이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소수가 막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다수는 비인간적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열악하게 살고 있다. 

 

사목헌장은 이런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이 농업이나 공업, 서비스업 등 경제계 사이에서뿐 아니라 동일 국가 내의 여러 지역 사이에서도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또 이런 경제적 불균형은 국가 사이의 대립을 심화시키며, 이는 세계 평화 자체에 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렇게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거꾸로 문제 해결의 필요성, 당위성을 부각시킨다.  사목헌장은 “현대 세계가 누리고 있는 더욱 광범한 기술력과 경제력이 이 불행한 사태를  시정할 수 있고 또 시정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 경제 사회 생활에서 개혁이 요구되고 △ 모든 사람에게 자세와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적시한다(63항). 이런 관점에서 사목헌장은 참다운 경제 발전을 위한 원리, 말하자면 경제생활의 복음화를 위한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64항) 

 

첫째 원리는 경제 발전의 근본 목적이 “단순한 생산품의 증가 또는 이익이나 지배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것이다. 이 인간에 대한 봉사는 물질적 요구뿐 아니라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 생활의 요구를 다 고려하는 “전인에 대한 봉사”여야 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은 언제나 도덕 질서의 범위 안에서 그 고유한 방법과 법칙에 따라 이뤄져야 하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이뤄져야 한다.

 

 

경제 발전에 대한 인간의 통제(65항)

 

둘째 원리는 첫째 원리에서 따라 나오는 것으로서, 경제 발전은 인간의 통제 아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발전의 목적이 인간에 대한 봉사라면, 인간은 당연히 경제 발전에 대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경제 발전이 지나친 경제력을 가진 힘 있는 소수나 그런 집단 혹은 정치단체나 강대국들의 손에 좌우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계각층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또 국제 관계에서도 모든 국가가 경제 발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헌장은 또 개인이나 임의 단체들의 자발적 활동이 공권력의 노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적절히 밀접하게 연결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제 성장 역시 각 개인의 기계적인 경제 활동에만 또 공권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릇된 자유를 빙자해서 인간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개혁을 가로막는 이론, 생산성을 앞세워 개인과 단체의 기본 권리를 무시하는 이론이 지닌 오류를 밝혀야 한다고 헌장은 천명한다. 나아가 시민들은 또한 자기 공동체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자기 능력대로 기여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으며, 국가 권력은 이를 인정해야 한다.

 

 

제거해야 할 엄청난 경제 사회적 격차(66항) 

 

개인에 따라, 지역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에 따라 경제 사회적 발전에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개인적 사회적 차별과 결부돼 더욱 증대되면서 엄청난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정의와 평등의 요구에는 물론이고 공동선의 요청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빨리 제거하도록 줄기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경제 발전의 복음화에 관한 셋째 원리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농업의 경우, 농산물의 생산과 판매에서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을 위해 △ 생산과 판매를 증대시키고 △ 필요한 개량과 혁신을 도입해 농민들이 정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전문 기술이 없으면 농업 발전이 이뤄질 수 없기에 농민 자신들,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 전문 지식을 익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헌장은 농업을 예로 들어 설명하지만 이는 비단 농업 분야만이 아니다. 어려움에 처한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모두에게도 같은 대책이 요구된다.

 

둘째, 경제 발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변화와 차이를 제대로 조절해야 한다.

 

이는 또한 정의와 평등이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개인 생활이나 가정생활이 불안이나 불확실함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와 관련, 사목헌장은 특히 타국이나 타 지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에게 대해 △ 보수나 노동 조건에서 차별을 두지 않도록 하며 △ 노동자를 단순한 생산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 여겨야 하고 △ 가족들을 그들 곁에 두어 합당한 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 그들이 몸담고 있는 지역에서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줘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주 노동자들이 자기 고장이나 고국을 떠나지 않도록 일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셋째, 자동화가 이뤄지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고 적합한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적절한 직업 기술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헌장은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질병과 노령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생계와 인간 존엄을 안전하게 보장해야 한다.

 

사목헌장이 제시한 이런 원리는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1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0)

 

 

지난 호에서는 현대 세계의 경제생활 상황과 경제 발전의 복음적 원리에 대해 알아봤다(63~66항). 이번 호와 다음호에서는 사목헌장이 제시하는 경제생활의 원칙에 대해 살펴본다(67~72항).

