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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36-38: 닥 함마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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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839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6) 닥 함마슐트 (상)


영성 안에서 ‘책임과 소명’ 고민했던 유엔 사무총장

 

 

- 출처  www.voanews.com

 

 

삶의 책임과 영성의 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양하게 영성의 길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길들을 보고 듣고 체험할 때마다 우리가 던지게 되는 질문은,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길인가를 식별하게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현혹하거나 자기자신을 과시하고 꾸며대며 삶의 책임과 헌신을 회피하는 모습을 적잖이 보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름 아니라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구요. 그래서 영성을 추구하는 길은 동시에 사람이 삶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책임감과 소명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꼽히며, 콩고 내전을 중재하려는 노력 중에 의문의 추락사로 유명을 달리한 스웨덴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문학가였던 닥 함마슐트(Dag Hammarskjold·1905~1961)의 삶과 그가 유고로 남긴 글을 모은 「길잡이」라는 책은 오늘날 영성의 길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 안에서의 일과 책임, 소명들이 얼마나 깊이 영성과 신비적 체험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삶과 영성에서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 그의 일기에서 발췌한 말들을 통하여 음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올리버 콜러(Oliver Kohler)가 쓴 독일어판 전기인 「닥 함마슐트- 가장 긴 여행은 내면으로의 여행: 일기에서 발췌한 그의 삶의 여정」(아데오 출판사, 2015)에서 인용합니다.

 

 

소명

 

겸손을 통한 자기비움 안에서 다른 것들은 다 사라지겠지.

그러나 비로소 인생의 사명들이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것의 엄중함을 육신처럼 삼는 것이 소명에 따른 삶의 태도이리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일과 시와 예술 앞에서 ‘나’를 헌신하는 사명이 단순하고 자유롭게 주어지며, 내적인 정체성의 힘 안에서 나의 사명이 드러난다. 칭찬과 비난, 성공과 실패의 엇갈림이라는 바람은 나의 삶에 덧없이 지나갈 뿐, 삶의 무게 중심을 결코 흔들어 놓지 못할지니.

이렇게 살도록, 주여, 저를 도우소서.(1959년 7월 29일)

 

다른 길은 빛나는 태양 아래서 쉽게 눈에 띄는 휴식처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이 길이야말로 너의 길이며, 지금 너에게 주어진 길이며, 지금 네가 거절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울어라,

울어야 한다면,

울어라.

그러나 한탄하지는 말라.

바로 너를 이 길이 선택했으니

너는 감사해야 할 뿐.(1961년 7월 6일)

 

 

 

신앙 안에서 ‘순종하며’ 그분의 길을 발견하고, 환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길 아래서 실재를 대하며 그 길을 거듭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닐 일이다, 마치 장님놀이처럼: 보지 못할 때에는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올바른 길을 발견하려 애쓰지 않는가, 손으로 친구의 얼굴을 더듬어가며, 그러면서 이미 내가 늘 거기 있어왔던 나의 길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닌가. 아, 만일 내가 길이 거기 있었음을 한시라도 잊지 않았다면, 지금 내 눈을 가린 안대는 없었을 터인데.(1955년)

 

 

책임

 

우리의 책임이란,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만일 네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너의 배신으로 인해 인류에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다.

생각해보라, 너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그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너는 하느님을 위해서 그 책임을 질 수 있는지.(1957년 9월 3일)

 

 

하느님

 

우리가 더 이상 인격적 신성을 믿지 않게 된 그날, 신이 죽은 것이 아니다. 아니, 우리가 그날 죽은 것이다. 그날부터 더 이상 우리의 삶은 기적의 광채로부터 선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더 이상 우리의 삶은,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빛의 원천으로부터 비추어지지 않았다.(1950년)

 

언제나

모든 것을 보고 있되, 모든 것을 너그러운 인내 속에서

봐주는 신적 사랑과 함께

눈을 마주 보며

더없이 옳으시되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눈길이 겸손 속에서 그 사랑을 비출 수 있다면

 

 

 

삶이 보잘것없는가? 혹시 너의 손이 너무 작고, 너의 눈동자가 너무 흐릿한 것은 아닌가? 삶이 아니라, 바로 너이다. 자라나고 풍요해져야 하는 것은.(1950년)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25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7) 닥 함마슐트 (중)

 

공적인 삶과 영적 여정의 균형 이루려 노력

 

 

- 1955년 원자력평화이용국제회의에 참가한 닥 함마슐트(왼쪽에서 두 번째). 출처 위키미디어

 

 

현재

단지 미래를 위한 다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내용으로서 지금은 의미가 충만하다.

그 내용이란, 지금에 우리의 내용이며, 이로써 우리의 비어있는 곳을 채운다 - 만일 우리가 단지 지금을 받아 안는 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침묵

침묵을 통하여 이해하라.

침묵으로부터 행하라.

침묵 안에서 이루어라.

