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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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41: 생드니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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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01 ㅣ No.1014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1) 생드니 대성전 (상)


3세기 순교자 성 드니 무덤 위에 세워진 최초의 고딕 성당

 

 

- 최초의 고딕 성당 생드니 대성전 정면. 출처=Wikimedia Commons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당한 파리의 첫 주교

 

유명한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덜 알려졌지만, 고딕 성당을 말할 때 이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성당이 파리 교외에 있다. 최초의 고딕 성당인 생드니 대성전(Basilique-cathdrale de Saint-Denis)이다. 3세기의 순교자인 파리의 첫 번째 주교 성 드니(Saint-Denis)의 이름을 따서 그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성 드니는 3세기에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를 재복음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성 드니와 두 동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250년경(258년 또는 270년?)에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당했다. 그런데 그는 잘린 머리를 들고 계속 설교하면서 지금 대성전이 지어진 곳까지 왔다. 그 후 이 성인의 무덤은 순례자들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313년경 그의 무덤 위에 순교자 기념경당(martyrium)이 세워졌다.

 

더구나 당시 성 드니는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설교할 때 귀를 기울인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사도 17,34)로 동일시되었고, 또 「천상 위계론」 등 네오플라토니즘 신학서를 썼다고 여겨지는 위(僞)-디오니시우스라고 오해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생드니 수도원은 성 드니의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 성 드니의 순교, 생드니 대성전 북쪽 포탈. 출처=histoiresduniversites.wordpress.com

 

 

이런 성인의 권위에서 프랑스 왕가는 성인의 묘소를 돌보기 시작했고, 5세기에는 여성 귀족들이 성인의 유해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그러자 신앙심이 깊었던 메로빙거 왕조의 다고베르 1세는 632년 생드니 베네딕도 수도원 건립 자금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왕실 지하 경당에 안장된 최초의 프랑스 왕이 되었다. 생드니 대성전에는 수많은 프랑스 왕과 왕비가 묻힌 무덤 60개가 있다. 이렇게 성 드니는 프랑스와 프랑스 군주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2세기 들어 수도원 성당 개축 빠르게 진행

 

첫 번째 수도원 성당은 지하 경당을 증축하기 위해 754~775년에 확장되었다.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Pippinus III Brevis)에서 시작되어 샤를마뉴 치하에서 완성된 새로운 로마 바실리카식 성당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보관된 지하 경당 주위로 중심을 유지했다. 이때 건물 규모가 커짐에 따라 로마네스크 건축 기술로 구조적 통합을 유지하려고 제한적이고 좁은 창문이 있는 두꺼운 벽을 사용했다. 금과 모자이크로 내부를 장식했지만, 이러한 장식을 비출 수 있는 자연광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생드니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은 12세기에 다시 확장되었다. 이때 기존의 건축 요소를 융합하여 자연광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례 공간에 통합하였는데, 이는 수도원장 쉬제르(Abbot Suger, 1081~1151)의 독특한 비전에서 비롯되었다. 수도원장 쉬제르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이 수도원의 부속학교에서 미래의 국왕이 될 루이 6세의 친구로서 성장했다. 그는 1122년 22세에 생드니 대수도원 원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미 루이 6세의 강력한 지원과 함께 부유한 이들과도 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도원은 영향력이 매우 커지고 부유해져서, 1135년에 수도원 성당의 개조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의 거의 모든 왕과 여왕이 묻혀 있다, 생드니 대성전. 출처=EMILE LUIDER/REA/REDUX

 

 

그러나 시토회의 성 베르나르도는 왕가의 묘소이자 왕립 수도원으로서 다수의 평신도, 순례자, 특히 유해 숭배자를 받아들이고 있던 파리 교외의 생드니 수도원의 부패, 무질서도 엄격하게 공격했다. 쉬제르는 생드니 대수도원의 질서 회복을 완수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개혁이 성 베르나르도의 요구를 충분하게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두 사람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생드니 대수도원에서 자란 쉬제르는 성당을주님에게, 성 드니에게, 그리고 프랑스 왕실에 어울리는 훌륭한 건물로 다시 세우기를 꿈꿔왔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제단과 제구(祭具)도 하느님께 어울리는 귀금속으로 장식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쉬제르는 이렇게 썼다. “거룩함의 작용에는 믿는 이의 정신, 순수한 마음, 신앙심 깊은 마음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 순수함과 외적 광휘로 제구를 장식하는 것으로도 더없는 거룩한 희생에 봉사하고 찬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빛의 벽’으로 경이적인 빛의 공간 실현

 

쉬제르는 이윽고 성당 건축 전체를 개축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그는 자연광이 가득한 높은 예배 공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줄지어 선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걸러져서 성당 전체에 아름답고 반짝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상 패턴을 만들어냈다. 그 빛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이는 전통적인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놀랍게도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 건축 기술을 통합하였다. 새로운 파사드는 1135년에서 1140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생드니 대성전은 수 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정신적, 정치적, 예술적 역사를 증언하는 고딕 예술의 보석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고딕의 빛의 공간이다.