 

 

노동과 노동 조건 그리고 여가(67항)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 노동의 우위성이다. 경제생활에는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인간 노동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 경제생활의 다른 모든 요소들은 어쨌거나 인간을 위한 수단이지만 인간 노동 자체는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노동은 자가 노동이든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노동이든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치 자기 도장을 찍듯이 자연의 사물에 자기 모습을 새기며, 자기 의지로 사물을 다스린다.” 

 

사목헌장은 여기서 인간 노동의 의미 혹은 역할에 대해 제시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고 △ 자기 형제들과 결합하며 그들에게 봉사하고 △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한다. 나아가 △ 자기 노동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동참한다. 그리스도 친히 나자렛에서 손수 노동을 하심으로써 노동에 드높은 품위를 부여하셨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노동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또한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사회는 시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실제 환경에 따라 그 나름대로 도와줘야 하며, 자기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 즉 합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 그리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해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합당한 보수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은 노동자에게 해가 되도록 경제 활동을 조직하고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를 “부당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지적한다. 대표적 예로 노동이 인간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수단이어야 함에도 실제로는 인간이 자기 노동의 노예가 되고 있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이 자기 노동의 노예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래서 사목헌장은 △ 생산 노동의 전 과정이 인간의 필요와 생활 방식 무엇보다도 가정생활에 맞아야 하고, 특히 주부와 관련해서, 성별과 연령을 고려해야 하며 △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통해 자기 역량과 인격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며 △ 노동자는 마땅한 책임감을 갖고 시간과 능력을 노동에 쏟아야 하지만 또한 가정 · 문화 · 사회 ·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려야 한다고 제시한다. 나아가 직업 노동으로는 어쩌면 거의 계발할 수 없는 재능과 역량을 자유로이 계발하는 기회를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 경영 참여와 노동 쟁의(68항) 

 

사목헌장은 기업 경영과 관련, 자본주와 고용주뿐 아니라 경영자와 노동자 등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촉진돼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각자의 역할과 임무에 따른 일관성을 유지면서 또 적절하게 규정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헌장이 ‘기업 경영에 대한 모든 이의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기업 경영이 한 특정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 결합해서 이뤄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기업 안에서의 참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노동자들과 그 자녀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제 사회적 조건은 기업 자체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정부 기구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이나 자유로이 선출한 대표를 통해 더 상위 기구에서 이뤄지는 결정에도 참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그리고 경제생활의 올바른 질서 수립에 이바지할 수 있는 단체를 자유로이 결성할 권리와 단체 활동에 자유로이 참여할 권리가 나온다. 

 

사목헌장은 이 권리를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명한다. 이는 분쟁과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연한 참여를 통해 모든 사람이 각자 책임 의식을 더 강화하며 이를 통해 능력과 적성에 따라 경제 사회적 발전과 공동선을 실현하는 동반자임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 분쟁의 소지는 언제든지 있다. 이와 관련, 사목헌장은 경제적 사회적 분쟁이 생길 때는 “언제나 가장 먼저 당사자들 사이의 성실한 대화에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득이한 경우 “파업은 노동자들의 고유한 권리를 수호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속히 협상과 화해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지상 재화의 목적(69항)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명심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지상 재화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근본적으로 지상 재화는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이 원칙은 늘 새겨야 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신의 재물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재화의 충분한 몫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 사람들은 쓰고 남은 것만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참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고 △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게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재산에서 자기에 필요한 것을 얻을 권리를 행사하려면 합당한 도덕적 요건을 채워야 한다. 예컨대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재물을 함부로 강탈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관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자 지난 4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시성된 성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막 직전인 1962년 9월11일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담화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다른 사람의 필요라는 척도로 남은 것을 헤아리고 창조된 재화의 관리와 분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살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며 그리스도인의 절박한 의무입니다.”

