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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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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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03 ㅣ No.1493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우리 삶의 핵심 태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에 대한 설명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여느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물질적 풍요와 외형적 성취를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 실천과 수행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우리가 고찰할 것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를 위해 노력할 때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사전적 의미에서 “전쟁과 갈등이 없는 평온함”을 뜻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공동체와 공동체 관계에 갈등과 다툼이 없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오면서 절감합니다. 갈등과 다툼이 없는 상태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우리의 생은 늘 갈등과 다툼의 연속임을 우리는 압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다툼이 상시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과 인류의 역사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는 늘 평화를 갈망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사람들과 세상은 점점 더 평화로워지기보다는 갈등과 분열과 다툼의 모습과 태도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감정과 욕망을 강조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점점 더 이기적이 되게 합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타인을 그저 한정된 재화를 둘러싼 분배의 경쟁자로 여깁니다. 이기적이 되어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점점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더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갈등적이고 분열적이 됩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노력을 통해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 한반도 안에서의 남과 북의 평화, 등등의 세계적, 국가적, 역사적, 민족적 과제로서의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흔들고 또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평화의 문제는 그런 거창한 과제라기보다는 자신과 그 주변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이루는 평화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화의 적들: 뒷담화, 험담, 중상모략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직 수행 초기부터 강조해온 것이 있습니다. 험담과 뒷담화에 대한 비판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갈등과 분열을 발생시키는 것의 대부분은 말에서 비롯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적어도 오해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다른 데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심지어 그 이야기를 각색하여 퍼뜨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7항)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말이라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어떤 것에 대해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판단과 말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들은 것, 소문으로 접한 것들에 대한 말과 전달의 문제입니다. 말은 건네지는 순간 변합니다. 말은 전달의 과정 안에서 항상 각색되고 편집됩니다. 모든 말에는 발화자의 감정과 해석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말을 통해 표현되는 객관적 사실이란 쉽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말의 전달 과정에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위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힘듦과 어려움에 대해 전달할 때에도, “감정은 구체적 실재를 왜곡하고, 그 사실을 해석하여 변형시키며, 결국 주관성을 더해서”(88항) 전달할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나 말이 문제입니다.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통해 왜곡된 말, 이런 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갈등과 분열을 낳고 자기 자신마저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타인에 대한 가벼운 수다와 악의 없는 뒷담화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수다와 가벼운 뒷담화가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수다와 뒷담화는 늘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험담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담긴 뒷담화입니다. 중상모략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악의적 판단과 이기적 욕망이 실린 뒷담화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상모략은 폭력주의적 행동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험담의 세계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평화의 적들입니다.”(87항)

 

 

평화의 장인: 열린 정신과 마음의 소유자,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참으로 평화를 ‘만듭니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평화와 우정을 다져 나갑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8항) 하지만 “복음적 평화의 건설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적 평화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다소 이상한 사람,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서로 다른 사람, 삶에 지친 사람, 그저 무관심한 사람조차 포용합니다.”(89항)

 

복음적 평화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치와 평화입니다. 복음적 평화는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평화보다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지향합니다. 소수의 특정인들만을 위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평화와 일치가 아닙니다. 복음적 평화는 단순히 갈등과 분열을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직시하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고 그것을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이 복음적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일은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과 기술을 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89항) 복음적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은 복음적 덕목들이 요청됩니다. 갈등과 분열의 현장을 목격할 때,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고 감정적이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하고 평온한 마음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인 요인들로 구성됩니다. 정서적이고 심리적 요인,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요인, 경제적 이해타산의 요인, 정치적 힘과 권력관계적 요인 등이 작동됩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을 헤아리면서 갈등과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마음들을 섬세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정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람과 삶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조정할 수 있는 마음과 영성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깊은, 끈기 있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곧 거룩한 사람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1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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