 

내면

가장 긴 여행은 자신의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일상

매일의 날들은 언제나 첫 번째 날이다. 매일의 날들은 생명이다.

매일 아침, 삶의 그릇이 받들어져야 한다. 삶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다시 봉헌하도록, 매일 새롭게 비워둘 일이다 - 왜냐하면 전에 있었던 것은, 이제 빈 그릇의 투명한 형태 속에서 거울처럼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957년)

 

- 닥 함마슐트의 유고집 「길잡이」에서

 

 

‘공적인 삶’의 의미와 닥 함마슐트의 생애

 

최근 몇 달간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들을 비통한 마음으로 되짚어보면서 ‘공적인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독일 출신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서 중 한 권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 정신적 위기의 중요한 뿌리를 각 개인들이 파편화된 사사로운 삶에만 몰입하고 공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마땅히 ‘공적인 삶’의 ‘빛’에 자기자신을 개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죠. 2차 세계대전 때 일찍이 나치 정권의 선동정책을 꿰뚫어보고 망명 길에 올랐던, 역시 유다인이었던 독일의 시인 힐데 도민(Hilde Domin)은 “왜 문화와 교양이 높았던 독일 사회가 그러한 지독한 독재의 광기에 굴복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었기에 그런 비극이 도래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적인 삶’의 ‘빛’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반드시 요구된다는 주장과 상통한다고 보여집니다.

 

한나 아렌트가 먼저 영어로 저술한 「인간의 조건」의 독일어 번역은 그 제목을 ‘비타 악티바 - 활동적 삶’이라고 달았는데요, 이는 여러모로 이 책의 주제와 더 잘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활동적 삶, 정치적 삶, 공적인 삶, 이처럼 다양하게 새겨볼 수 있는 이 라틴어 어구는 각 개인이 생존과 사적인 안위와 이익에만 매몰된 삶에서부터 공적인 헌신의 가치와 이를 통한 자기실현으로 나아가야 하며 자율적이면서도 상호 협력하는 시민으로서의 품위있는 삶을 영위해가야 한다는 책의 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를 196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또한 전후 복잡하게 전개된 국제정세와 그가 새로운 활동 무대로 선택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며 저술했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지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 절실한 경고로 들립니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관료주의와 사적 이익추구의 포로가 되고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정보를 제한하며 왜곡해 국민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고유한 권리를 교묘하게 박탈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민화하려는 정치적 위기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이나 무력감의 한탄, 아니면 무관심이나 교묘한 여론 호도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한 길을 찾는 것이 절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곱씹어 보며 이러한 혼돈과 위기를 넘어서는 길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가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체로서 ‘공적인 삶’을 형성하고 실현해가야 할, 양도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인격적 자존감을 되찾는 데서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새롭게 갱신된 시민정신이 살아날 때만이 민주주의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공적인 삶’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복원이 소소하면서도 획일화시킬 수 없는 개인으로서 누리는 일상과 내면의 자유와 개성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적인 삶’의 우위를 말하며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차원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경외를 잃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이라는 절대자와의 깊은 내면적 관계 속에서 각자가 본래적으로 지닌 사회적, 공적 책임의 진지함을 자각하고 사명으로 여기며, 공적인 삶과 영적 여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근원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고 깨달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 깨달음에 충실하고 실천하며 살아간 닥 함마슐트의 삶은 오늘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닥 함마슐트의 유고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가 그 방대한 공적 직무를 수행하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이 맡은 공직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공적인 삶’은 그에게는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처럼 주어진 사명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가문은 수백 년 전부터 꼽히는 스웨덴의 귀족가문이었고, 더구나 특권의식과 영지 속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대신 자신들이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다름 아니라 닥 함마슐트의 아버지인 할마 함마슐트(1862~1953)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스웨덴의 수상을 역임하기까지 했던 할마 함마슐트는 닥 함마슐트에게 사심 없이 공적인 직무를 사명으로 여기며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공적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도덕성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아버지의 모습은 때로는 아들에게 하나의 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닥 함마슐트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되,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겸허하고 외유내강의 덕목을 체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생동감 있는 삶을 사랑하고 자연과 예술, 언어적 아름다움의 감수성을 지녔고, 영적인 실재에 대한 진지하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살아있는 내적 균형을 얻게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 아녜스에게서 수많은 학자,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던 외가 쪽 전통도 큰 역할을 하였겠지요.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격조 높은 문학적, 예술적 심미안과 섬세한 감수성을 실감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 비록 그가 경제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외교관이자 국제 정치가로서의 길을 걸었지만, 평생 진지하게 문학을 자신의 동반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생 존 페르스(Saint-John Perse, 1887~1975)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의 대표작을 스웨덴어로 번역하였고, 마침내 1960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8) 닥 함마슐트 (하)

 

국제정치 중심에서도 겸손한 언행으로 주목받아

 

 

- 1961년 닥 함마슐트 장례. 출처 위키미디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Icke jag utan gud i mig)”