 

사목헌장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라는 옛 교회 교부들의 말을 상기하면서 모든 개인과 정부에 대해 “각자의 능력대로 자기 재화를 참으로 나누어주고 특히 개인이나 민족이 스스로 돕고 발전할 수 있도록 원조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한 선진국에서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이 원칙에 따른 혜택이 자국의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서도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상응하는 혜택에서 제외된 이들이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무수한 이들이 굶주림에 짓눌려 있다. 공의회 교부들의 외침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박하게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2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1)

 

 

사람들은 여윳돈이 있으면 투자를 한다. 요즘에는 빚을 얻어서 투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빚을 내서라도 투자를 하는 목적이 오로지 더 큰 수익을 내는 데에, 이른바 ‘대박’을 맞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일 것이다. 이는 가톨릭 윤리에 어긋난다. 사목헌장은 경제생활의 원칙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을 투자의 윤리에 대해, 그리고 재화의 공동 목적과 토지 사용에 할애하고 있다(70~72항). 

 

 

투자와 통화(70항) 

 

헌장은 투자가 단지 수익의 극대화만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투자는 수익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또한 노동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는 각기 그 나름대로, 오늘과 내일의 국민에게 노동과 수익의 충분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지적한다. 

 

이 원칙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나아가 국가에까지 적용된다. 

 

그러므로 투자자들은 개인이든, 집단(기업)이든, 혹은 국가이든 간에 △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의 품위 있는 생활에 요구되는 필수품을 제공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 미래를 예견하여 현재의 소비 요구와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 요청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뿐 아니라 “경제적 저개발 국가나 지역의 긴급한 요구도 언제나 고려해야 한다”고 헌장은 적시한다. 

 

이는 통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통화량의 조절, 곧 돈을 더 푸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자국의 선익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 경제적 약소국들이 환율 변동으로 인한 부당한 손실을 입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투자와 통화에 관한 사목헌장의 이런 가르침은 이른바 시장 경제의 논리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와 반대된다. 투자자의 단순한 경제적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 세대까지를 포함하는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게 사목헌장의 가르침이다. 

 

 

재산 취득, 재화의 사적 지배, 대토지(71항) 

 

지난 호에서 지상 재화는 비록 개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차라리 재산의 사유권을 금지하고 마치 사회주의식으로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사목헌장은 이에 대해 단연코 ‘아니’라고 답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재산 소유를 비롯한 물질적 재화에 대한 개인의 지배는 “인격의 표현”이고, 둘째, 인간은 재산의 사유권을 바탕으로 사회와 경제 분야에 대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가 외적 재화에 대해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대단히 유익하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밝힌다. 

 

헌장은 이와 관련, 사유 재산 또는 외적 재화(예컨대 주택이나 토지)에 대한 개인의 지배, 즉 사유 재산권의 행사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하나는 “자유의 신장”이다. 사유 재산권의 행사를 통해 인간은 개인과 가정의 자립에 필요한 여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 재산권의 행사가 시민 자유의 조건을 이룬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의 재산이나 재화에 대해 고유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사회의 시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임무와 책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유 재산권의 인정과 존중은 단순히 물질적 재산이나 재화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전문 역량 같은 비물질적 재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특허권, 지적 소유권 등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공의회 교부들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사유 재산은 관할 권위가 공동선의 요구에 따라, 또 공동선의 한계 안에서, 정당한 보상을 할 때에만 공적 소유로 이전할 수 있다. 나아가 공권력은 어느 누구도 공동선을 거슬러서 사유 재산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예방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재산의 사유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사유 재산 자체가 본성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모든 재화의 공동 목적이라는 이 사회적 성격을 소홀히 하면 △ 재산 소유는 흔히 탐욕과 심각한 혼란의 계기가 되고 △ 소유권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자, 곧 재산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 

 