 

다만 쉬제르는 성 베르나르도가 베즐레의 생트 마리 마들렌 대수도원에 소집한 제2차 십자군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출진한 사이에 섭정하며 국정에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성당 건축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다. 건물 중심부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성숙한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쉬제르 대수도원장. 출처=BRIDGEMAN IMAGES

 

 

그렇다 해도 성당은 물질로 세워진 건물이다. 당시 성당 건축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우주의 건축가로서 만드신 세계를 본뜨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은 돌이라는 건축재료의 물질성을 철저히 긍정하며 이 땅에 거룩한 공간을 실현했다. 이에 성 베르나르도도 성당은 하느님의 세계 질서를 비춰주는 것이며, 수학적·기하학적 질서를 따라 세워지는 건축에 깊은 의미를 인정했다. 단지 지나친 높이나 크기, 장식과 탑은 엄하게 금지하며,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쉬제르는 하느님을 위해 물질적인 것으로 가능한 한 아름답게 장식해야 하며, 약한 인간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만 비물질적인 하느님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마음은 물질을 통해 진실에 이르고, 깊은 마음은 진리의 빛을 보고 다시 살아난다”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리하여 고딕 성당은 물질성을 부정함으로써 천상에 이르는 통로인 거룩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석조건축은 벽구조다. 목구조와 철골구조 건축은 기둥과 보로 이루어지는 골조구조이며,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벽과 기둥이라는 두 구조 형식이 모두 가능하다. 그런데 고딕 성당은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라는 놀라운 구조법을 발명하여, 돌로 골조구조를 실현하고, 돌기둥과 리브 사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바꾼 ‘빛의 벽’으로 경이적인 빛의 공간을 실현했다. 이러한 구조 특성은 모두 고딕 대성당의 본질인 빛의 공간성에 수렴한다. 그야말로 고딕 대성당은 이 세상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의 건축이었다.

 

쉬제르의 생드니 대수도원 성당으로 12세기 고딕 양식 예술이 꽃피고, 수도원 중심에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주교좌 성당, 이른바 대성당 문화로 이행하게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0월 29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2) 생드니 대성전 (중)


높이와 빛에 대한 쉬제르의 영감, 새로운 고딕 건축 창조

 

 

-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 주변. 출처=sah.org

 

 

생드니 대수도원 부속 성당 증·개축 이어져

 

고딕 대성당은 파리 교외의 생드니 대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탄생했다. 이때 수도원장 쉬제르가 착수한 것은 신축공사가 아니었다. 카롤링 왕조에 지어진 성당은 775년에 확장되었고(평면도의 가운데 빗금 친 작은 성당), 832년에는 반원 제단 동쪽에 증축된 바 있는(작은 성당 반원 제단의 오른쪽에 덧붙인 부분) 유서 깊은 성당을 다시 증·개축하는 공사였다. 요새 용어로 리노베이션 공사다. 그러나 이 공사는 그야말로 새로운 양식을 낳은 혁신적인 프로젝트였다.

 

쉬제르는 서쪽 정면과 동쪽 제단부를 개축했다. 그사이의 회중석은 쉬제르가 죽은 이후인 1231년에 유명한 피에르 드 몽트뢰유(Pierre de Montreuil)에 의해 또다시 재건되었다. 다시 쉬제르의 제단은 개축되었고, 회중석과 좌우 수랑(袖廊)이 새로 건설되어 최종적으로 1281년에 헌당되었다.

 

쉬제르가 이런 개축 공사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중세에 증가하는 도시 인구에 따라 신자가 넘쳐날 정도로 옛 성당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개축한 이유를 “단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적당한 크기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성인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늘어난 신자들이 자주 모여왔는데도, 너무나도 협소한 이 바실리카는 언제나 이런 불편함을 심각하게 버티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왔을까 하겠지만, 생드니 대수도원은 파리 중심부인 시테섬에서 북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어서 축일에 걸어서도 2~3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대 프랑스 왕이 묻혀 있어서 성당을 재건하는 데에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했다.

