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대림 4 주일-가해-1998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8-12-19 ㅣ No.10

대 림 제 4 주 일 ( 가 해 )

        이사 7,10-14    로마 1,1-7    마태 1,18-24

       1998. 12. 20.

 

주제 : 신앙과 신앙인의 자의식(自意識)

 

오늘은 대림 제 4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늘이 벌써 대림 네 번째 주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간은 흘러서, 이번 주간에 우리는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되는 성탄절에 행사에서 우리는 구유를 설치하고, 우리 가운데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원자 하느님을 뵙는 예식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해마다 우리가 대림절을 지낸다고 해서 외형적으로 특별히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지난 해 성탄 예절을 했을 때보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고, 환경이 달라졌고 우리의 마음이 조금 변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림절을 지내고 성탄절을 맞이하고자 할 때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뒤돌아보는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할까?  대림 4 주일을 지내는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대림 4 주일에는 신앙 생활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몇 가지 삶의 자세가 나옵니다.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를 본보기로 보여주는 요셉과 아하즈 임금의 이야기, 하느님 앞에 두렵지 않은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으로서 평소에서는 어떤 의지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바오로 사도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이 올바른 의미의 기도라고 한다면, 그 분량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기도의 마음 자세로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자세로 우리가 앉아 있다면, 우리가 만족할 수준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흡족해하실 수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독서로 읽은 아하즈 임금의 시대는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절실했던 시기입니다.  기원전 720년 전후.  한창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대에 과연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이 오늘의 첫 번째 독서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던 신정국가였지만, 북쪽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남쪽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얼만큼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고민하면서 저수지로 내려갑니다.  현실적인 고민에 빠져서 걱정하고 있을 아하즈를 만나자 하느님의 사람 이사야는 도전장을 던집니다.  약은 꾀 쓸 생각하며 전쟁에 대비하느니 차라리 네가 마음을 두어야 할 하느님께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기적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도전입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여러 가지 경우에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일은 권장할 만한 것이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정성으로 임하는지 묻는 것이 오늘 독서입니다.  아하즈는 ’차라리 하느님을 믿느니 내 눈에 보이는 저수지 물의 양을 믿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이사야의 요청에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어떻게 감히 하느님을 시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현명하게도 하느님을 생각해 주는 척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실속은 다 차리는 영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아하즈의 모습에 비해서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은 좀 더 순박합니다.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에 싸여서 얼만큼의 시간을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입장의 생각하고, 여인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저 아무런 불만없이 물러서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물러 선 요셉이었지만,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천사의 몇 마디 설득을 듣고 그의 마음을 다시 바꿉니다.  인간의 주장을 앞세우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요셉을 가리켜 우스개 소리로 요셉이야말로 정말 줏대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하니 그렇게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요셉의 자세였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입장에서 보면, 영악한 아하즈 임금보다도 더 현명한 자세로 칭찬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자세는 인간의 것을 앞세워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수용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우리가 얻고자 할 때 하는 행위입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기도한다고 말은 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간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생각하고, 한 주간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겠다고 다짐할 것이고, 지난 한해의 기간을 돌이켜 보는 우리는 요셉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아하즈 임금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무시되기 쉬운 인간의 모습을 오시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기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산 사람의 본보기로 바오로 사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오로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된 것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려다가 말에서 떨어진 체험을 한 이래, 하느님이 선택하신 일입니다. 그 바오로 사도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았는지, 오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주장합니다.  "내가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은 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림 4 주간을 지낼 우리도 같은 자세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는 성탄 대축일을 맞게 됩니다.  성탄 전날에는 구유예절을 통하여 비록 인형의 모습이긴 하지만 인간의 형상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탄 밤미사를 통해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다짐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탄 날 저녁에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펼치는 성탄예술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절 기간을 통하여 준비한 마음자세가 성실했다면, 성탄 축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기쁨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그 기쁨은 인간이 준비하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 네 번째 주일입니다.  최종적인 기쁨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 이 순간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80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