헌장은 토지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상황은 이렇다. ① 경제적 저개발 지역에서, 농토의 수확 증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상황인데 광대한 농토가 부분적으로만 경작되거나 전혀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고 국민 대부분은 땅이 없거나 영세한 규모의 전답만 가지고 있다. ② 고용 노동자 또는 소작인으로서 토지 한 부분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인간답지 못한 급료나 보수를 받고 주택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중개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③ 그 결과 노예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책임지고 행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온갖 인간 문화의 증진이나 사회 정치 생활에 대한 모든 참여를 금지당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50년 전에 한 이 관찰은 일부 개선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목헌장의 교부들은 이런 여러 경우에 대한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 개혁은 △ 소득 증대 △ 노동 조건의 개선 △ 고용 보장의 강화 △ 자발적 노동의 장려 등으로 추진돼야 한다. 나아가 △ 제대로 경작되지 않는 농지는 제대로 경작할 수 있는 이들에게 분배돼야 할 것이라고 교부들은 주문한다. 이 경우, 경작에 필요한 물자와 수단이 충분히 제공돼야 하며 교육을 위한 지원이 이뤄져야 하고 협동 조직을 구성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물론 이런 개혁은 사유 재산권을 마구잡이로 침해하는 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며, 공동선을 위해 이뤄져야 한다. 공동선을 위해 부득이하게 사유 재산의 수용을 요구해야 할 때에는 모든 상황을 참작하여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경제 사회 활동과 그리스도 왕국(72항) 

 

그리스도인은 현세 삶과 동떨어져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인류의 번영과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당부한다.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적극적 참여를 통해, 또 정의와 사랑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다. 

 

이런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빛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 ① 필요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얻어 현세 활동에서 바른 질서를 지켜야 하고 ②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충실하여 개인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자신의 삶 전체가 행복의 정신, 특히 가난의 정신에 젖어들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2)

 

 

사목헌장의 2부 제4장은 정치 공동체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헌장은 먼저 인간 역사의 발전과 정치 공동체 생활의 상호 관계를 살펴본 후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정치 공동체 생활을 위한 사람들의 역할을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정치 공동체와 교회의 관계를 제시한다(73~76항).

 

 

현대의 공공 생활(73항)

 

오늘날 공공 생활에서는 큰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민족들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서 기인하는 이 변화는 정치 공동체 생활에, 특히 △시민으로서의 자유 행사에 △ 공동선 추구를 위한 모든 사람의 권리와 의무에 △ 국민 각자의 상호 관계에 △ 국민과 공권력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인간 존엄에 대한 의식이 활발해지면서 인권을 더 잘 보장하기 위한 정치 법률 제도를 확립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고 있다. 문화 경제 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은 사람이 정치 공동체 생활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자 한다. 또 소수파의 권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으며, 특권층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실제로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협력도 더욱 폭넓게 진척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인간다운 정치 공동체 생활이 이뤄지려면 정의와 사랑과 공동선을 위한 봉사 정신을 길러 줘야 한다. 또 정치 공동체의 진정한 성격과 공권력의 목적 그리고 그 바른 행사와 한계 등에 대한 기본 신념을 북돋워 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헌장은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제시한다.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74항)

 

공의회 교부들은 정치 공동체의 목적과 의미와 역할이 공동선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정치 공동체는 △ 공동선을 위하여 존재하고 △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의 의미를 얻고 △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권리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공동선이란 “인간이 더 충만하게 더욱 자유로이 자기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공동선에는 두 가지 본질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공동선이 인간 본성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을 생각할 때는 늘 인간 본성을, 곧 인간의 정신적(초월적) 본성과 육체적 본성을, 개인적 본성과 공동체적 본성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다른 하나는 공동선을 위한답시고 개인의 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공동선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 55~59항 참조). 

 

정치 공동체와 공권력은 공동선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공동선을 위한 공권력의 행사는 기계적으로나 독재적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의무를 수용하면서 책임 의식에 뿌리박은 도덕적인 힘으로 온 국민의 힘을 공동선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도덕적 힘으로 정당한 법의 질서에 따라 행사되는 공권력에 대해 국민은 “양심에 따라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나아가 권력이 월권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국민은 그 요구를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헌장은 밝힌다. 그러나 공권력의 남용에 대해서는, 자연법과 복음의 한계를 지키면서 그 남용에 맞서 자신과 국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게 공의회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공공 생활에 대한 모든 사람의 협력(75항)

 

여기서 사목헌장은 정치 생활 참여와 관련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언급한다. 편의상 순서를 매기자면 첫째, 모든 국민은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양심에 입각해 자유로이 투표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선의 요구다. 법적 기초 제정, 국가의 통치, 통치자 선거 등 국민이 투표로 참여하는 정치 공동체 생활 자체가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가 권력의 기능과 기관들이 적절하게 분리돼야 할 뿐더러 이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도록 해주는 실정법적 질서가 있어야 한다. 즉 국가의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기관들이 고유한 기능을 자율성을 지니고 수행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공동선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국민은 공동선이 요구할 때 국가에 인적 물적 봉사를 제공할 의무도 진다.  