 

 

경당 깊이 얕게 함으로써 높이와 빛 통합

 

1137년 쉬제르는 먼저 회중석으로 연장하여 문랑을 확대하고 서쪽 정면을 34m로 넓힌 것을 1140년 6월 9일 완성했다.(평면도 왼쪽 끝의 진한 부분) 본래는 문이 하나였는데 세 개의 포털로 확장되었다. 세 개의 포털은 각각 중랑과 측랑의 너비를 보여준다. 각 포털 위에 있는 아치형 창문 아케이드는 장식 요소가 외관 전체의 통일성을 더해주었다. 탑 두 개가 계획되었는데, 북쪽 탑은 세 차례의 토네이도의 영향을 받아 1846년 무너진 채로 있다. 그러나 이 서쪽 정면 자체는 혁신적이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생드니 수도원 부속 성당의 내부는 측랑이 있는 중랑, 평평한 천장, 반원 제단을 둔 매우 소박한 성당으로 아마도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대성전인 산타 사비나와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 생드니 대성전의 평면 변화. 출처=employees.oneonta.edu

 

 

그러나 이어서 하느님 백성에게 힘 있게 말하는 더없는 영광의 제단을 창조하기 위해 제단을 증축했다. 동쪽 제단 부분(평면도 오른쪽 끝의 진한 선 부분, 이런 프랑스 고딕 성당의 동쪽 끝을 ‘슈베 chevet’라고 한다)을 새로운 건축 기술로 개축하고 3년 3개월 만인 1144년 6월 14일이 헌당함으로써 고딕 건축을 결정적으로 창조했다.

 

증축된 반원 제단은 7개의 베이로 나뉘며, 그 바깥쪽에는 2중의 주보랑이 둘러 있다. 이렇게 해서 제단부는 두 배로 늘어났고 천장 높이도 28m로 높였으며, 바깥 주보랑에는 7개의 경당이 방사하며 열려 있다. 재건축 이전에는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작은 경당이 두꺼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무겁고 어두웠다. 그러나 경당의 깊이가 얕고, 그 경당을 덮는 볼트도 주보랑과 융합하고 있어서 마치 두 번째 주보랑이 밖으로 둥글게 내민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경당의 깊이를 얕게 함으로써 높이와 빛을 통합하고 순례자의 동선을 위해 이중 행렬 보행로를 만들었다. 이로써 문랑과 마찬가지로 제단도 옛 중랑의 폭에 비해 꽤 커서 전체적으로는 머리가 큰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슈베’는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으로 상징해 주었다.

 

-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 출처=worldhistory.org

 

 

리브 볼트·첨두아치로 전혀 다른 공간 완성

 

생드니 대성전은 기존 건물과 신축 부분의 융합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지하 경당이 마련되어 그곳에 유해나 유물을 안치하고, 그 위에 제단을 두는 것이 통례였고 제단은 회중석보다 바닥이 높았다. 이와는 달리 고딕 성당에서는 공간을 일체화하고자 점차 지하 경당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생드니에서는 카롤링 왕조의 지하 경당을 이어받은 채로 개조했기 때문에 제단과 중랑의 바닥 레벨의 차는 크고, 따라서 제단과 회중석은 격리되어 있다. 이렇게 개축된 제단에 관하여 쉬제르는 “상부의 기둥과 그것들을 잇는 아치가 하부의 지하 경당의 기둥 위에 놓였다”고 말했다.

 

새로이 창안된 제단부 공간은 경쾌하다. 그런데 이 경쾌함을 강조하는 것은 두 개의 주보랑을 구획하며 그 위로 첨두아치가 가볍게 위로 뻗어 오르는 우아한 대리석 원기둥 열이다. 쉬제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이나 목욕탕 유적에서 원기둥을 배로 수송해 와 옛 회중석과 경계를 이루는 새로운 제단을 짓고자 했다. 쉬제르가 카롤링 왕조 8세기의 건물을 7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것으로 잘못 알아 400년인데도 500년 이상 이전에 건설되었다고 했으나, “옛 건물과 새 건물의 적합성과 일관성”으로 “더 크게 통합된 전체 속에 들어오게” 했다. 그는 카롤링 왕조의 성당 안에 늘어서 있던 대리석의 원기둥 열을 “변화가 풍부한 칭찬을 받아 마땅한 대리석 원기둥”이라고 건설기록에 적을 정도로, 고대와 동등한 시대에 지어진 성당과 조화하는 리노베이션을 원했다.

