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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교회가 인정한 성모발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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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22 ㅣ No.302

성모 승천 대축일 특집 - 교회가 인정한 성모발현지


성모 마리아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 기도 보속 통해 하느님과 화해 당부

 

 

15일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 생활을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하늘에 들려 올림을 받으셨음을, 곧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드셨음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성모 승천은 일생을 오로지 하느님 뜻에 순명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충실히 협력하신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께서 온전히 받아들이셨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늘에 올림을 받은 성모 마리아는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끊임없이 자녀들 구원을 위해 전구하신다. 마리아는 때로는 특별히 택한 사람들에게 발현해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뜻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고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 내용이 참되고 믿을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경우, 이 발현과 메시지는 사적 계시(私的 啓示)로 인정을 받는다. 사적 계시라고 해서 뭔가 새로운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가 수호하고 선포하는 공적 계시의 내용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부연할 따름이다.

 

그러나 사적 계시들은 신자들 마음을 움직여 회개와 쇄신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때로는 치유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 따르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성모 발현지들을 찾아 순례하고 기도하며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마리아 발현 주장은 수없이 많다. 마리아 관련 자료(http://campus.udayton.edu/mary/resources/aprtable.html)에 따르면, 20세기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마리아 발현 주장은 386건에 이른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실제로 사도좌(교황청)나 지역교회(관할 교구)가 초자연적 사건으로 믿을 만하고 인정한 발현은 8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약 70건은 교회가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아직도 교회가 입장을 유보한 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태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보편교회가 전례력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성모 발현들과 전례력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발현 사건과 메시지 신빙성이 사도좌에 의해 인정된 성모 발현 가운데서 특별히 19세기 이후 발현 사건들에 대해 소개한다. 이들 발현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주요 성모 순례지로 사랑받고 있다.

 

현재 보편교회가 전례를 통해서 기념하는 성모 발현 축일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2월 11일), 파티마의 동정 마리아(5월 13일), 카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7월 16일),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12월 12일) 축일이다.

 

 

교회력에서 기념하는 성모 발현 축일

 

루르드의 성모 :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 기슭의 시골 마을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 동굴에서 마리아가 14살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한 사건이다. 발현은 7월 16일까지 18차례나 계속됐으며,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이'(Immaculata conceptio)라고 소개하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성당을 짓도록 명했다. 또 땅을 파서 샘물을 마시도록 했다.

 

이 말씀에 따라 루르드 동굴 위에 기념 성당이 세워졌다. 또 베르나데트가 판 샘에서는 치유 효과를 낸다고 해서 기적수라고 알려진 생수가 하루에 10만 리터씩 끊이지 않고 솟고 있다. 오늘날 루르드는 전 세계에서 해마다 수백만 명이 순례하는 대표적 성모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루르드 성모 발현은 1962년 1월 18일에 교황청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교회는 마리아가 처음 발현한 2월 11일을 루르드의 동정 마리아 기념 축일이자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성모 발현을 목격한 베르나데트는 수녀가 돼 1879년 35살로 선종했으며, 1933년에 시성됐다.

 

 

파티마의 성모 :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마리아가 포르투갈의 시골마을 파티마에서 10살 소녀 루치아와 그의 사촌동생들인 9살의 프란치스코, 그리고 7살 히야친타에게 발현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로사리오의 여왕'이라고 소개하면서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며 특별히 러시아를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첫 토요일에 영성체할 것을 당부했다.

 

교황청은 1930년 10월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인정했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에는 전 세계 특히 러시아를 티 없으신 성모 성심께 봉헌했다. 교회는 파티마 성모의 첫 발현일인 5월 13일을 파티마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낸다.

 

성모 마리아 발현을 목격한 세 어린이 가운데 프란치스코는 1919년에, 히야친타는 1920년에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2000년 5월 13일 파티마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됐다. 언니인 루치아는 나중에 가르멜회 수녀가 돼 포르투갈 코임브라에 있는 수녀원에서 지내다 2005년에 선종했다. 세 사람의 유해는 파티마 성지 바실리카(대성전) 제대 옆에 모셔져 있다.

 

 

카르멜 산의 성모 : 1251년 7월 16일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 가르멜수도원 원장이던 시몬 스톡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 갈색 스카풀라를 건네주면서 시몬 스톡 자신과 가르멜 회원들을 위한 특별한 은총의 표징으로 이 스카풀라를 착용토록 하라고 말했다. 이후 갈색 스카풀라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져 나갔으며, 교회는 이를 기념해 7월 16일을 카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낸다.

 

시몬 스톡(1165~1265)은 나중에 가르멜회 총장으로 선출됐으며 프랑스 보르도에서 선종했다. 그는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성하지는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교황청의 공식 허가를 받아 가르멜회를 비롯해 몇몇 교구에서 축일을 지내면서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기에 이르렀다.