 

넷째, 통치자들은 가정, 사회, 문화 단체와 중간 집단이나 기구 등을 방해하거나 그 정당하고 효과적인 활동을 금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질서 있게 이를 증진하도록 기꺼이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공 생활에서 보조성의 원리가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 행사가 공동선을 위해 일시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되도록 빨리 본래대로 회복시켜야 한다. 

 

여섯째, 국민은 애국심을 길러야 하지만, 편협한 애국심에서 벗어나 인류 가족 전체의 복지를 위해 언제나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일곱째, 정당들 또한 나름대로 공동선을 위한 요구를 증진해야 하며, 결코 당리를 공동선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공의회 교부들은 공공 생활에서 국민의 역할을 이렇게 제시하면서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확고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공동선의 함양에 진력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와 함께 모든 국민이 정치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국민들과 특히 청소년들에게 시민 교육과 정치 훈련 교육에 대한 꾸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치 공동체와 교회(76항)

 

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이든 단체든, 국민으로서 자기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 하는 일과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의 목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일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 신자로서 하는 일과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자들은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특정한 정당을 만들거나 정당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는 △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 동시에 인간 초월성의 표지이며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하지만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는 측면에서 긴밀한 관계에 있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정치 공동체와 교회가 서로 건실한 협력을 더 잘 하면 할수록 그 봉사는 더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와 정치 공동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제시한다. 첫째, 교회는 그 고유의 사명이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현세 사물을 활용하지만, 국가 권력이 부여하는 특권을 바라지 않는다. 둘째, 교회는 정당한 기득권의 사용이 교회 증언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할 경우에는 정당한 기득권 행사도 포기할 것이다. 셋째,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의 구원이 요구할 때는 교회가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2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3)

 

 

사목헌장은 현대 세계의 몇 가지 긴급 과제를 다루는 제2부의 마지막 제5장을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의 건설에 할애한다(77~90항).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평화다. 평화는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소망이지만, 실제로 평화란 무엇인가 하는 평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평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각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 장에서 먼저 평화의 본질을 밝히고(78항),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면서 이 야만적인 전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제1절 전쟁 회피, 79~82항). 이어 평화로운 국제 공동체 건설을 위한 협력과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제2절, 국제 공동체 건설, 83~90항). 2~3회에 걸쳐 이 마지막 부분을 살펴본다.

 

 

평화의 본질(78항)

 

사람들은 흔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세력 간에 힘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각국이 앞 다퉈 군비 경쟁을 하는 것도 결국 힘의 균형에서 적대적인 상대국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정의의 결과(이사 31,17), 곧 정의의 실현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는 정의의 결실이지만 단순한 정의의 실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평화 건설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는 정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평화는 사랑의 열매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엄정함이 있을 뿐이다.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 평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다. 그분은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고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평화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다.

 

 

전쟁 회피(79~82항)

 

야만적 전쟁에 대한 규탄(79항) : 현실적으로 평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쟁의 양상은 날로 더 교모해지고 잔혹해져 야만적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테러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특정 민족이나 부족을 전멸시키고자 하는 집단 학살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비열한 행위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런 야만적 전쟁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면서 이에 맞서는 용기 있는 이들에게는 찬사를 보낸다. 

 

야만적인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에 관한 여러 국제 협약이나 조약들을 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더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공의회 교부들은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위한 대체 복무 제도가 마련되고 시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수행하는 전쟁도 있다. 이것은 군사적 행동으로 타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정당방위의 전쟁이 되려면 그 조건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때에 이른바 ‘정당한 전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09항).  

 

1) 공격자가 끼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2)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3) 무력을 행사했을 때 성공할 조건들이 수립돼야 한다. 

