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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6: 19-20세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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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5 ㅣ No.489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6) 19~20세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습은 바뀌어도 전능하신 구세주임을 한결같이 고백

 

 

20세기 가톨릭 성경학계의 가장 출중한 학자로 뷔르츠부르크학파를 형성한 루돌프 슈나켄부르크(1914~2002) 신부는 “진정한 예수는 그저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기초를 전제하고는 있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이 한계를 뛰어넘는다”라고 했습니다. 성미술도 역사적 진실을 뛰어넘는 상징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는 성경의 영감을 받아 ‘주님의 얼굴’을 찾아 탐구했던 19세기 이후 화가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부터 1794년에 걸친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근대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정 시대의 종말을, 문화적으로는 바로크 예술의 종식을 고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한 교회 분열을 막고,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도록 성경과 교리에 더욱 충실한 성미술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장엄하고 위엄있는 새로운 양식의 성미술 즉 바로크 미술이 탄생했습니다. 절대 군주들도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신성화 작업으로 호화스러운 바로크 미술을 채택해 왕궁을 장식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낡은 질서를 허물겠다’는 기치 아래 교회와 왕정을 대변하던 바로크 미술품을 파괴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화가들에게 인간 본성과 감흥을 표현하는 감성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낭만주의’라고 합니다. 19세기의 낭만주의 화가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괴된 성당 안의 성미술의 잔재들을 보면서 예술적인 상상력을 펼쳤습니다.

 

피에르 장 다비, 구세주 그리스도, 1868, 소묘, 렌미술관, 프랑스.

 

 

피에르 장 다비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피에르 장 다비(Pierre Jean David, 1789~1856)입니다. 다비 당제(David d’Angers)로도 알려진 그는 낭만주의 조각가로 그 시대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의 몇 안 되는 소묘 가운데 ‘구세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전능하신 그리스도) 성미술 양식과는 전혀 다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시대사조를 반영한 구세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비의 ‘구세주’ 작품에는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옥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구원할 지구 위에 홀연히 앉아 계십니다. 그 안에 당신이 구원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존재합니다. 구세주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증거하듯 머리와 몸에 다섯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아마포로 된 수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겨낸 구세주의 육신은 마치 어린 아기의 피부처럼 밝고 윤이 납니다. 

 

구세주는 빛나는 천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평화롭고 안식을 주는, 창조되지 않고 영원히 지지 않는 빛이 성령의 은총과 선물처럼 구세주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성미술에서 빛은 거룩한 빛이며 ‘성령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세주를 감싸고 있는 빛나는 천체들은 시간의 영원성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구세주는 지구 표면에 무언가를 쓰고 계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군중들 손에서 구해 주시는 장면(요한 8,1-11)을 연상케 합니다. 붉은 물감으로 눈에 확 띄게 보여 주는 구세주께서 쓰신 글은 프랑스어로 ‘liberte, egalite, fraternite’입니다. 우리말로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입니다. 다비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과 당위성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비해 표현한 것입니다.

 

귀스타브 모로, 예수 그리스도, 19세기, 수채화,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파리, 프랑스.

 

 

귀스타브 모로

 

19세기 후반의 그림을 한 점 보겠습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0)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로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낭만주의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낭만주의 화가 샤세리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를 유학하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르네상스 작품에 매료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성과 상상력으로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늘 종교와 신화, 역사를 주제로 했습니다.

 

모로의 ‘예수 그리스도’는 얼핏 봐도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현란한 색상이 눈을 자극하고 전통적인 판토크라토르의 양식미는 없으나 지구를 상징하는 반구와 천체 위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구세주께서는 세 천사의 호위를 받고 계십니다. 천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합니다. 마지막 날 오신 구세주 앞에 모든 악한 세력들은 굴복할 것을 명령하는 듯 천사들의 표정은 단호합니다. 천사들이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은 전통 이콘 기법입니다. 전통 이콘에서 일반적으로 천사는 흑발에 머리띠를 두르고 그 띠의 끝자락은 천사의 후광 안에서 휘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모로도 이 전통을 따라 천사의 머리 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테살로니카의 성 시메온은 “천사의 머리띠는 영의 순수함, 순결의 관,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집중돼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모로는 구세주를 십자가 상의 수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성혈이 땅을 적시고 스며들어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묵시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로가 쓴 붉은색과 푸른색, 녹색은 성미술에서 전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색입니다.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데 있어 붉은색과 파란색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합니다. 전통에서 탈피해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표현 양식과 색에서 성미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모로의 치밀한 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루오, 성스러운 얼굴, 1930, 소묘, 조르주 퐁피두센터, 프랑스.

 

 

조르주 앙리 루오

 

마지막으로 20세기 작가의 작품입니다. 조르주 앙리 루오(Georges Henri Rouault, 1871~1958)의 작품 ‘성스러운 얼굴’입니다. 루오는 성미술을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한 미술가입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를 ‘복음을 실천하는 화가’라고 평합니다. 그의 신앙이 삶과 작품 전체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루오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를 흠모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루오의 ‘성스러운 얼굴’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는 듯합니다. 직사각의 프레임에 있는 성스러운 얼굴은 하지만 전통적인 ‘베로니카의 수건’ 이미지를 따른 작품입니다. 루오의 ‘성스러운 얼굴’은 그가 흠모했던 렘브란트의 ‘청년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렘브란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 그리스도를 그렸다면, 루오는 당신의 사명을 다 한 예수님께서 고통 속에서도 평온해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렘브란트의 세밀한 묘사와 달리 그는 간결한 선의 묘사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표현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간결한 선의 묘사로 초월성을 느끼게 합니다. 긴 코와 굳게 다문 입이 ‘주님의 존엄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비잔틴 미술의 대표적인 예수님 얼굴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낮춤’을 표현합니다. 

 

루오는 이콘의 전통 기법에 따라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렸습니다. 정면을 향한 주님의 얼굴은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과 친교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루오는 성스러운 얼굴 앞에선 사람들과 주님의 일치점이 바로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루오는 “인간의 고귀함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강하게 얻어지는 것이고, 고귀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종합

 

이렇듯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그리스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신앙 자유 선언 이후 지상 교회가 세워지면서 늘 사랑받아온 성미술입니다. 시대에 따라 신학과 사상, 문화의 변이로 그 표현 방식이 바뀌어 왔지만, 여전히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하는 성미술은 늘 이중의 뜻을 지닙니다. 하나는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인간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미술을 감상할 때는 ‘깨끗한 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은총을 받기 위한 겸손한 기도의 자세가 요구된다고 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완성하러 오실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를 고대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깨끗한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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