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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공소 이야기: 광주대교구 고당공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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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28 ㅣ No.1156

[공소 이야기] 광주대교구 고당공소를 가다


성당 일이 곧 우리 일… 무슨 일 생기면 한마음으로 “그라세!”

 

 

가톨릭신문은 3회에 걸친 ‘공소의 재발견’ 특집 기획을 통해 한국교회의 모태인 공소 공동체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봤다. 전국 공소의 현황과 교회사적 의미, 사목적 대안 모색의 필요성을 점검한 특집 기획에 이어, 전국의 공소들을 10회에 걸쳐 직접 탐방한다. 

 

첫 번째 순서로 광주대교구 해남 우수영본당 고당공소를 찾아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된 공동체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 광주대교구 해남 우수영본당 고당공소를 찾은 4월 17일, 며칠 전 깔끔하게 콘크리트로 덮은 마당에서 신자들의 정담이 길어지고 있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된 이야기는 공소 지붕과 종탑 보수 방법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라세~~”

 

“그리하믄, 그라세~~.”

 

광주대교구 해남 우수영본당 고당공소 식구들이 걸핏하면 하는 말이다. 뭐든 싫다거나 하지 말자는 법이 없다. 웬만하면 그냥 “그라세~~” 하면서 뜻을 모아 시작한다. 공소 마당 콘크리트 공사 때도 그랬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공소 마당에는 사철 풀들이 수북했다. 고령인 어르신들에게 쪼그리고 앉아 풀매기는 고역이다. 칠순을 맞은 신자 한 분이 공소 잔치 비용으로 500만 원을 내놓았다.

 

다 먹어치우지 말고 마당 공사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모두 “그라세~~” 그러고는 온 마당을 깔끔히 콘크리트로 덮었다. 모자라는 비용은 자연스럽게 갹출이 됐다. 이제 화단과 작은 텃밭만 풀을 매면 되니 일이 훨씬 쉬워졌다. 

 

낡은 사택 대신 교육관을 겸할 집을 지을 때에도, 오래 돼 덜덜거리는 승합차를 바꿀 때도, 누군가 그러자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잠시 갸우뚱하다가 “그라세~~” 하면 그만이다. 내 식구와 우리 일이니 셈이 필요없다.

 

 

1900년, 자발적 신앙 공동체의 시작

 

고당공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1957년. 전남 해남읍에서 서쪽으로 34㎞, 문내면 고당리 194번지에 위치한 고당공소는 그해 4월 15일 설립됐다. 당시 영명중학교 교사였던 정정봉(바오로)씨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신자들이 학교 사택에서 공소 예절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3년 전인 1954년 538평의 땅을 매입해 35평 규모의 공소를 짓기 시작했다. 구호물자로 받은 밀가루를 팔고 갖은 방법으로 모금을 해 땅을 매입했고, 바다 모래를 지게로 나르고 벽돌을 구워 벽을 올렸다. 2년 동안 지붕을 올리지 못하다가 1956년 간신히 지붕을 완공했다.

 

그런데, 실제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반세기를 앞선 1900년경이다. 특이하게, 이곳은 지역의 유지들이 앞다퉈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20여 명의 유지들은 정기적으로 시조를 읊는 모임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시조 모임이 공소 모임이 됐다. 

 

 

신앙도 삶도, 함께

 

1940년생 동갑내기로 60년을 해로한 정내성(안드레아)·문안자(루치아) 어르신들은 당시 공소 신앙생활에 대해 “특별한 거 없다”고 말했다. 신앙과 삶이 그대로 하나가 돼 사는 게 신앙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시대가 급변했으니 옛 공소의 일상은 흥미롭다. “한 두 달에 한 번, 신부님 오시는 날은 잔칫날이지요. 선교사 신부님이 말 타고 오신다는 기별이 있으면 6㎞ 떨어진 우수영까지 마중 가고, 배웅했지요.”

 

교리공부도 엄했고, 세례 받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부모가 신자가 아니면 딸은 세례를 주지 않았다. 외교인 가정으로 시집 가면 냉담한다는 이유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도, 한 집이라도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게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 예나 지금이나 같다. 공소회장 정문갑(베드로·62)씨는 말한다. “누구 집에 세간살이가 어떤지, 자식이 어디 가서 사는지, 엊그제 읍내 나가서 뭘 했는지, 다 압니다. 누가 다리라도 다쳐서 농사를 못 지으면 돌아가면서 다른 신자들이 어찌해서든 다 해내지요.”

 

한겨울이면 공소 바닥이 차고 창문으로 한기가 든다. “그라세~~” 몇 번 오간 후에 공소에 가마니틀을 들였고, 신자들은 낮에 일 보고 밤에 와서 가마니를 짜서 바닥에 깔고 창문도 막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

 

신자 수가 100여 명을 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전교활동이 왕성해 공소에 자리가 부족했다. 1986년에는 광주대교구에서 3번째로 성체를 모셨고 공소도 증축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학교만 졸업하면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 나갔다. 신자 수는 줄었고, 남은 이들은 나이를 먹었다. 

 

현재 23세대 30명의 신자들이 남아 있다. 막내였던 공소회장 정문갑씨도 60세를 넘겼다. 다행히 최근 50대 후반 맹진복(바오로)씨가 냉담을 풀어, 가까스로 막내를 면했다.

 

공소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큰 만큼 시름이 깊다. 평신도 선교사 고진석(요한·63)씨도 “15년, 길어야 20년쯤 뒤에 공소가 살아 있을지 의문”이라고 걱정했다. 공소 앞에 보이던 바다가 간척사업으로 사라졌다. 바다라도 있으면 귀농 인구라도 있을텐데, 이제 유입되는 인구도 전혀 없다. 

 

 

여전히 꿋꿋한 공소

 

미래가 불안하지만 고당공소는 꿋꿋하다. 냉담률은 20% 내외, 대개 주일미사 참례 신자가 20% 남짓인 것을 생각하면 공소의 신앙생활은 비할 데 없이 충실하다. 올해 부활 판공에는 1명 빼고 모두 참여해 관할 우수영본당 주임 황규열 신부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 공소회장은 “서로 지켜보니 냉담하기가 어렵다”며 “애정 어린 감시지요”라고 웃는다. 어르신들을 위한 실버 여가 활동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박경옥(스텔라·65)씨가 직접 배워 온 종이접기, 뜨개질, 체조, 그림그리기 등 건강과 여가 활동을 위한 활동을 매주일 진행한다. 

 

고 선교사는 “본당이 공소에서 배워가야 한다”며 “공소 신자들에게는 신앙생활이 따로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신앙”이라고 말했다. 

 

“형식적이기 쉬운 도시 본당 구역반 조직과 공소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신앙과 일상을 모두 나누는 공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이대로 공소와 그 신앙 전통들이 사라져 가는 걸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이야기가 미래에 대한 우려와 제안으로 이어질 때, 밖이 시끌하다. 서울 아들네 집에 다녀온 임정심(실비아·80) 할머니가 보고차 들렀다. 인근 남창공소 아들과 며느리 내외와 함께다. 반갑게 서로를 맞은 식구들은 마당으로 나서며 다시 한참 수다 꽃을 피운다. 며칠 집을 비운 탓에 수다는 길어지고, 공소 지붕과 낡은 종탑 수리로 화제가 넘어갔다. 영락없이 한 가족이다. 신앙으로나 삶으로나, 공소 신자들은 한집안 식구다.

 

[가톨릭신문, 2019년 4월 28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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