4) 무력 사용이 제거해야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전면 전쟁에 대한 단죄(80항) : 공의회 교부들은 전면 전쟁을 강력하고 단호하게 단죄한다.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 받아야 한다.” 또 이런 전쟁이 결코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 특히 국가 통치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그들의 막중한 책임을 심사숙고하도록 간청한다.

 

군비 경쟁의 단죄(81항) : 사람들은 적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비축해 놓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여긴다. 이는 군비 경쟁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의회 교부들은 △ 군비 경쟁이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군비 경쟁이 전쟁 억제책이 될 수 있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교부들은 군비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분쟁을 더욱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면서 이 노력을 거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가공할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전쟁 금지와 전쟁 회피를 위한 국제 협력(82항) : 전쟁을 금지하고 또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제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공의회 교부들은 전쟁 금지를 위한 세계적 차원의 공권력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기존의 국제기구들이 이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헌신할 것을 촉구하고, 모두가 상호 신뢰를 통해 군비 경쟁을 종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하다. 공의회 교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인용하면서 이 군비 축소가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협정으로 공동보조를 맞춰, 진실하고 효과적인 보장책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와 함께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지도자들의 노력을 북돋우고 그들이 평화를 위한 활동을 꾸준히 수행하고 용감히 성취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평화를 위해 지도자들에게는 △ 국가 이기주의와 타국 지배 야욕을 포기하고 △ 온 인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기르는 일이 요구된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대중의 감정과 여론을 무시할 수 없기에,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신 교육과 올바른 여론 형성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와 관련, 교부들은 교육 활동, 특히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여론을 형성하는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새로운 감정을 길러주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확실히 현대는 위기의 시대다. 평화 건설을 위한 확고한 결의와 투신이 없다면 인류는 평화가 아니라 가공할 죽음의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평화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행동을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3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4)

 

 

사목헌장의 마지막 부분은 평화로운 국제 공동체 건설을 위한 협력과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다룬다(83~90항). 헌장은 국제 공동체의 건설과 이를 위한 협력이 필요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다(83항). 평화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전쟁을 키우는 분쟁의 원인, 특히 불의를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분쟁은 △ 지나친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대한 대책의 지연에서 △ 지배욕과 인간 경시에서 △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시기와 불신과 교만과 기타 이기적 욕구에서 나온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 현상이 개인이나 집단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래서 분쟁과 불의를 극복하고 폭력을 없애려면 “국제기구들이 더욱 더 잘 확고히 협력하고 협동해야 하며 끊임없이 평화 증진을 위한 조직의 결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둘째는 공동선을 위해서다(84항). 국가 사이에 또 민족 사이에 상호 의존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가는 이 시대에, 공동선을 적절히 추구하고 효과적으로 실현하려면 이 긴밀한 의존 관계에 부합하는 질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헌장은 △ 식량, 건강, 교육, 노동 등과 관련된 분야를 비롯해 △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원조 △ 난민 구호 △ 이민과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셋째는 특별히 경제 분야와 관련해서다(85항). 사목헌장은 심각한 내부 곤경의 온갖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심한 불평등과 온갖 형태의 부당한 종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나라들에 대한 인적 재정적 원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별히 선진국들은 이런 원조 활동과 관련해서 “지배자가 아니라 오로지 협조자와 협력자로서 행동”하도록 유념해야 한다. 나아가 증여나 차관 또는 투자 같은 형태의 원조를 제공할 때에도, 제공하는 나라들에서는 야욕 없이 관대하게 제공해야 한다. 반면에 받아들이는 나라들은 성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요컨대 올바른 세계 경제 질서를 확립하려면 △ 과도한 이윤 추구 △ 국가적 야심 △ 정치적 지배욕 △ 군사적 계산 △ 이념의 선전과 강요 등을 배제해야 한다. 

