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주님 세례 축일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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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1-10 ㅣ No.15

주의 세례 축일 (가해)

        이사야 42,1-4.6-7 사도행전 10,34-38 마태 3,13-17

     1999. 1. 10.

 

오늘은 새해 들어 맞이하는 두 번째 주일입니다.

많이 춥습니다. 올 겨울 들어서 가장 추운 때라고 합니다. 올 겨울은 무척이나 추울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어려울 것이라던 겨울에 그나마 늦게 추위가 시작되어 조금은 낫다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추위 때문에 고생하는 분이 있으신가 모르겠습니다.  그런 곤경을 겪고 있을 분들에게 도움되는 일도 해 줄 수 없으면서 이렇게 묻기만 합니다.

 

올해 1999년의 첫 번째 주일은 예수님의 공현대축일이었습니다.  공현(公顯)은 인간으로 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러 온 이방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아기로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날이었습니다.  오늘 두 번째 주일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기억하며 우리 삶의 자세를 돌이켜 보는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오늘 세례 받으신 날도 공현의 한가지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에게 아기로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면,  세례는 다 성장한 어른으로서 하느님의 사명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또 한가지 공현사건으로 치는 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공현사건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청하면 그 필요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여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나 혼인잔치의 첫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일을 시작하는 의미로 세례를 받으셨지만, 우리는 교회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는 과정으로서 세례를 기억합니다.  전통에 따라서 교회가 실천해 온 방식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세례명이 없는 분들이 몇 분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별다른 준비 없이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왔고, 세례자 요한과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은 다음에 바로 세례가 베풀어졌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당에 나오고 신앙인으로서 가족이 되려고 받는 세례는 그 절차가 복잡하고 얼마간의 교육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서 신앙인의 자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엉터리로 배우고 엉터리로 지나면, 신앙인으로서의 생활도 ’대충대충’이 되고 말죠.

 

오늘 세례 기념 축일에는 우리가 생활하는 세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보이신 것처럼, 물을 이마에 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새로운 이름을 하나 더 받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완전한 생활의 변화를 다짐하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광야로 가서 40일을 지내신 뒤, 유혹을 이겨내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결국에는 수난의 과정을 거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과정을 모두 아시고 세례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세례를 받고 가끔씩은 하느님께 따집니다.  ’내가 열심히 이렇게 사는 데 왜 나에게는 이런 곤경이 닥치는가?’하고 말이죠.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실천하시다가 이 세상에서 오해와 질투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여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이겨내신 분이시기에 그분은 부활이라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살면서 욕심을 갖는 우리는 지나치게 열매만을 먼저 먹으려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부활, 삶의 기쁨과 평화, 안정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우리에게 다가올 기쁨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마 세례를 베풀던 요한마저도 이런 과정을 다 꿰고 있었기에, 그 고통을 받아들이려는 예수님을 말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요한도 같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면, 좀 더 편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예수님께 권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요한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을 향하여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며 한번 더 생각해 보도록 권합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말을 들으면서 잠시나마 옛날에 세례를 받으시던 때의 모습과 그때의 다짐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고 난 사람들의 지상 생활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기준, 즉 사랑의 실천과 남을 먼저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피곤할지도 모릅니다.  나쁜 일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이 요동을 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남이 보지 않는다고 내 맘대로 나쁜 일을 해버리고 난 다음에는 마음도 편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씩은 세례 받은 일과 걸맞지 않게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까?

 

신앙인의 사명,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의 기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의 첫 번째 독서입니다.  성서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가리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라고 부릅니다.  **** 제 1 독서를 한번 더 읽는다. ****  이렇게 사는 것은 힘듭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나만은 예외가 되고 싶다고 은근히 타협하고 싶어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라, 내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늘이 가물었을 때, 물은 내 밭에 먼저 끌어들여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나누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바뀐다면, 새로운 천년기, 희년(禧年)을 앞두고 있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에 들어가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입니다.  충분조건을 채우려면, 우리가 인생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선언이 우리 가운데 실현되어 우리가 기쁨에 동참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집에서 성당이 멀고, 미사 시간이 많지 않아서 참여하기가 어렵고, 성당에 오기만 하면 자꾸 자신을 돌이켜 보며 죄를 뉘우치라고 해서 싫고.....’ 하는 생각들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도망가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그런 것이 진정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태도와 일의 순서가 바뀌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 밖에는 다른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참으로 남다른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세상의 모습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생활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거기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렵고 딱딱한 말을 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세례 받은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며, 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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