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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17-19: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1) 하느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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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2 ㅣ No.759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17)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1. 하느님 백성 1)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되고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1), 7항).

 

즉, ‘하느님 백성이 저마다 제 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 감각으로 공동체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시노달리타스가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선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해야 하는 ‘주체’를 살펴봅니다. 누가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해야 할까요? 교황? 교구? 주교? 신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아 왔던 내용에서도 반복되어 언급되는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이 시노달리타스의 주체이자 모든 신학적 요소의 뿌리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중세 이후 지나치게 위계적이고 제도적인 교회관을 극복하고, 잊혀 왔던 교회의 자기 인식을 다시금 회복하며 ‘교회는 곧 하느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계 제도를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는 전체로서 교회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망은 이전의 교계 제도를 중심으로 교회를 보던 것과 비교할 때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 헌장 9항).

 

공의회는 평신도만이 아니라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교회 헌장 12항) 세례 받은 사람들 전체’를 ‘하느님 백성’이라고 정의한 후, 교계 제도가 하느님 백성 ‘위’ 혹은 ‘밖’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 백성 전체가 하느님 구원의 도구로 부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교계 제도는 이러한 부르심에 봉사하기 위한 제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 이전에 ‘공동합의성’이라고 번역하여 사용되던 용어를 2021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라틴어 표현 그대로 ‘시노달리타스’로 통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본 문헌은 그 이전에 발표 및 번역되어 출간되었기에 문헌의 고유 제목으로 ‘공동합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2023년 8월 6일(가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18)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1. 하느님 백성 2)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론은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백성으로서 교회에 속한 이들은 그 품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맡겨진 직무에 있어서의 - ‘다름’이지, ‘우월’을 뜻하는 것이 아닌 -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이처럼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은 다양한 형태로 행사되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품위와 사명, 그리고 그들의 은사와 소명, 직무의 질서 있는 풍요로움을 강조”(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항)합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백성’은 교회 안에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백성’이라고 표현할 때 이 말 앞에 붙는 소유격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이는 ‘하느님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직자의 교회, 평신도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 ‘그분의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교회든 교회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어떠한 공동체든 ‘자신의 것’인 양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곳에서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마치 기존의 성직자 중심주의가 가진 폐해를 극복해 이제는 교회 주도권이 평신도에게로 이양된 것 같은 일종의 ‘주도권 싸움’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이렇게 규정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민주 시민 사회의 근간과는 달리, 교회 주도권은 성직자나 평신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뜻을 함께 식별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으로써의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 헌법의 규정을 교회론적으로 바꾸어 보면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겠지요.

 

“교회의 주권은 하느님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2023년 8월 13일(가해) 연중 제19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19)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1. 하느님 백성 3)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을 위해 우선,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성직자와 평신도, 수도자가 서로에게 온전한 구원 여정의 동반자(쉬노도이 σύνoδοι)가 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이것이 교회 내 여러 어려움의 근본적 요인이 되고 있음을 성찰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불러 모으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각자 당신께 오고 제각각 구원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본당이든 교구든 어떻게 되든지 나는 상관없어. 나는 나 혼자 기도 열심히 하고, 주일 미사 열심히 나가면 되지’라는 사고방식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함께함’으로써만 구원을 향해 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 헌장 9항).

 

그러므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교회 헌장 2-4항)’이며, 사명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길을 정향하도록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받고 그 자격을 받았습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43항). 이 교회로 불린 모든 하느님 백성은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받았으며,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품위의 동등성과 직무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 교회 안에서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2023년 9월 3일(가해) 연중 제22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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