 

사목헌장은 국제 관계에서의 협력을 위해 적절한 몇 가지 규범을 제시한다(86항). 가) 개발 도상 국가들은 발전의 목표가 “자기 국민의 충만한 인간 완성”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발전은 외국의 원조뿐 아니라 먼저 자기 것을 충분히 개발하고 이를 자기 역량과 전통으로 육성하는 데 달려 있다. 따라서 “발전은 모든 것에 앞서 그 민족의 노력과 재능에서 시작되고 진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원 분배에 보조성의 원리와 정의 규범 지켜져야 

 

나) 선진국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이들 나라들과 교역을 할 때에는 그들의 선익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이를 위한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선진국들 자체 내에서 정신적 물질적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달리 말해 선진국 내에서는 후진국과의 교역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의식이 있어야 하며, 물질적으로도 그에 상응하는 건전한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국제 공동체는 성장과 촉진을 위해 마련된 자원을 그 목적에 맞게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조성의 원리와 정의의 규범이 지켜져야 한다.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인 보조성의 원리란 상위 집단은 하위 집단이 그 고유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부당하게 개입해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자녀의 일을 부모가 무조건 대신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자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라) 경제 사회 구조의 개혁이다. 하지만 미숙한 기술적 해결책의 제시, 예컨대 물질적 편익이 인간의 정신적 품성과 그 진보를 가로막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사목헌장의 교부들은 강조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마태 4,4) 때문이다. 

 

헌장은 인구 증가 문제에 관한 국제 협력에 관해서도 언급한다(87항). 교부들은 특히 급격한 인구 증가로 어려움을 겪는 민족들을 위한 국제 협력이 매우 절실해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특별히 부유한 국가들의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한 나라의 인구 문제와 관련한 권리와 의무는 그 나라 정부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구 억제를 위한 공권력 개입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① 도덕률에 배치되는 해결책은 피해야 한다. ② 출산 자녀수의 결정은 부모의 바른 판단에 달린 것이므로 절대로 공권력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 ③ 부모의 판단은 올바로 형성된 양심을 전제하므로, 시대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하느님 법을 존중하는 올바르고 참으로 인간다운 책임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④ 이를 위해서는 교육 환경과 사회 조건을 개선하고 특히 종교 교육이나 건실한 도덕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⑤ 자녀 수 조절과 관련해 부부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은 확실성이 제대로 입증되고 도덕적 질서와 명백히 부합해야 한다. 

 

 

“쓰고 남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먹을 것을 나누어 줘야” 

 

헌장은 끝으로 평화 건설을 위한 국제 사회의 협력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와 교회의 효과적 현존에 대해 언급한다(88~90항). 우선 부유한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풍부한 재화를 누리는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생활필수품도 없이 기아와 질병과 온갖 불행으로 고통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난과 사랑의 정신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이자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쓰고 남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 현대의 불행을 힘껏 덜어 주는 일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임을 강조하면서 “주교들이 말과 모범으로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 원조금품의 모집과 분배가 교구나 국가나 전 세계 차원에서 질서 정연하게 이뤄져야 하고, 필요하다면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공동 활동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밖에 개발도상국들에 봉사하려고 하는 이들은 그에 적절한 교육을 알맞게 배울 필요가 있다고 사목헌장은 제시한다(88항). 

 

교회는 사람들의 협력을 장려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국제 공동체 안에 반드시 현존해야 한다. 국제 공동체에서 교회의 현존은 교회의 공적 기관을 통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하겠다는 열망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충만하고 성실한 공동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려면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 자기 삶의 영역에서 국제 공동체와 즉각 협력하려는 의지를 신자들에게 일깨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헌장은 지적한다. 

 

시민 교육이나 종교 교육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89항).

 

신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국제기구에서 활동함으로써 또 가톨릭 국제단체들에서 활동함으로써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평화 건설에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증진하는 기관을 보편 교회의 기구로 설립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공의회 교부들은 본다. 이 기구의 역할은 빈곤한 지역들의 발전과 국가 간의 사회 정의를 증진하도록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체를 일깨우는 것이다. 공의회의 이런 제안에 따라 발족한 보편 교회 기구가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현 정의평화평의회)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4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사목헌장 해설 (15)

 

 

사목헌장의 마지막 맺음말(91~93항)은 헌장의 취지와 내용을 압축하고 정리한다. 사목헌장이 제시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세상을 위한 교회,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다. 세상에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 사목헌장의 기본 취지다. 모든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형제애의 증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밝힌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온전한 사명을 더 분명히 깨달아,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고, 보편적이고 더 근본적인 형제애를 추구하며, 사랑의 충동을 받아 아낌없는 공동 노력으로 현대의 긴급한 요청에 부응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것이다”(91항). 