 

- 생드니 대성전의 주보랑. 출처=winthisfalsworld.blogspot.com

 

 

이때 쉬제르는 그가 잘못 알았던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벽 일부를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보존’하고자 했다. 옛 전승에 의하면 이 벽은 다고베르 왕조 시절 건설이 한창일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어 “안수하며… 성별하셨다”고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의 벽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학술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쉬제르는 “이 거룩한 석재 자체에 경의를 드리고”, “옛 벽 일부를 될 수 있는 한 남겼다”고 말하고 있다.

 

시선은 이 비현실적인 내부에 끌리면서 주보랑을 걷게 된다. 그러면 깊이가 얕은 경당의 벽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에 절도 있는 리듬으로 대응해 준다. 그 결과 리브 볼트와 첨두아치를 기본 요소로 하며 가볍고 완만한 운동감이 있는 전혀 다른 공간을 완성해 주었다. 이때 볼트에 리브가 없었더라면 내부 공간은 이보다는 무겁고 불안정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보랑과 경당의 복잡한 볼트는 리브가 교차하는 중심(重心)에 보스(boss)라는 장식을 둠으로써 더욱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서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주보랑의 리브 볼트나 벽기둥이 완전히 고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당을 지나 관통하는 바깥 주보랑 벽에는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운 커다란 창이 있다. 다시 말해 우회하는 측랑을 가진 긴 다각형 통로에 바닥까지 내려온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이끄는 참으로 놀라운 조망으로 가득 차 있다. 회중석에서 보면 동쪽 제단부는 리브 볼트 천장이 높은 위치에서 서로 결합하며 그 경계를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지배하고 있다. 그야말로 과감한 혁신과 신비한 상징의 통합이었는데, 이에는 높이와 빛에 대한 쉬제르와 그의 석공들의 영감이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5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3) 생드니 대성전 (하)


“이 집을 고귀하게 빛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밝히게 하소서”

 

 

- 생드니 대성전 제단부. 출처=Juan Jose Jimenez

 

 

거룩한 빛으로 가득 찬 ‘빛의 공간’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은 벽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다. 제단의 중심에서 7개 경당도, 피어(pier)나 원기둥도 경당 사이의 버팀벽도 방사상으로 배열되어 있다. 경당의 피어도 모퉁이가 잘려져 있다. 주보랑은 두 열로 배열된 가느다란 원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2중 주보랑이다. 모두 밖으로 볼록한 경당의 곡면 벽을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신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흘러들어온 빛이 주보랑과 제단 전체를 비추고 있다.

 

이에 대하여 쉬제르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경당이 둥글게 연속하는 까닭에 성소 전체가 매우 거룩한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굉장한 훌륭한 빛으로 끊임없이 가득 차 있다.” 밝게 빛으로 가득 찬 이런 빛의 공간. 이것이 고딕 성당의 가장 큰 본질이다. 이 빛으로 동서의 긴 축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리고 경당 벽과 주보랑 그리고 제단부를 빛의 공간 층으로 지각된다.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우리는 고딕 건축을 새삼스레 묻게 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빛을 상상하고 구현했는가? 왜 이런 빛이 고딕만이 아닌 모든 성당 건축의 본질이라 여기게 되었는가?

 

그럴 때마다 로마네스크의 성당 내부는 어두웠으나, 고딕 성당에서는 이처럼 밝은 빛의 공간을 구현했다고 비교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고딕 성당의 내부 공간은 언제나 빛나고 있지는 않다. 엷은 빛이 감도는 스테인드글라스 면은 직사광선이 있을 때만 선명하게 빛나고, 밤이 되면 침묵하는 색깔로 변하고 만다.

 

생드니 대성전에서 처음으로 실현된 빛은 보통의 빛이 아니었다. 빛이 거룩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순간, 그 빛은 무언가 새로운 것, 새로운 빛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가장 고귀한 빛과 색채가 현상으로 통합된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바깥 주보랑을 감싸는 경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창문이 아니다. 그것은 금속을 두드리어 종이처럼 얇게 판판하게 편 박(箔)이 되어 제단을 크게 둘러싸는 벽, 곧 ‘빛의 벽’이다. 이것을 구현한 것이 바로 일드프랑스의 고딕 대성당이고, 이 투명한 건축이 처음으로 실현된 곳이 바로 쉬제르가 재건한 새로운 생드니 대성전 제단부였다.