- 스웨덴 웁살라 닥 함마슐트 묘소에 적혀 있는 묘비명

 

 

인간 닥 함마슐트와 세계 평화를 위한 마지막 헌신

 

닥 함마슐트(1905~1961년)는 1961년 9월 12일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보내며, 내전을 피하게 하는 길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콩고의 분쟁지역 방문길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암살로 간주하고 있는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닥 함마슐트는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서 철학, 경제학 그리고 법학을 전공하고 석사와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에 이미 뛰어난 지적능력과 함께, 관료로서의 행정적 능력도 널리 인정받으며 첫 출발을 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자신의 학문적 확신을 현실적인 경제, 정치적 상황에서 현명하게 구현해가는 관료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체득했다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우선 경제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40대 초반에 이미 재무장관, 스웨덴 중앙은행 총재 등의 중책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는 자신의 관심사와 활동영역을 경제분야와 함께 국제 외교분야로도 확장해서 외교부 차관과 장관서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스스로 사퇴한 전임 총장 노르웨이의 리에에 이어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친절하고 세련되며 조용한 외교관으로 보여진 그를 강대국 대표들은 손쉬운 상대자로 생각해 선택했지만 그는 예상을 깨고 전후의 복잡하고 첨예한 국제 질서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통한 국제질서 수립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언어적, 외교적, 행정적 탁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유엔 평화유지군을 설립하는 등 유엔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강대국들의 일방적 이익추구를 견제했던 모습에서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평가합니다.

 

화려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아갔고 그에 걸맞은 업무능력과 현명함을 갖춘 그였지만, 우리가 고급 관료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그저 성공에 눈이 먼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인 경향이나 자기도취와 오만함에 사로잡힌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공인으로서 공적으로 자신이 끊임없이 드러나며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하며, 사심 없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소명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운명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며, 참된 인생의 행로는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몫은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그러한 소명에 응답하고, 그러한 길을 걷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언제나 쾌활하고 편안하며 친밀한 인상을 받았지만, 사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내면에 있는 숙고에서 우러난 진지함과 끊임없이 도야해온 자기 절제로부터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닥 함마슐트에게 두드러졌던 것은 겸허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독선과 우월감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와 환대로 열매 맺을 수 있었겠지요. 그가 겸허함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사색하고 체화하려 노력한 흔적은 유고집에 자주 보여지는데요, 그는 나무들 앞에 핀 작은 꽃들 앞에서 보이는 우리의 겸손함이, 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과 만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는 언제나 막 배우기 시작하는 초심자에 불과하다고 일기에 적어두었습니다.

 

닥 함마슐트가 숨 가쁘게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업무와 만남 속에서, 또한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과 갈채, 관심 속에서도 공감력과 개방성, 겸허함과 소박함 같은 인격적 덕목과 매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가 매일 자기 자신의 성찰을 일상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직위에 따른 권능을 사용할 자격은 오직 매일매일 그 직위에 부합하는 정당성을 가지고자 애쓰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라고 쓰기도 했지요.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했고, 국제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이 저명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 이토록 깊은 정신적 내면을 도야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감정과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정서적, 문학적으로 탁월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일기들이 유고집 형태로 공개되면서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에게 일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한 위로하고 고무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 책장에서는 마치 메모처럼 수많은 쪽지에 적혀있는 그의 일기들이 여러 사진들과 함께 발견되었고 그를 아끼는 이들이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서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자 황제로서 로마 시대 칠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리게도 됩니다. 황제의 권좌가 아니라 인생의 참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철학자의 삶을 더 사랑했던 그는 매일의 격무와 전쟁터에서의 격전을 뒤로하고 매일 밤, 자신의 막사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가르치는 자성과 성찰의 글을 썼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후 이를 모아 후세 사람들은 ‘명상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이는 오늘날에도 ‘삶의 기예’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아있습니다.

 

닥 함마슐트의 일기는 고대의 현자가 그러하였듯,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상록’과는 또 다르게 오늘의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측면들이 있다 싶습니다. 먼저 그의 글은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해 쓰여진 글이지만, 묘하게 읽는 이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을 주는데요, 이는 그가 완전함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되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더 정의롭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숨졌을 때 소지한 서류가방에는 유다인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마르틴 부버의 그 유명한 저서인 「나와 너」를 번역 작업하던 노트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독신으로 산 닥 함마슐트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가 다름 아닌 인격적 관계였음을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 진력한 사람답게 그의 삶과 글에 나타난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이의 노고와 고민, 기쁨과 행복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영감을 줍니다. 또 그의 글은 무엇보다 철학적, 정신적 탐구와 성찰을 넘어서는 절대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닥 함마슐트의 삶과 글은 그러기에 올바른 삶과 영성의 길을 찾는 신앙인들에게 실천적 투신과 영성적 체험이 결코 다른 원천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소중한 유산이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9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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