 

 

과달루페의 성모 :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과달루페의 테페약 언덕에서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인디언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 주교에게 가서 언덕에 성당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지시했다. 디에고는 그대로 전했지만 주교는 믿지 않았다. 실망해서 돌아간 디에고를 마리아는 재차 주교에게 보냈고, 주교는 디에고에게 증거를 요구했다.

 

3일 후인 12월 12일 테페약 언덕에서 다시 디에고에게 발현한 마리아는 발현의 증거로 장미꽃을 한아름 따도록 해서 주교에게 보냈다. 주교는 한겨울인데도 디에고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나는 장미를 한아름 따왔을 뿐 아니라 장미를 담아온 디에고의 망토(틸마)에 귀부인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침내 테페약 언덕에는 성당이 세워졌고, 망토는 성당에 모셔졌다.

 

이후 순례객들이 찾아오면서 10년이 채 되지 않아 멕시코 주민 800만 전체가 가톨릭 신자가 됐다. 테페약 언덕에는 1709년 두 번째 성당인 대성당이 건립됐고,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됐다.

 

오늘날 과달루페 성모성지는 연간 1000만 명이 순례하는 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을 시작으로 1990년, 1999년, 2002년 등 네 번이나 과달루페 성모성지를 순례했으며, 마지막 순례 때인 2002년 7월 31일에는 발현을 목격한 후안 디에고(1474~1548)를 시성했다.

 


19세기 이후 사도좌 인정을 받은 성모 발현


파리 기적의 메달 : 1830년 7월 19일과 11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파리 뤼 뒤 박에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모원 성당에서 수련수녀인 가타리나 라부레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이 발현에서 마리아는 가타리나에게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아래로 펼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환시로 보여주면서 그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나눠주도록 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이 메달을 지니는 이들에게는 풍부한 은총이 내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2년 후 첫 메달이 만들어졌고 처음에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메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메달은 메달과 결부된 기적들이 많이 알려지면서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됐다.

 

또 메달 보급과 함께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신심도 널리 확산됐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청은 이에 앞서 1836년 이 성모 발현과 기적의 메달에 관한 내용을 모두 인정했다.

 

가타리나 수녀는 1876년에 선종했는데 50년이 지나 관을 열자 시신이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타리나 수녀는 1933년에 시복됐고 1947년 7월 27일 시성됐으며, 성녀 유해는 파리 뤼 뒤 박 거리 사랑의 딸회 모원 성당에 안치돼 있다.

 

 

로마 기적의 메달 : 기적의 메달 성모는 1842년 1월 20일 로마에 있는 성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서 가톨릭 신앙에 극도로 혐오감을 갖고 있는 28살의 유다인 마리 알퐁스 라티스본느(1814~1884)에게 발현했고, 알퐁스 라티스본느는 바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이례적 개종 사건을 조사한 교황청은 1842년 6월 3일 알퐁스 라티스본느에게 일어난 발현 사건을 인정했다.

 

라티스본느는 개종 후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나중에는 교황 비오 9세 승낙을 받아 예수회를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가 성 요한 공동체를 세우고는 죽을 때까지 유다인과 무슬림 개종을 위해 헌신했다.

 

 

라살레트 하느님과 화해 : 1846년 9월 16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프랑스 남부 그랑노블 인근의 산골 마을 라살레트에서 15살의 말라니 칼라와 11살의 막시망 지로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몹시 슬픈 표정으로 나타난 성모 마리아는 죄를 고백하고 악행을 멀리하며 기도와 보속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마리아는 또 아침 저녁으로 기도할 것을 당부하면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적어도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라고 거듭 당부했다. 프랑스 주교단과 교황청은 1851년에 라살레트의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했다.

 

발현을 목격한 막시망은 1875년 40살로 선종했고, 말라니는 수녀회에 입회해 여러 공동체에서 지내다가 1904년에 선종해 이탈리아 알타무라에서 영면해 있다.

 

 

퐁맹 희망의 성모 : 1871년 1월 17일 프랑스 북동부 라발에서 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퐁맹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성모 마리아가 12살 외젠느와 10살 요셉 바르베데트 형제에게 발현했다. 푸른 색 바탕에 황금색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긴 옷 차림에 황금 왕관을 쓰고 검은 두건을 한 차림이었다. 또 두 손은 십자가를 가슴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이들만 볼 수 있었고 어른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본당 신부를 비롯해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마리아는 "얘들아, 기도해라. 하느님께서 너희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내 아들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글씨를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당시는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현 사건이 있은 후 11일만인 1871년 1월 28일에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퐁맹의 성모 발현은 4년 후인 1875년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고, 퐁맹에는 1900년에 순례자들을 위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발현을 목격한 요셉 바르베데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봉헌자 수도회 소속 사제가 됐으며, 그의 형 외젠느는 교구 사제가 됐다.