 

이 새로운 빛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드니 대성전의 영감은 분명히 보석의 도시 천상의 예루살렘에 관한 요한 묵시록에서 왔다.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묵시 21,18-21) 천상의 예루살렘을 지은 영광스러운 건축재료는 스스로 빛나는 보석이다. 따라서 이 땅의 성당은 저 빛나는 심오한 색깔로 덮인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보석으로 천상의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되었다.

 

 

- 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출처=urbstravel.com

 


- 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경당의 '빛의 벽'. 출처=Steven Zucker

 

 

빛을 받아 빛나면서 스스로 빛나는 보석

 

그래서 생드니 대성전 벽은 보석의 벽이다. 무릇 중세의 민간신앙에서는 보석은 ‘빛을 받아 빛나’면서도 내부에서 ‘스스로 빛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생드니 대성전 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을 받아 빛나는’ 보석이며, ‘스스로 빛나는’ 보석 그 자체이기도 했다. 더구나 중세에서는 ‘스스로 빛난다’, ‘빛을 받아 빛난다’라는 현상은 단지 물리적인 것만일 수는 없었다. ‘빛의 벽’이 거룩하게 지각된다고 바로 그것이 반드시 거룩한 공간 현상의 중심은 아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빛의 벽’에서 빛 바로 그것의 질, 그러한 시각적 공간에서 나타내는 깊이의 현상이었다.

 

교부들은 보석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투과하여, 물질에 감추어져 있던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해석했다. 이런 보석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보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것이 고딕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긴 신학적 의미였다.

 

이런 이유에서 쉬제르는 이 빛을 그리스도의 빛이라고 생각하고 ‘룩스 노바’(lux nova, 새로운 빛)라고 말했다. 이 빛의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가장 값비싼 사물인 성소 안의 장려한 보석은 이야말로 거룩한 미사 전례에 어울린다고 믿음과 이해를 그대로 나타냈다. 우리의 정신은 여러 사물의 도움이 있을 바로 그때 진리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또 그는 말했다. “더욱이 각지에서 불러들인 장인들의 훌륭한 손으로 우리는 아래쪽으로나 위쪽으로나 모두 훌륭하고 다양한 새로운 창을 그리게 했다. …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우리를 북돋우는 곳으로 그들 중의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맷돌을 돌리고 예언자들이 맷돌에 포대를 운반하고 있다.” 무릇 정신은 물질에서 비물질로(쉬제르의 말을 빌리자면 “de materialibus ad immaterialia”) 향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성당은 값비싼 제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초자연적 세계로 이끈다.

 

- 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성모 경당의 '빛의 벽'. 출처=Wikimedia Commons

 

 

빛은 정신적 육체요 육체화된 정신

 

1140년 이 성당을 헌당했을 때 쉬제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을 고귀하게 빛나게 하시고, 고귀하게 빛나는 이 집이 우리 마음을 밝히게 하소서(Nobile claret opus, sed opus quod nobile claret, Clarificet mentes).” 물질로 빛나도록 만들어진 예술작품이 모든 이의 마음을 비친다는 것이다. 진리는 물질적인 것의 도움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조(浮彫)와 같은 것에서는 진실한 빛들(true lights)은 단순히 지각된다. 그러나 그 빛들은 그리스도이신 진리의 빛(True Light)에 이끌려 사람을 해방하고 구원한다.

 

쉬제르는 자기 생각<꺾쇠 안>을 따로 넣으며 에페소 2장 20-22절을 인용한 바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의 벽을 다른 벽에 잇는>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가 물질로 더욱더 높고 어울리게 세우고자 한다면>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우는 것을 배워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가? <하나의 벽을 다른 벽에 잇는>은 물질적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를 의미하는 두 가지 성질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는 물질로 세우는 것은 정신적으로 세우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물질적인 성당 건축안에서 정신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쉬제르는 이런 빛의 사상을 어디서 얻었는가? 고딕의 중심 주제였던 이 ‘빛’은 중세 신플라톤주의에서 비롯한다. 5세기 말의 동방 신비주의자 디오니시우스는 요한 복음의 빛의 신학을 플라톤주의와 결합했다. 신플라톤주의는 빛은 자연 현상 중 가장 고귀하고, 가장 물질적이지 않고 순수형상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여겼다. 빛은 육체가 없는 실체와 육체적 실체 사이의 매개자이다. 띠라서 빛은 정신적 육체요 육체화된 정신이다. 바로 이것이 생드니 대성전의 빛의 사상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2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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