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환자의 벗,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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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2-06 ㅣ No.857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환자의 벗,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

 

 

봄이 되면 왕진 가방을 들고 혜화동 신학교를 방문하는 중년 신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신학생들의 치아를 검진해주시는 강대건 치과의사 선생님이셨습니다. 치료가 더 필요한 신학생들은 자신의 병원에서 치료를 꼭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대신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치과에서 치료받았습니다. 내가 치과에 갈 때마다 좁은 병원 안에 사제, 수도자, 신학생들 등 무료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30년이 넘게 흘러 강 원장님에게 치료받았던 치아에 문제가 생겨 근처 치과에 갔는데 보철물을 떼어내던 치과 원장님이 이렇게 단단한 보철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셨습니다. 그만큼 강 원장님이 성심을 다해 치료를 해주셨던 것이죠.

 

2013년 내가 교구장 수석비서로 일하고 있을 때 5월 첫 주 일요일 아침 김득권 신부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허 신부, 한센인들을 위해 33년 동안 쉬지 않고 치과 봉사를 한 강대건 원장님이 내일 감사패를 받게 되었어. 이제 마지막이니 교회 언론에서 취재했으면 해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잖아.”

 

“예전에 저희 신학생을 치료해주시던 그 강대건 원장님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래, 맞아, 그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

 

“언제부터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셨어요?”

 

“벌써 33년이 지났지 뭐야. 강 원장님이 늘 상이나 기념패를 거절했는데 봉사를 다 끝낸 2013년에는 전국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에서 주는 감사패는 받으시겠다고 하셨는데 몸이 갑자기 아프셔서 참석을 못 하셨어. 내일 한센인들이 원장님을 찾아뵙고 감사패를 전달하는 행사야.”

 

다음날 감사패 전달식에는 가톨릭자조회 회장 및 대표자들과 엠마 프라이징거(Emma Freisinger) 여사와 김 신부님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김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교회뿐 아니라 일반 언론과 외국 언론에도 알려야 하는 굿 뉴스임을 직감했습니다. 얼마 후 당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내게 강 원장님에 대한 교황님의 훈장추서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자료를 준비해 주한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훈장추서 요청서류를 보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구장님께 예외적으로 3개월 만에 아주 빠르게 허락 서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어금니 없어 식사 못하는 젊은 수녀에 충격받아

 

2013년 9월11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여하는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에게 대신 수여하였습니다. 이 훈장은 1888년 교황 레오 3세가 제정한 것으로, 두드러진 공로를 세우거나 교회를 위해 헌신한 평신도에게 주어집니다. 당시 훈장을 달아주는 염 추기경의 눈에 잠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한 치과의사가 교황과 한국 정부의 훈장을 연거푸 받은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몹시 궁금해했습니다. 일반 언론의 기자들뿐 아니라 이탈리아나 프랑스, 미국의 신문들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언론을 통해서도 강 원장님의 활동이 크게 알려지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칭송하며 모두들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강 원장님 본인은 평생 봉사하느라 가족을 잘 못 돌보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 집안의 가장이나 아빠로서도 빵점이라 하셨습니다. 치과병원의 내부도 40년 그대로 사용하고, 틀니나 보철물도 직접 만드셨으니 나중엔 고물상(?) 같았습니다.

 

강 원장님은 대구에 살았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 간 부산에서 이모부가 운영하는 치과에서 어깨너머로 틀니 만드는 기공 일을 배운 것이 치과의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1957년 서울대 치대를 나와 군의관 생활 후 1963년 치과를 개원했습니다. 강 원장님이 개원할 당시에는 진료비가 비싸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지 않고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을 참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강 원장님이 1970년대 중반 수녀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20대 젊은 수녀님이 어금니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서울 시내 모든 수녀원을 다니며 진료하기 시작했고, 대신학교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아는 사람의 치과에 갔다가 한센인이 치과에서 매를 맞으며 쫓겨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문둥이 자식이 어디 병원 망하게 할 일 있어?” 하며 병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강 원장님은 그때 땅에 쓰러져 주눅 든 환자의 슬픈 눈빛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강 원장님은 예수님과 성모님이 당신의 눈빛을 자신에게 보여주시고 주님의 봉사자로 부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한센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한센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팍팍했고, 아파도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강 원장님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치과 일을 하고, 주일에는 나환자촌을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100여 개의 한센인 정착촌이 있었는데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 퍼져 있었습니다. 주일 새벽부터 기차와 버스, 택시를 갈아타도 점심 무렵에 도착하는 오지가 많았습니다. 한센인의 썩은 이는 무료로 뽑고, 이가 없으면 틀니를 만들어줬습니다.

 

 

33년간 전국 한센인촌을 돌며 1만5000명 환자 진료

 

무료 봉사는 오래 못한다는 주변 신부님들의 충고를 듣고 재료비만 받았습니다. 당시 틀니 1개를 만드는데 약 30만 원이 드는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병원 일 틈틈이 틀니를 만들면 1개당 10만 원이면 가능했습니다. 강 원장님은 치과기공사 자격도 취득해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어떤 날 새벽에는 피곤하고 쉬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자신을 기다릴 환자를 생각하면 다시 길을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33년 동안 전국 한센인촌을 돌며 진료한 환자는 약 1만5000명 정도, 직접 만들어준 틀니가 5000여 개 정도입니다. 그동안의 진료기록부만 10권이 넘습니다.

 

한센인들을 처음 치료할 때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실제 현실에서 한센인의 입을 들여다보며 치료하는 것이 무척 힘들고 무서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진료했고 자신보다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걱정이 되었답니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한센인 치료한다는 말은 비밀로 했습니다. 기차로 버스로 당일 왕복하기에 서울과 대구는 짧은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식사도 거르신 때가 많았고, 진료 외의 시간엔 늘 기도하셨다고 전언합니다. 강 원장님이 가장 많이 한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였는데, 연옥의 사람들이 가장 기도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강 원장님은 인터뷰 때마다 늘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한 기자로부터 “만약 혹시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봉사하시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하셨던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이 남습니다.

 

“봉사는 제게 기쁨을 주지만 그만큼의 인내도 필요한 것 같아요. 노고의 땀과 수고와 고민이 늘 교차하죠. 그래도 자기와의 투쟁 속에서 봉사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 아름다움이 되는 것 같아요. 봉사의 기쁨을 맛보면 남한테 안 주고 싶어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2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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