 

 

기에트시바우두 성모 : 1877년 폴란드 북동부 기에트시바우두 마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당시 폴란드는 나라가 삼분돼 지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마리아는 6월 28일부터 9월 16일까지 9차례에 걸쳐 유스티나 사프린스카와 바르바라 사물로브스카 두 소녀에게 발현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라고 밝히면서 날마다 열심히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하면서 특히 병자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샘물을 마시면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기에트시바우드 성모 발현은 100년이 지난 1977년에 교황청 인정을 받았다.

 


노크의 성모 : 1870년대 아일랜드는 기근에 경제적 혼란이 겹쳐 많은 이들이 해외로 이민을 떠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 노크 마을의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가 마을 주민 15명에게 발현했다. 흰옷을 입고 빛나는 왕관을 쓰고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은 모습으로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특별한 메시지는 남기지 않았다.

 

1880년 마리아의 발현 장소에 노크의 성모상이 세워지고 이후 성당을 찾은 순례객들에게 기적적인 치유 현상들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1936년 교황청 인정을 받은 노크 성모성지는 오늘날 해마다 150만 명 정도가 다녀가고 있다.

 

 

보랭 황금 성심의 성모 : 1932년 11월 19일 벨기에 남부 지역의 보랭에서 어린이 5명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마리아의 발현은 1933년 1월 3일까지 30차례 이상 거듭됐다. 처음에는 미소만 짓다가 사라지곤 하던 마리아는 1932년 12월 21일 발현 때에 '원죄 없이 잉태된 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이후 발현들에서 마리아는 사람들이 순례 올 수 있도록 성당을 짓고, 많이 기도하고 늘 기도할 것을 요청했고, 특히 마지막 발현에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1932년 12월 29일 이후 발현들에서 '광채에 둘러싸인 성심'을 볼 수 있었다. 이후 보랭의 성모는 '황금빛 성심의 성모'로 불리게 됐다.

 

교황청은 1949년 보랭의 성모 발현을 인정했다.

 


바뇌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 : 보랭의 성모 발현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3년 1월 15일 성모 마리아는 벨기에 바뇌에서 마리에트 베코라는 11살 소녀에게 나타났다. 그해 3월 12일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발현한 성모는 자신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러 온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많이 하라고 당부했다.

 

바뇌의 성모 발현은 1949년 교황청 인정을 받았고, 바뇌는 오늘날까지 조용한 가운데 순례객들이 찾아와 기도를 바치는 성모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발현 목격자인 마리에트 베코는 결혼해 남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지내고 있다.

 

 

시라쿠제 눈물의 성모 : 1953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 시라쿠제에서 안토니나 야눈소와 남편 안젤로 야눈소라는 가난한 부부의 침실에 있던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안토니나는 임신 중이었고 발작과 함께 일시적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혈독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성모상에서 흐르는 눈물을 본 후 안토니나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이 성모상의 눈물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인간의 눈물과 성분이 똑같다는 것이 확인됐고, 이 기적 현상은 이듬해인 1954년 10월 1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인정받았다.

 

 

기타 성모 발현지

 

사라고사 기둥의 성모 : 기원 후 40년쯤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요한의 형인 야고보(큰 야고보)는 복음을 선포하러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갔다. 오늘날의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에 머물면서 야고보는 자신의 복음 선포 활동이 잘 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가 기도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나무로 만든 작은 성모상과 벽옥으로 된 기둥을 주면서 자신을 기리는 성당을 그 자리에 세우도록 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약 1년 후 야고보 사도는 마리아를 기리는 경당을 지을 수 있었고, 성당 안에 벽옥 기둥 위에 마리아상을 모셨다. 야고보 사도는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기원후 44년쯤에 사도들 가운데서 맨 먼저 헤로데에 의해 순교했다.

 

사라고사에 세워진 마리아 경당 자리에는 나중에 대성당이 들어섰으며, 이 대성당 안에는 벽옥 기둥에 모셔진 성모상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쳉스토호바 검은 성모 :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있는 검은 얼굴의 성모자 그림은 전승에 따르면 복음사가 성 루카가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순례했을 때 입수해서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주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이 그림을 보관할 성당을 지었다. 이후 이 그림은 우여곡절을 거쳐 4세기에 폴란드 야스나고라로 옮겨졌다.

 

1382년 타타르족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이 그림이 훼손되고 도난당할 것을 우려한 폴란드 왕자는 그림을 빼내 쳉스토호바라는 고을에 있는 작은 성당에 그 그림을 보관했다. 이후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로 알려지게 된 이 성모자 그림은 숱한 기적을 일으켜 폴란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교황직에 오른 이후 역사적 폴란드 방문 때에 쳉스토호바를 찾았으며, 이후 1983년과 1991년 두 차례나 더 이곳을 순례했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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