 

이는 사목헌장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교회의 활동 목적과 다르지 않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려 오셨다”(2항). 

 

이런 목적에서 발표된 사목헌장은 그러나 그 자체로 언제 어디서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완벽한 문헌이 아니다. 세계의 환경과 인간 문화 형태가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목헌장이 교회 안에서 이미 공인된 교리를 밝혀 제시한다 하더라도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계속 연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다 해도 사목헌장은 이를 위한 표본 역할은 한다. 사목헌장은 환경과 문화가 다른 가운데서도 “일부러 일반적인 특성만을 고려해”(91항) 문서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목헌장이 채택한 방법론 자체가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헌장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해(관찰), 이를 복음의 빛에 비춰 헤아리고(판단), 구체적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을 도출해 내기(실천) 때문이다. 그래서 사목헌장의 교부들은 “우리가 제시한 많은 것들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목자들의 지도를 받아 각각의 민족과 그 사고 방시에 적응시켜 행동으로 옮긴다면, 모든 사람에게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드러낸다(91항).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형제애 증진의 교회 활동 방법은 대화 

 

사목헌장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활동 목적이 인간을 위한 봉사, 구체적으로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형제애의 증진이라면, 이를 위한 교회 활동의 방법은 대화다. 이 대화는 네 측면에서 이뤄진다. 

 

첫째는 교회 곧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대화다. 교회 안에서 대화가 열매 맺는 대화가 되려면 한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 “정당한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과 존경과 화합을 증진해야”(92항) 한다. 이와 관련, 공의회 교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한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베드로 교좌’에 나오는 멋진 말을 인용한다. “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92항). 

 

둘째는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하는 이들, 곧 갈라진 그리스도 교회들 및 교회적 공동체들과의 대화와 협력이다.* 이들과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비록 서로 갈라져 있지만 이들과 가톨릭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신앙 고백과 사랑의 유대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진전될수록 그것은 전 세계의 일치와 평화의 전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전 세계의 일치와 평화라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의 가족으로 부름 받은 인류 가족에 대한 봉사를 위해 형제로서 협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전통 안에 고귀한 종교적 인간적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다. 말하자면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나름대로의 합당한 종교관 인생관을 지니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다.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가톨릭 신학자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활동한 카를 라너(1904~1984) 신부가 말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이들과의 대화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하여 성령의 권유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실천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대한다. 

 

마지막 넷째는 말 그대로 모든 이들과의 대화다. 여기에는 △인간 정신의 드높은 가치를 고양하지만 그 원천인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무신론적 인도주의자들)뿐 아니라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이들까지도 포함한다. 비록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하지만, 이들 역시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피조물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되도록 부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단언한다. “이 동일한 인간적 신적 소명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떠한 폭력이나 기만도 없이 진정한 평화 속에서 세계 건설에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하여야 한다.” 

 

 

‘세상’을 복음화할 대상으로 새롭게 이해 

 

사목헌장의 교부들은 밀접히 연결되는 두 복음 말씀으로 헌장을 마무리한다(93항). 하나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명을 지닌다. 이 사명을 수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주님이요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는 말씀이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 모든 사람 안에서 형제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리스도를 실제로 사랑하며 △ 그리하여 진리를 증언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교회헌장과 더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문헌으로 꼽히는 사목헌장은 세상을 종래의 대체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세속’이 아니라 교회가 대화하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변화시켜야 할 대상, 곧 복음화해야 할 대상으로 새롭게 이해하면서 복음화를 위한 현실적이고 사목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기에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로 시작하는 사목헌장은 반포 5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메시지로 우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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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교회는 공식 문서에서 갈라진 형제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 ‘그리스도 교회’ 와 ‘그리스도 공동체’라는 표현을 구별해 사용한다. ‘교회’라는 표현은 비록 여러 이유로 갈라져 있지만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사도 계승을 인정하는 갈라진 형제들을 가리킨다. 정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교회 대신 ‘공동체’ 또는 ‘교회적 공동체’라는 표현을 쓸 때는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지만 사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 공동체들을 가리킨다. 대다수 개신교 공동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5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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